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연

 


첫 여성 평일 앵커

<colbgcolor=#05104f> '''백지연''' (1988~1992)

김지은
김지은

'''백지연''' (1993~1994)

정혜정
정혜정

'''백지연''' (1995~1996)

김은주

최율미

'''백지연'''

김주하
[image]
이름
백지연 (白智娟)
출생
1964년 8월 5일 (60세), 서울특별시
신체
키 174cm, 혈액형 AB형
학력
명지여자고등학교[1]
연세대학교 (심리학 / 학사)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 / 석사)
데뷔
1987년 MBC 공채 아나운서
경력
역대 최연소, 최장수 뉴스데스크 앵커
종교
개신교(예장통합)[2]
링크

1. 개요
2. 상세
3. 아들의 친자여부에 관한 유언비어 사건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2. 상세


1987년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재학 중 문화방송 아나운서 공채에 합격하여 입사하였고, 1988년 5월 9일을 기점으로 사상 첫 뉴스데스크 여자 앵커가 된다. 재학 중 입사했는데 입사하자마자 뉴스데스크 앵커가 된 것이니 최연소 뉴스데스크 여자 앵커인 셈이다. 이후 파업이나 1년간의 유학을 제외하고 1996년 8월 9일까지 뉴스데스크를 진행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최장수 뉴스데스크 여자 앵커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정리하면 그녀는 최초[3], 최연소, 최장수 뉴스데스크 여자 앵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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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데스크 진행 시절. 왼쪽의 남자 앵커는 강성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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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시절 사진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뉴스 앵커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져 회사 차원에서 그녀를 기자 신분으로 전환하길 원했고,[4] 그래서 직종 변경 시험을 통해 1990년 MBC 국제부 기자가 되어 뉴스 앵커로서의 활동을 이어나갔다.[5] 1992년 10월 2일 MBC 노조의 파업에 동참하며 뉴스데스크에서 하차됐고, 1993년 4월 12일 다시 복귀했다. 1994년 9월 16일 영국 유학으로 하차했고, 1995년 10월 2일 뉴스데스크로 복귀했다. 이후 아들을 임신하였고 1996년 8월 9일 뉴스데스크에서 만삭의 몸으로 하차했다. 입덧이 없었기에 마지막까지 진행이 가능했다는 후문. 1994년 9월 16일이었는지 1996년 8월 9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승승장구에서 마지막 방송 후 느낌에 대해 털어놓았다. 끝까지 밝게 인사하자 "안 울어?"라는 주변 스태프의 질문이 있었고, 이후 송별회까지 울지 않았으나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고. 20대의 거의 모든 것을 뉴스데스크에 바친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래서 울었다고 한다.
출산 후 복직하여 주로 아침 시간대 뉴스를 진행하다가 1999년 3월 MBC를 퇴사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명예퇴직 광풍 속에서도 MBC 측에서 극구 만류했는데 훗날 이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생활을 살아보고 싶었다"며 짧게나마 퇴사 이유를 밝혔다. 이후 각종 CF를 촬영하였고, 토크쇼 '백야', 시사교양 '우리시대' 등 몇몇 프로그램을 맡았고 한양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였다.
2001년에는 KBS2의 시사터치 코미디파일의 MC로 출연한 적도 있다.
2004년 YTN에서 프리랜서 앵커 자격으로 '백지연의 뉴스Q'를 진행하였다. (지금은 YTN 소속 앵커가 '뉴스Q'를 진행하고 있다.) 이후 2007년 SBS 라디오 '백지연의 SBS 전망대[6]'를 진행했고, (이 역시 지금은 SBS 소속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있다.) 2008년부터 tvN 끝장토론, 2009년부터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등을 진행하다 2013년에 모두 종영하였다.
한편 저술 활동도 병행했는데, 주로 자기 경험을 소재로 한 자기계발서를 집필하였다. 'MBC 뉴스 백지연입니다', '앵커는 닻[7]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나를 경영한다', '자기설득파워', '나이스 포스', '뜨거운 침묵', '크리티컬 매스',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 등이 있다. 트위터에 많이 남겨 호응을 받았던 인생 관련 구절들도 한데 모아 사진과 함께 '나, 너'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문학 활동도 시도했는데, 소설 '물구나무'를 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커뮤니케이션 교육가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기업체가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나가는지에 대해 전문적으로 봐 주는 일을 한다고. 자기만의 기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CJ E&M에서 활동하였으며 그때 나온 것이 끝장토론과 피플인사이드다.
2015년에는 MBC 입사 동기인 안판석 감독의 제안으로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지영라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약올리는 재벌 사모님 역할이었는데, 어울린다는 평이 많았다. 또 MBC에서 파일럿 예능으로 '빅 프렌드'를 진행하였다.
가 174cm로, MBC에 있을 당시 여성 아나운서 중 최장신이었다고 한다.

3. 아들의 친자여부에 관한 유언비어 사건


1999년 백지연이 전 남편과 합의이혼한 시기, PC통신가를 시작으로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 불륜으로 인해 얻은 자식이라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유전자감식을 의뢰하였고 백지연의 아들은 친아들이 맞다고 인증되었다.
이런 어이없는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은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주통일신문>이라는 극우성향의 한인대상 언론을 운영하는 배부전(a.k.a. 사이먼 배)이었다고한다.[8]배부전이 해명하기를 자신은 "버스안의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유명인들을 취재한결과 백지연의 아들이 배다른 아들이 맞다는걸 확신했다"라고 한다. 즉 카더라통신을 기정사실인양 가짜뉴스처럼 만들었다는것. 당시 배부전은 PC통신 하이텔의 공개정치포럼인 큰마을에서 임욱과 더불어 극우성향 어그로로 악명높던 인물이었다.
MBC 보도
결국 백지연은 배부전을 고소하였고 법원은 배부전에게 명예훼손혐의로 1년형을 선고하였다. 중앙일보 참고로 지금도 배부전은 극우활동이라며 헛소리를 시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에서도 언급되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4. 여담


MBC의 뉴스 방송사고 중 하나였던 내귀에 도청장치 사건 당시 강성구 앵커 옆에 있던 앵커가 백지연이었다.

이렇게 외친 사람은 당시 25살의 소창영 씨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소 씨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내귀에 도청장치#s-4 문서 참조. 2010년 뉴스데스크 40주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강성구 앵커 멘트 다음으로 저였어요.. 그런데 정말 낯선 남자죠..낯선지 몰랐죠.. 속보가 계속 들어오니깐 넘지 않은 선을 넘은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다 했는데 너무 벌어진 일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죠"''' 라며 당시의 사건을 회상하기도 했다.

5. 둘러보기




[1]명지고등학교[2] # 온누리교회 집사이다. [3] 고정앵커로서는 최초이지만, 70년대~80년대 초 여성 아나운서들이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적이 있다.[4] 백지연 아나운서의 앵커로서 역할이 커지면서, 백지연 아나운서에게 각종 행사진행 섭외가 들어오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낀 회사 측에서 기자로 보직을 변경하길 원했다고 한다.[5] 이후 김주하배현진도 같은 코스를 밟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뉴스데스크를 오랫동안 진행했던 공통점이 있다.[6] 주로 SBS 전ᆞ현직 뉴스 앵커이 진행한다. 과거에 봉두완, 진중권의 경우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진행했었다.[7] 닻은 영어로 anchor로, 앵커의 철자와 같다.[8] 같은 극우인데도 모종의 갈등이 있었는지 한국 극우이데올로그의 대표자중 한명인 지만원 시스템클럽의 커뮤니티에서도 그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다 보기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