방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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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1. 개요
2. 일생
3. 기타
5. 수상경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인. 조선일보 전 회장. 호는 우초(愚礎).

2. 일생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동문동에서 방재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방재윤은 원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아들이 없었던 방응모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방일영은 동생인 방우영과 함께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유년기에 할아버지인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의정부시로 이주하였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주오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그 후 1943년 할아버지 방응모의 부름으로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장비서가 되었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자 조선일보 이사로 선출되었고, 이후 부산시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1953년부터 인쇄인을 지내다 1954년에 대표이사로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1970년 발행분까지 등기상 명예사장은 방응모로 되어 있었다.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같이 일했으며 1970년에는 사실상 공석이던 사장직까지 주었다.
1975년에는 방일영의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매년 10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했다. 현재까지 3백 30여 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규모를 넓혔다.
1978년에는 학교법인 동방문화학원[1] 이사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93년에 조선일보 회장직을 동생인 방우영에게 넘기고 고문이 되어 1999년 퇴임 시까지 56년을 조선일보와 보냈다.
그 외에도 1964년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 1965년 국제언론인연맹(IPI) 위원, 1969년 아시아신문재단 이사장, 1976년 IPI 한국위원장, 그리고 온양 방씨 중앙종친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의 나이 81세였다.

3. 기타


국내 최대 언론사인 조선일보의 사주인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러줬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변호사는 이 나라 여자들의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준 사람'''이라고 했다.[2] 웃기게도 본인이 해명했지만 똑같은 별명이 방우영한테도 있었다.
그는 본처 박씨(1986년 작고) 사이에선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 등 2남 1녀를, 첫 번째 후처 사이에선 3남을, 두 번째 후처 사이에 1남 2녀를 각각 두었다.

4. 가족 관계



보다 자세한 가계도는 조선일보 가문 문서를 참고할 것.

5. 수상경력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2)
  • 금관문화훈장 (1999)

[1] 숭문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사학재단.[2] 머리를 얹다라는 표현은 어린 기생과 관계를 맺어 그 머리를 얹어 주다, 또는 (성경험이 없는) 처녀를 시집보내다 라는 뜻이 있다. 조선시대에 비녀를 꽂으려면 머리를 올려야했는데 비녀는 유부녀만 할수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