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텔

 

Hi-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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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케텔 시절
3. 하이텔 시절
4. 폐쇄 이후
5. 관련 문서


1. 개요


KTH가 운영했던 PC통신 서비스. 당시 4대 PC통신에는 하이텔을 비롯하여 나우누리, 유니텔, 천리안이 있었다.

2. 케텔 시절


한국 PC 통신의 근원지이다. 기존 전자게시판 기반의 서비스를 발전시켜 1986년에 시작된 케텔이 하이텔의 전신이었기 때문.
하이텔의 전신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전자는 '''한국경제신문'''에서 개발한 Ketel로, '개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추억의 통신망이다. 초창기에는 뉴스를 중심으로 데이콤의 생활정보서비스(천리안의 전신)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일종의 IP였지만, 자체 접속망을 갖추고 게시판과 채팅, 동호회 등을 갖춘 PC통신 서비스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료''' 통신망으로 인기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저녁시간대엔 늘 이용자가 폭주했다. 당시 8비트 컴퓨터로도 접속할 수 있었고 전화요금도 통화시간이 아니라 통화당 지불이므로 부담없었지만, 모뎀값이 대단히 비쌌다. 당시의 모니터 싼 모델값과 비교될 정도. 후자는 한국통신이 1991년 9월부터 시험서비스를 개시한 비디오텍스 서비스 '하이텔'이었다.
그러나 한경이 운영한 케텔은 수익성이 전혀 없었고 1990년 들어 신문사의 재정도 악화되자 한국경제신문에서 케텔을 매각하려고 했다.[1] 이에 한국통신을 위시한 여러 회사가 합작하여 1991년 12월 '''한국PC통신(주)'''를 세우고 케텔을 인수했다. 이후 1992년 3월 서비스명을 케텔(KETEL)에서 코텔(KORTEL) 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한통 하이텔과 합병해 '하이텔' 명칭까지 이어받아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때 코텔이 제한적으로 무료 운용되고 하이텔이 유료 서비스로 둔갑하면서 사람들이 코텔로 이전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신규 서버엔 아무도 가지 않았고 결국 '서비스 업체도 땅파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동의하여 대부분이 하이텔로의 이전을 수용하게 되었다.

