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맨(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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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우 니카우
3. 후속작
4. 기타


1. 개요


1980년에 보츠와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합작으로 제이미 유이스(1921~1996)[1] 감독이 만든 코미디 영화.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은 미친 것이 틀림없다). 실제 부시맨족인 니카우(1943? 44?~2003)가 주연을 맡았다. 미국 배급은 20세기 폭스.
칼라하리 사막에서 살아가던 부시맨족 마을에 어느날 비행기 조종사가 지나가다가 버린 빈 콜라병이 떨어지게 된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에 부시맨들은 그걸 신의 물건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서 평화롭던 마을에서 분쟁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에 주인공 부시맨족 자이는 마을의 평화를 깨트리는 콜라병을 세상의 끝[2]에 가져가 신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인 동물학자와 여기자를 만나면서 문명인들을 접하게 되고 또한 아프리카 정부군과 반군과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소동이 주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코미디 영화인만큼 주연 배우들의 슬랩스틱 개그도 돋보이지만 순수한 부시맨족 자이의 눈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 문명인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담겨있는 작품으로 이러한 것들을 해학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지금 보아도 웃긴 장면들이 다수 있을 정도다.[3]
500만 달러로 만들어져 전세계적으로 대박을 거둬들였는데 미국에서만 5120만 달러, 해외 6천만 달러를 벌어 들이며 1억 1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거둬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11월에 늦게 극장에 개봉했지만 그래도 서울관객 29만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지상파 더빙 방영 및 비디오로 나와서 큰 인기를 끌었고 부시맨족을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이 영화의 한국 프로모션 카피를 전유성이 썼다고 본인이 토크쇼 나와 이야기 한 바 있다. 1989년 1월 1일 새해특선 영화로 MBC에서 밤 9시 50분 더빙 방영했다.
현대 코이산족들은 이 영화를 싫어한다. 자기 부족을 희화화 하고 이미지를 고착화 해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시맨이라는 멸칭이 자리 잡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4]

2. 배우 니카우


본명은 은딱카우 끄토마(Nǃxau ǂToma)이며[5] 나미비아 코이산족 사람이다. 부시맨 출연 당시 그야말로 듣보잡 배우였기에 300달러(한화 37만5천원)를 받고 출연했으나 그 이후 후속작에서는 협상을 통해 80만 랜드(한화 6991만2천원)로 출연료를 대폭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들을 위해 수도와 전기가 설치된 벽돌집을 지었다.[6] 니카우 토마는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영화배우로 활약했는데 영화배우에서 은퇴한 이후 농부가 되어 옥수수, 호박, 콩 농사를 짓고 가축들을 길렀다. 2000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개종했다. 그 후 2003년에 60살(또는 59살)때 다제내성 결핵으로 사망했다. 죽은 후 두번째 부인의 무덤 옆에 묻혔고 슬하에 자녀가 6명이 있다.
종종 그가 돈을 몰라서 돈을 주자 이걸 땔감으로 쓰느냐 물었다거나 출연료를 생필품으로 줬다느니 하는 헛소리가 국내 신문 기사나 심지어 컬럼에서도 나오고 마치 문명을 모르던 이가 영화 땜에 돈맛을 알고 타락했다는 투로 기사로 나왔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이미 서구문명에 대해 다소 알고 있었고 코이산족은 이미 상당수가 현대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걸 영화상 부시맨 존재를 통해 기사거리를 조작한 거다. 다만, 그의 생활 자체는 전통적인 코이산족의 생활습관을 따랐는데, 화폐가 아닌 물물교환에 더 익숙했었고 은퇴 후 차린 농장도 동물을 스무마리 정도만 길렀다고 한다. 그 이상 사서 키울 돈은 있었겠지만 본인이 직접 관리하기 벅찼기 때문이었다.[7] 참고로 첫 출연료로 받은 300달러는 아쉽게도 그의 실수로 바람에 날아가 잃어버렸다. 돈도 많이 벌었고 유명세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작은 농장을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 직접 사냥도 하는 검소한 삶을 살았으나, 2003년 뿔닭 사냥을 나갔다가 결핵에 걸렸고, 치료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8]
후속작에서도 헐리우드와 홍콩 등지를 다녔고 91년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봉숭아 학당에도 특별 출연했다. 대사도 없이 부시맨 차림으로 와서 화살을 쏘고 가는 배역이었지만. 당시 내한 기자회견에서 통역이 상당히 복잡했는데, 그가 구사하는 말을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통역하고, 이걸 다시 영어로 통역한뒤 한국어로 통역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덧붙여서 니카우는 영화에서는 부시맨 전통옷을 입고 다니지만 실생활에서는 평범하게 셔츠와 신발을 입고 다녔다. 생전에 !쿵족(!Kung) 방언인 Jul'hoan어, 헤레로어, 츠와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아프리칸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의 조카 엔콰니가 WCG 그랜드 파이널 2011에 나미비아 대표로 참가하였다. 종목은 아스팔트 6.

