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프 바크하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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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엘리사 헨드릭 "베프" 바크하위스
(Elisa Hendrik "Beb" Bakhuys)
생년월일
1909년 4월 16일
사망년월일
1982년 7월 7일
국적
[image] 네덜란드
출신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프칼롱안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81cm / 75kg
등번호
-[1]
소속팀
HBS 크라에옌하우트 (1925-1926)
즈볼셔 AC (1926-1930)
THOR (1930-1933)
즈볼셔 AC (1933-1935)
HBS 크라에옌하우트 (1935-1937)
VVV 번로 (1937)
FC 메스 (1937-1939)
FC 메스 (1945-1946)
국가대표
23경기 / 28골 (1928-1937)
감독
FC 메스 (1945-1946)
1. 생애[2]
1.1. 어린 시절
1.2. 선수 생활
1.2.1. 클럽
1.2.1.1. HBS, 즈볼셔
1.2.1.3. 네덜란드 복귀
1.2.1.4. 프랑스
1.2.1.5.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그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1. 생애[3]



1.1. 어린 시절


바크하위스는 1909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프칼롱안에서 태어났다. 바크하위스는 4남 2녀 중 다섯째였으며, 그의 아버지 헤르마뉘스는 설탕 공장의 감독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4살에 네덜란드에 건너갔는데 6살에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보냈다.
8살 무렵부터 그의 형이 소속되어 있던 클럽인 하흐세퀴크(HaagseQuick)에 가입하며 축구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하흐세퀴크에서 오래 있지 않고 1919년 그의 몇몇 친구들의 주장에 따라 HBS크라에옌하우트로 소속팀을 옮겼다. 이것은 그의 형에겐 큰 슬픔이 되었지만 바크하위스는 HBS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1920년 여름에 헬덜란드(Gelderland)의 하텀(Hattem)으로 팀을 또 옮겼다. 2년 후 13살의 바크하위스는 즈볼러의 즈볼셔 AC로, 1924년에는 헤이그의 HBS 크라에옌하우트로 계속 팀을 바꿨다.

1.2. 선수 생활



1.2.1. 클럽



1.2.1.1. HBS, 즈볼셔

팀을 계속 바꾸던 와중에도 바크하위스의 기량은 발전해나갔고 1925년 9월 27일, 그는 16세의 나이로 HBS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부터 바크하위스는 2골을 넣어 HBS가 하를럼을 꺾는데에 힘을 보탰지만 그는 다른 어린 선수들과 달리 축구로 명성을 얻는 것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 유소년 선수들과 같이 바크하위스에게도 시련이 있었는데 데뷔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년 후, 바크하위스는 즈볼셔 AC로 이적했다. 그는 HBS에서 더 나은 훈련을 받았지만 덴 하흐에서의 축구에 관한 명성이 교육학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여기진 않았다. 즈볼셔에 있으면서 그는 종종 드렌터에서 공부하면서 축구 시합을 뛰기도 했다. 즈볼셔에서 바크하위스는 지역 리그 득점왕에도 오르는 활약을 펼쳤고 1930년까지 이 곳에 있었다.

1.2.1.2. 네덜란드령 동인도

바크하위스는 1930년 초엽, 즈볼러를 떠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라바야에 갔다. 영토가 너무 넓은 관계로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는 전국을 아우르는 리그가 없었고 도시 내의 팀들과 경기를 치르는 식이었다.
바크하위스가 뛰던 THOR은 1931-32 시즌에 수라바야의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33년 7월, 파산 선고를 받은 후 10월에 다시 네덜란드로 복귀했다.

1.2.1.3. 네덜란드 복귀

4년 만에 네덜란드에 돌아온 바크하위스의 새 소속팀은 즈볼셔였다. 당시 즈볼셔는 2부 리그에 떨어지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바크하위스는 시즌 중에 복귀했음에도 12경기에 출전해서 36골을 넣었고, 승강/강등 결정전 4경기에서도 9골을 넣었다. 바크하위스의 이 대활약으로 즈볼셔는 1부 리그에 복귀했다.
하지만 1934년 8월, 그는 즈볼셔에 HBS로의 단기 이적을 요청했는데 이적에 대한 소문 자체는 1월부터 돌고 있었다. 이 이적 요청은 네덜란드 축구계에서 핫이슈였지만 KNVB에서 이적을 막았다. 결국 바크하위스는 1년 더 즈볼셔에 머물렀고 시즌의 절반 정도만 뛰면서 10골을 넣었다. KNVB는 10월의 회의에서 아예 바크하위스를 퇴출시켜 버릴지도 검토했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바크하위스는 1936년, HBS 소속으로 AFC 아약스와 1935-36 시즌 폐막전을 치렀다. HBS는 2만 명의 홈팬들 앞에서 아약스에 2대5로 패했지만 이 때 바크하위스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한 잡지에선 그의 강력한 슈팅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당시 유명한 의사였던 덴 후트박사의 자문을 받으며 그의 다리, 발목 등을 X선 촬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즌을 끝으로 바크하위스의 기량은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1937년 4월에 그는 VVV 번로로 이적했고 몇 번의 친선경기에만 참가했다. 번로에서 뛸 무렵, 바크하위스는 담배 가게를 차렸고 이 가게는 번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번로에서의 생활도 오래가진 못했다. 이번엔 프랑스로의 이적 소문이 떴고 KNVB에 의해 네덜란드에선 1년의 출장 금지에 처해질 위기에 빠졌다. 바크하위스가 경제적으로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당시 번로의 회장 판달런(van Daalen)은 KNVB로부터 받은 메달과 그의 결혼 예물 중 일부를 팔기도 했고 팬들은 2200길더를 모금하기도 했지만 그걸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결국 1937년 5월에 시작한 바크하위스의 담배 가게는 임대료 문제로 10월에 문을 닫았다.
바크하위스는 네덜란드에서의 선수 계약이 해지된 이후 잠시 코치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바크하위스는 네덜란드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1.2.1.4. 프랑스