3. 하이텔 시절


1992년 7월 가입비 10,000원 + 이용료 월 9,900원으로 유료화를 단행한다. 단, 가입비는 1990년대 후반까지 면제되었고, 이용 요금은 1990년대 후반에 11,000원으로 오른다. 덕분에 한국PC통신 본사 앞에서 유료화 반대 촛불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가 '''한국 최초의 네티즌 주도 촛불시위'''라고 한다. 당시 하이텔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 이 시위에서 훗날 '하동연'으로 자리 잡는 '동호회 연합회'가 결성되었고, 당시 KETEL 전체 동호회의 대다수가 동호회 초기화면을 통일해서 바꾸는 등, 상당한 파급이 있었다. 시위의 원인은 단순 유료화 반대가 아닌 "신용카드 ONLY"라는 대금 결제 조건[2] 때문이었고, 이러한 촛불시위와 결합된 온라인 시위의 결과로 결국 회사는 유료화 요금 결제 조건을 신용카드 ONLY에서 "지로 선납제"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촛불시위를 당시 KORTEL 소식지인 '꿈따라'에서 '촛불잔치(!)'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1994년부터 한국통신(현 KT)에서 PC통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01410 접속만 가능한(즉, 채팅이나 정보 검색만 가능하고 파일 다운로드 따위는 안 됨) 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기도 했다. 2,400bps(0.3KB/s)짜리 모뎀, 브라운관, 키보드를 포함하고 있었다. 전화 접속뿐 아니라 시리얼 통신도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얼마 없었던 리눅스 유저들은 자기 컴퓨터에 2번째 접속하는 터미널로 쓰기도 했다.[3] 한국통신에서는 사람들에게 대여해 준 후 회수를 제대로 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이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90년대말에는 전화국 재고단말기를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는데, 애초에 많이 만들지도 않은 것이고 연한이 지난 재고를 가지고 있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56kbps 모뎀에 컬러ANSI가 난무하는 90년대 후반에 2400bps에 그린모니터니... 어쨌든 매년 수백억의 매출액과 수십억의 흑자액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01410(14.4kbps 모뎀용), 01411(28kbps 모뎀용), 01412 or 01432(56kbps 모뎀용)를 통해 접속할 수 '''있었다'''.[4]
별칭으로는 안녕텔 및 안녕전화[5], 로우텔, 빡텔(이쪽은 멸칭에 가까움) 등이 있었다.
유명한 동호회 중 하나로는 개오동[6]이 있었다. 적절한 그분도 이 곳 출신이며 김동준 해설도 이곳 운영진 출신이다. 유명한 개발자 몇몇을 배출한 게임제작동호회도 원래 개오동의 게시판에 있다가 독립해 나간 케이스이다. 이러한 인원풀이 있었기 때문인지, 당시 PC통신상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다루는 게임 동호회중에서는 심도있는 글이 많이 올라오던 게임 동호회이기도 하였다. 멀티플레이 전략은 물론,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모드의 대사번역이 가장 빨리 올라오고 있었고(한스타가 나오기 이전부터), 캠페인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었다. 나우누리에서 비슷한 포지션의 게임동호회로는 나모모가 있다. 사실 개오동의 리즈 시절은 스타크래프트 이전이었다. PC방 열풍이 불기 전 특히 도스 환경에서의 게임은 소수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게임 실행, 공략, 또는 요즘의 업적에 해당하는 ** 안 하고 깨기와 같은 모든 범주가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여담이지만 개오동에선 국회의원을 두 명[7]이나 배출하여 나름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학생운동단체가 애용하기도 했다. 바른통신동호회(go barun). 전대협 시절과 한총련시절 여기서 자료집을 받아 인쇄해 각 학교에 배포하기도 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통로로 사용했다. 학습이라는 명목으로 각종 불법자료도.
김영삼 정부시절 청와대 신문고도 하이텔에 개설되었다(go bluehouse). 이것은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에 모두 있었던 듯.
또 유명한 동호회 중 하나로 애드립 동호회가 있다. 1990년대 PC에서는 소리를 내기 위해 애드립, 사운드블라스터, 옥소리 등의 기판이 추가로 필요했고, 애드립 동호회는 도스 환경에서 이들을 구동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보와 창작물(주로 작곡한 곡)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미디(MIDI) 음원으로 작곡을 하는 미디 동호회도 활동하였다. 1990년대 말 사운드카드 및 미디가 소프트웨어 에뮬레이션으로 구동되고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시대의 변화를 맞아 쇠퇴하게 되었다.