3. 후속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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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동일감독에 의해서 2편이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자이의 아들들이 밀렵꾼들에게 납치되어서[9]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내용. 이 과정에서 백인 여성 박사와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 박사와 엮이고 아프리카 정부군과 쿠바 혁명군, 밀렵꾼들과 엮이면서 소동이 일어난다. 평은 전편보다 못해도 그래도 볼만하다는 평이었지만 미국흥행은 630만 달러에 그치며 기대 이하 흥행을 거둬들이며 시리즈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1991년 9월 23일에 한가위 특선으로 KBS1로 밤 10시 40분에 더빙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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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홍콩에서 만들어진 1991년도작 '강시와 부시맨', 1993년도작 '홍콩에 간 부시맨'[10], 1994년도작 '팬더곰과 부시맨'이 각각 3, 4, 5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원작과는 스토리상 연관점이 없다. 주인공 부시맨 역을 맡은 배우가 5 작품 모두 니카우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11]
우리나라에서도 부시맨 열풍을 틈타서 영구 시리즈와 무단으로 합쳐서 만든 아동영화 '''영구와 부시맨'''이 비디오로 나왔었다. 물론 당시 아동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 답게 원 감독 및 니카우에게 저작권 따위는 받지 않고 부시맨도 한국배우들이 대충 까망칠하고 나온 수준이다. 황당하게도 이 작품에서 부시맨은 악당 박사가 만들어낸 인조인간(...)으로 한명도 아니고 여러 종류로 나온다.

4. 기타


일본에서는 부시맨이 비하적인 뜻으로 쓰인 단어이기에 학계에서 쓰이는 명칭인 '''코이산맨'''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중간에 반군들이 정부 청사를 공격하다가 정부군의 반격을 받고 바나나 밭으로 도망가는 내용이 있는데, 이 때의 전투신이 현대 기준으로도 대단한 병맛(?)을 자랑한다. 어딘가 많이 모자란 반군들의 바보짓이 볼거리. 정부 청사를 공격하는데 놀란 여비서가 내던진 재떨이에 맞고 반군이 헤롱거린다든지, 총과 포를 쏘는데 사람은 안 죽고 바나나 밭에 가득한 바나나만 신나게 터져버린다든지… 옆에서 튀어나오는 탄피들에 맞아서 짜증을 내는 병사 움짤로 유명하다.


[1] 부시맨 영화에 가려져서 다른 작품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 홀로 사막에(Lost in the Desert/ Dirkie, 1969) 감독과 주연을 맡고 어린 아들인 와이난드 유이스가 주연을 맡은 바 있다. 몸이 약한 어린 아들과 강아지가 사고로 사막에 불시착하여 살아남는 줄거리로 과거 국내에서도 더빙되어 방영한 추억의 영화이다.[2] God’s Window라는 이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산이다.[3] 탄피 세례 짤빵도 이 영화에서 나왔다.[4] 일본인이 '조센징'이나 '춍'이라는 제목의 개그 영화를 찍어 전 세계에 퍼트렸다고 생각해 보자. 실제 한국의 이미지를 왜곡시킨 매체로 M.A.S.H.가 있다.[5] 치경 흡착음 !가 i로 와전된 모양이다. ǂ는 경구개 흡착음으로, ㄲ을 삼키듯 발음하면 대충 들어맞는다. 본인 이름의 실제 발음을 어느정도 반영하면서도 한층 표기와 발음이 쉽게 Gcao Coma라는 이름도 사용했었다.[6] 그가 이렇게 정착하던 시기에 다른 코이산족들도 정착 생활로 많이 전환했다. 당시에 너무 가물어서 사막이나 초원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7] 대형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경영 지식과 장비 등이 필요하다.[8] 결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다제내성 결핵은 현존하는 결핵 치료제가 듣지 않아 선진국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며, 치사율은 무려 60%에 달한다. 거기다 니카우 본인이 벌써 60대를 바라보는 고령이기도 했으니...[9] 정확히는 밀렵꾼들의 트럭에 멋 모르고 타버렸다.[10] 1996년 6월 7일 SBS 영화특급으로 더빙 방영했다.[11] 단 시리즈 5편인 팬더곰과 부시맨은 1, 2편의 감독인 제이미 유이스가 공동 연출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