결국 바크하위스는 1937년 7월 30일, 프랑스의 스타드 드 랭스와 계약을 체결했고 1주일 간 파리랭스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엑스포를 구경했다. 바크하위스는 잠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며 어떤 사인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곧 드러났고 계약을 후회했으며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시도했다. 결국 8월 20일까지 랭스 구단측은 바크하위스에게 랭스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고 25일부터 정식으로 랭스의 선수가 되었다. 이 무렵, 랭스는 바크하위스를 RC 파리로 다시 팔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뤄지진 않았다.
이 무렵 바크하위스는 마음이 다시 바뀌어 네덜란드에 남아 있기를 원했지만 메스가 이 상황에 참전해 바크하위스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결국 그의 마음은 메스로 기울어졌다. 사실 바크하위스와 랭스의 계약은 합법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10월 2일, 바크하위스와 메스가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랭스는 그들의 불만을 철회하고 메스로 그를 보내기로 결정, 친선 경기를 치르는 조건으로 10월 25일 바크하위스는 메스의 선수가 되었다. 결국 이 복잡한 사연이 이중계악이 되어 그 해엔 공식 경기를 뛸 수 없게 되었고 친선 경기도 금지당했다.
결국 1938년에서야 바크하위스는 프랑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고 데뷔전에서 메스는 1대3으로 패했다. 메스는 바크하위스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레프트 인사이드 포워드 카를 헤스와 호흡을 맞추길 기대했지만 그의 기량은 옛날에 비해 떨어져 있었고 그 기대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바크하위스는 1월 16일, 스트라스부르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포함하여 1골 2어시를 기록했다.
바크하위스의 계약은 1938년 5월까지였지만 이 무렵 또 팀과의 불화로 인해 전 소속팀 번로의 코치로 간다는 루머가 있었다. 하지만 바크하위스는 1939년까지 팀에 남았다.

1.2.1.5.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그 이후

1939년 메스는 바크하위스와의 계약을 끝냈고 바크하위스는 1941년에는 네덜란드의 틸리아에서, 1942년부터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투라 99에서 뛰었다. 투라 99는 가우리가 작센 소속이었고 4월 19일 켐니츠와의 경기에서 투라 소속으로 데뷔전을 치렀다. 바크하위스는 투라에서 총 4경기를 뛰었고 1943년부터는 다시 FC 메스 소속이 되었다. 1945년부터 바크하위스는 메스의 감독이 되어 선수 겸 감독이 되었고 1946년에 그의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마쳤다.
바크하위스는 그 이후 축구계를 떠나 광고 대행업자로 일했다. 1951년, 아내와 이혼 후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냈고 운전기사일을 하기도 했고 텔레비전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잠시 몸담기도 했다.
바크하위스는 1982년에 사망했다.

1.2.2. 국가대표팀


바크하위스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28년 이탈리아와의 시합으로 알려져 있으며 1934년 네덜란드에 돌아온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의 레귤러 멤버가 되었다. 그는 1937년까지 23경기에 출전, 28골을 기록했으며 1935년 벨기에와의 시합에서 첫 A매치 해트 트릭을 기록했으며, 1936년 프랑스와 벨기에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한 차례씩 더 기록했다.
1934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네덜란드는 스위스에 2대3으로 패하기도 했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국내외 클럽 팀들과 다수의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바크하위스는 이 친선 경기들에서 총 25경기 출전, 26골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바크하위스는 1930년대 네덜란드 축구계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한 명이었다.

3. 뒷이야기


  • 가족들은 그의 이름을 Bep라 썼지만 네덜란드의 기록 보관자 마티 페르카만(Matty Verkamman)에 의해 그의 이름 표기가 Beb로 굳어졌다. 그가 막내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가 되었다는데 정작 그에겐 동생이 한 명 있었다.
  • 그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기록한 28골은 아버 렌스트라에 의해 깨지기 전 20여년동안 네덜란드 대표팀 내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바크하위스는 렌스트라가 자신의 대표팀 골기록을 경신하던 경기를 직관하다 즉시 그에게 축하를 건넸다고 한다.
  • 바크하위스는 오랫동안 네덜란드 축구계 최초의 프로 선수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7년, 게리트 케이저르가 아스날 FC 소속으로 프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 밝혀져 그 타이틀을 뺏겼다.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