한국 1~2세대 오타쿠의 산실인 애니메이트 등이 있었고, 알지롱이라는 PC통신풍 커뮤니티도 하이텔이 전신인셈. (후술한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계의 고대작들 중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판타지소설계에서도 드래곤 라자퇴마록, 데프콘이 연재된 곳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작가 라인업에서는 후에 작가들이 커뮤니티를 결성할 정도[8]로 화려한 나우누리 SF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퇴마록과 이영도의 브랜드 파워는 나우누리의 쟁쟁한 작가진들과 맞먹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대우자동차가 전성기였던 1994년에 대우자동차가 '오토컴'이라는 '''기업 최초의 자동차 게시판'''을 개설해[9] 현재 보배드림급의 파워를 자랑했었으나... 대우자동차 홈페이지가 96년도에 설립된 이후로는 힘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민간인 측에서 서버 이전을 받고 2002년 1월까지 운영하다 폐쇄되었다. 이후 오토컴 내의 동호회들 중 하나였던 대우 르망, 대우 씨에로 오너들의 '내친구 르망(LCN)'은 자체적으로 게시판 데이터를 대우차로부터 백업받아, LCN이라는 자체 동호회를 세운 뒤 이시절의 자료들을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1991년에 세워진 진보계열 동아리인 '바른 통신을 위한 모임(이하 바통모. 천리안의 희망터와 나우누리의 찬우물 포지션.)'도 있는데, 1988년 10월에 한겨레가 창간되자 진보성향 유저들은 한국경제신문에 한겨레 기사도 올려달라고 했으나 한경 측이 이를 거절하자 일부 유저들은 직접 한겨레 기사를 타이핑해서 케텔 게시판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런 유저들이 모여 처음엔 ‘한국민주통신동호회(이하 한민동)’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200명의 발기인을 모아 동호회로 만든다는 목표로 준비작업에 들어가 1991년에 위와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10]
다만 흑역사급 동아리도 있는데, 하이텔 내에 존재했던 '주부동호회(주부동)'는 서울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및 기타 학부모 단체들과 연계하여 세일러문, 소년기사 라무의 국내방영을 필사적으로 반대한 바 있다.
하이텔 출신의 유명 네임드로는 '''김유식''', 안철수[11], 이영도, 김경진, 델리스파이스, 듀나, 이우혁, 송락현, PCTools 김현국, 그리고 앞서 말한 적절한 그분 등이 있다. 그 외 plaza란에서 IMF가 닥치기전 '''독자적으로 IMF를 예견했다가 코렁탕을 먹을 뻔한''' 용자 (seokjeff : 석진욱)도 당시 plaza란 유저들 사이에서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흑역사급 인물로는 김완섭이 있다.
여성운동 진영에서 종종 보이는 "부모 성 함께 쓰기"도 하이텔에서 출발하였으며 (조은광순, 신정모라 등), '벙개' 등의 통신용어, '수구꼴통' 등의 표현 등이 처음 시작된 곳도 하이텔이다.
네이버가 시초라고 알려진 "지식검색 서비스"의 시초가 바로 하이텔의 "하이텔 서당" 서비스. 하이텔 서당의 GO 인덱스(메뉴 직접 이동 명령인 GO 명령으로 찾아가는 일종의 부호)중 하나가 '''TE31''' 이었는데[12], 그래서 아직도 하이텔 서당은 "알지롱 (TE31.COM)"으로 명맥을 유지 중이다. 다만 하이텔서당 시절부터 있었던 구성원은 지금은 극소수이며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서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참고 링크.
하이텔 내에는 동호회(SIG)외에도 여러 기업체나 노동조합 등 재야 사회단체들의 CUG[13](닫힌 모임)가 존재하였는데, 모기업인 한국통신 노동조합 CUG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CUG는 1994년에 개설되어 1995년 한국통신 파업 당시 투쟁지침을 하달하고 파업 관련 속보를 보내서 대국민홍보에 나서는 등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서다 그해 5월 22일~6월 4일 사이에 이용약관에 따라 게시글 28건이 삭제되었고, 6월 6일에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와 동법 시행령 16조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이용자들의 항의로 열흘 만에 철회되었다.
6월 6일 폐쇄 이후 노조 측은 하이텔 PLAZA에서도 게시글을 작성하다 노조 관련 게시글 181건(노조 측 게시글 7건, 나머지는 일반사용자 게시글들)이 무더기로 삭제되기도 했다. 1, 2, 3 이후 노조 측은 CUG 폐쇄 건에 대해 한국통신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으나 1996년 1심, 1997년 2심, 1998년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세 번 다 패소당했다.
불법자료 단속은 나머지 3~4대 통신 중에서 가장 철저히 했는지, 일단 동호회 통합자료실 개념이 없어 나우누리, 유니텔과는 달리 (듣보잡 소모임에) 우회적으로 올려서 (동호회 통합자료실로) 우회적으로 받는 수법이 먹히지 않았고, PCCOM[14] 이하 관리자들의 모니터링이 철저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여튼 불법자료에 관해서는 대형 PC통신망 중 비교적 클린한 축에 속했다. 다만 PC통신의 말기이자 대세가 인터넷으로 완전히 넘어간 2000년대 초반에는 "주시경 선생의 우리글 97"(...)이라는 이름으로 한글 97이 통채로 올라오고, 드래곤볼 코믹스 스캔본이 "두라곤발"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버젓이 올라와 있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4. 폐쇄 이후


