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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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姜成求
1940년 9월 12일 ~ (84세)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2. 약력
1940년 9월 12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남양읍)에서 태어났다. 남양중고등학교를 나와 고려대학교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에 MBC에 기자로 입사했다.[1]
1976년에 해설위원이 됐으며, 일본 특파원을 거쳐 1981년에는 보도 부국장, 1985년에 보도국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5월에 땡전뉴스의 이미지가 강했던 이득렬 대신 MBC 뉴스데스크의 메인 앵커가 되었다. 이때는 KBS가 정권의 나팔수의 이미지로 고전하던 시기라서, MBC가 반사이익을 보면서 뉴스데스크 시청률이 40%를 넘나들었다.[2] 물론 MBC도 군사정권 당시 보도지침에 따라서 충실하게 땡전뉴스를 했지만, KBS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색채가 옅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3] 9월 25일부터는 보도이사도 겸임하였다.
1988년 8월 4일 지금도 회자되는 방송사고인 내 귀에 도청장치 사건을 겪기도 했다.
1988년 11월 송도균을 거쳐 추성춘에게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 자리를 넘긴 뒤, 마산MBC 사장을 거쳐 1993년부터 1996년까지 MBC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 시절에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이 KBS 뉴스 9에게 뒤쳐진데다가 사장 자리도 마산MBC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부친과 친해서 얻어냈다는 비야냥을 받았다. 그래도 광고시장 자체는 한창 호황을 누렸을 때였고 케이블 방송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경영은 무난하게 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후광으로 앉은 자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996년 그의 연임 시도에[4] 분노한 MBC 사원들의 파업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5]
1997년부터 1년간 한국방송회관 이사장을 지낸 뒤 2000년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오산시·화성군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2002년 지방선거 참패 이후 후보 단일화 협의회(약칭 후단협)를 조직했으나, 정작 본인은 중간에 한나라당으로 이적해버렸다(...). 이 때문에 철새#s-2 정치꾼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 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화성시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탈당과 이적,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찬성 때문에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 대상자로 지목했다. 결국 열린우리당 안병엽 후보에게 7.3%pt 차이로 패하여 낙선한 후 그대로 정계은퇴했다.
2013년 11월에는 화성시 남양읍(당시 남양동)에 위치한 모 식당에서 주차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식당주인을 폭행했으며, 동시에 음주운전까지 한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2017년 바른정당이 창당되면서 전임고문을 맡았으나 이후 바른정당을 탈당하였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4. 둘러보기
[1] 참고로 1987년 4월 30일까지 뉴스데스크를 진행했던 이득렬 앵커도 강성구 앵커와 동일하게 1966년에 MBC에 입사했다.[2] 지금 5% 전후에서 뉴스데스크 시청률이 놀고 있는걸 생각하면 그때가 MBC 뉴스의 전성기였다. 물론 당시는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이 없던 시절인데다가 당시의 시청률 조사방식도 분단위로 집계하는 방식이 아닌 전화 면접조사 방식이기때문에 지금과 일률적인 시청률 비교는 힘들다. 하지만 당시 뉴스데스크가 KBS 뉴스 9를 압도적으로 찍어누른 1등이었다는건 명백한 사실이다. KBS 뉴스9의 시청률이 크게 우세를 보이고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는 2010년대에도 일일연속극-9시 뉴스 연계 효과가 KBS 뉴스9의 시청률을 크게 끌어올린다라는 말이 많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고(KBS 1TV에서 상업 광고를 편성했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이 시절에도 일일연속극과 9시 뉴스 사이에 따로 광고를 편성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건 문민정부 들어서 당신이 그리워질 때가 대히트를 치고 KBS가 이미지 쇄신에 나섰던것이 맞물렸을 때부터였다.[3] 일례로 김영삼은 군사정권 시절부터 뉴스는 MBC만 본다는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4] 1997년 김현철 스캔들이 터지자 강 사장의 연임 과정에 김현철의 개입 사실이 밝혀졌다.[5] 후임 사장으로는 이득렬이 취임했다. 이득렬은 80년대 어용방송은 강성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할 것이 없었지만, MBC 사장으로서는 보도 논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국민의 정부와 새천년민주당에서도 영달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