21세기에 들어 프리챌싸이월드의 득세와 함께 사용자가 급감한 하이텔은 2004년경 메가패스, 한미르와 합쳐져 파란닷컴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파란닷컴이 하고자 했던 서비스는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것으로 결국 물량전에서 밀려나 2012년 6월 폐쇄되어 완전히 흔적이 사라졌다. 방대한 PC통신 컨텐츠를 웹 인터페이스로 끌어나오는 과정에서 불만과 갈등이 있었고, 애니메이트를 포함 독립해나가는 동호회도 생겼다. 그리고 TCP/IP 통신 환경에서 하이텔은 그저일개 웹사이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국 네이버의 검색엔진을 따라가지 못해 기타 포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케이티하이텔 법인은 존속되어 기존 하이텔 사용자들이 느끼기는 힘들지만 olleh tv 컨텐츠 유통이나, T-커머스 같은 인터넷 결제 서비스 등을 서비스 하고 있다.# 코스닥에도 아직 상장 중. (036030)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법인은 KTH문서 참조.

여담으로 KT에서는 하이텔 서비스가 종료된 후에도 10년 넘게 01410~01412 번호를 이용해 POWWOW 라는 이름으로 전화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용요금은 월4000원/분당3원. 전화요금은 180초(평일)/258초(야간, 공휴일)당 35원.
PC 통신 모뎀 연결음은 연결음은 여기서 들어 볼 수 있다.
터미널 화면은 하이퍼터미널 같은 터미널 에뮬레이터로 구경해 볼 수 있다. 01410은 여기로 참고하자.
케텔에서 하이텔을 거쳐 paran.com까지 갔던 이메일 계정은 이제 daum.net 이메일 계정에 통합되어 사용 가능하다.
여담으로 인포샵을 HiNET-P로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HiNET-P는 텔넷접속 서비스이고 인포샵은 POWWOW[15]라는 이름이었다.
2017년 8월 31일에 PC통신 서비스인 ‘014XY 서비스’가 완전히 종료된다고 한다. 관련 게시물[16]
현재 01412에 연결은 되나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 인포샵은 연결이 되지 않고, 다른 게시판들은 모두 내용이 없다.

5. 관련 문서



[1] 한국경제신문은 이후 "한경 에코넷(ECONET)"이란 PC통신망을 새로 만들었다. 역시 전화접속이며, 이것은 일반인이 가입 활동할 수 있는 한국경제신문 뉴스사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사들이 기사 송고를 위해 자체 BSS를 운영했는데 여기에 부가서비스로 각종 동호회가 개설되었다.[2] 학생들의 경우 카드 발급을 받을 수 없으므로 자동으로 유료 이용자 층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는 점.[3] 그리고 '''현 세대 리눅스 컴퓨터에서도 터미널로 사용 가능하다!''' 심지어 한글 입출력까지 완벽하게 지원한다.[4] 1990년대 초까지 모뎀이 내장된 하이텔 단말기를 전화국에서 무상 대여했는데, 뒤에는 전화국에서 이 대여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때 전화국을 방문하면 남은 재고를 무료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5] 이 용어를 즐겨 쓴 사람이 이영도이다. serial란에 올린 드래곤 라자 연재분 말미의 잡담에 이 용어가 많이 언급되었다.[6] 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 케텔 시절 하도 장애가 많아서 케텔을 '개털'이라고 불렀던 것이 그 시초다. 개오동 공지란에 있던 개오동의 역사를 적은 게시물에 이 유래가 언급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오락동호회로 잘못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개오동나무가 유래인것은 더더욱 아니다.[7] 이찬진, 안철수.[8] 다만 그 결성의 계기는 좀 씁쓸하다.[9] 1993년에 현대자동차도 PC통신 서비스를 천리안에서 제공했으나, 현대차는 자사 모델만을 중심으로 서비스했다. 대우 오토컴은 타 제조사 관련 내용도 자유롭게 적을 수 있었다.[10] 전대협 말기와 한총련 초기에 자료를 교환하는 게시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상한 것들을 올리고 다닌 건 아니다. 노태우 말기에는 맑스주의 철학쪽은 일반 출판물로도 해금돼 있었다.[11] ahn.cs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특수문자 아이디 사용은 초창기에만 허용되었으므로 매우 이른 시기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12] 다만 처음에는 "TE31"이 아니라 "TE11"이였다. 원래는 컴퓨터 하드웨어 관련 질문답변을 올리는 TE01,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질문답변을 올리는 TE02.... 이런 식으로 해서 기타 질문답변을 올리는 TE10 까지 있었으나 몇몇 이용자들이 부적절한 질문을 올려대서 게시판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생겨난 것이 유치하거나 사소한 질문답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게시판인 "호기심해결 Q/A (TE11)"이였다. 이후 하이텔의 인덱스 개편작업을 통해 "TE11"은 "TE31"로 바뀌었고 이는 하이텔의 서비스 종료까지 쭈욱 이어졌다.[13] Closed Users Group. '폐쇄이용자그룹'의 준말.[14] 보통 PCCOM(n)이며 pccom1, pccom2, pccom3 등이 있었다. 나우누리로 치면 나우지기에 상응하는 존재.[15] 01410, 01411, 01412.[16] 어느 사설 BBS에서 이 소식이 들려올 때 누군가는 정액제(야간/종일/도수정액형)까지 가입해서 이용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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