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쿠스
1. 소개
브리타니쿠스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황후 발레리아 메살라(메살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제위계승권자이다. 서기 48년 어머니가 중혼, 간통, 반역 혐의로 몰락한 이후, 네로의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다음 황후가 되고 네로가 아버지의 둘째사위, 양자가 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카이사르 가문 후계자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네로가 양자가 된 이유는 아버지 사후 유언장을 통해 알려져 있듯 어린 나이의 브리타니쿠스의 안전, 보호자 선정 등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4년 10월 13일 63세의 나이에 급사한 이후, 계모이자 사촌누나 소 아그리피나가 세네카,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친위쿠데타로 네로만을 유일한 황제로 옹립할 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공동계승권자 신분임에도 배제됐다. 이후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사이의 권력다툼이 표면화되면서 본래부터 네로의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인 브리타니쿠스가 부각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소 아그리피나가 중심이 된 황실 세력과 많은 로마인들이 네로의 법적 정당성과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적통이 왜 밀려났는지 의문을 드러내면서, 14 세 생일 직전 네로에게 살해당했다. 사인은 독살이며 독살된 시체는 황궁 밖으로 은밀히 운반돼 비오는 날 화장 후 급히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됐다. 따라서 당대, 후대 로마인들에게 어린 나이에 한결같이 억울하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됐고, 그의 어린시절 친구 티투스는 즉위 후 이런 친구의 명복을 축원하고 동상을 세워 그를 신원복구했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혈통적 후계자인 브리타니쿠스는 네로와 달리, 카이사르 가문의 유일한 혈통적, 법적 후계자였는데, 그가 네로에게 독살되면서 가문은 혈통적으로 멸문됐으며 네로마저 68년 실각하고 자살하면서 완전히 역사상 사라지게 됐다.
2. 생애
2.1. 출생과 가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는 로마에서 서기41년 2월 12일 태어났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다섯자녀 중 막내아이였으며, 황후 발레리아 메살라가 낳은 두 자녀 중 첫 남자아이였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였지만, 이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로 개명했다.
첫 성씨인 게르마니쿠스는 친할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정복전쟁 개선칭호로 원로원에게 부여받아 백부 게르마니쿠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사촌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가 대를 이어 전달받은 존칭성씨이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적통 가문을 사실상 상징하는 칭호 중 하나였다. 반면 통칭으로 알려진 브리타니쿠스는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기 43년 영국(브리타니아)를 정복한 뒤 원로원에서 개선칭호이자 또 다른 가문상속명으로 붙여준 존칭인데, 이 이름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직접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정식후계자인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고작 2살일 때 선사한 이름이다. 즉, 브리타니쿠스의 정식 성씨는 여전히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이우스 황제의 중매 아래 결혼 후 낳은 아들이고, 어머니 메살리나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부계와 모계 모두를 통해 태어날 당시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유일무이한 적통이었다. 아울러 아버지는 현직 황제 신분이었으며 어머니 역시 아우구스타 지위를 가지고 있다. 또 사촌형 가이우스 칼리굴라 암살로 율리우스 가문이 끊긴 뒤 카이사르 가문 중 클라우디우스 일가만 남은 상황인 터라 브리타니쿠스의 탄생 자체는 황실에게 그 의미가 대단했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그 가계 때문에, 일찌감치 원로원과 황실 식구들에게 공식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주화가 공식 발행됐으며, 황제와 로마 정부는 화페 앞면에 Spes Augusta(황가의 희망)이라고 적어 넣어 그가 공식상속인임을 명확히 표시했다. 아울러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당시 상황 역시 국가 공개행사로 진행됐는데, 이때 로마 민중들은 황제가 브리타니아 정복을 뜻하는 존칭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고,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환호 속에서 아들을 들어올려 공개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2.2. 후계수업과 어머니의 몰락
브리타니쿠스는 일찌감치 차기 후계자로 철저한 예절교육과 기본교육을 배웠는데 이를 담당한 인사는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의 동료이며 어머니 메살리나 황후의 친구 소시비우스였다. 어린 브리타니쿠스는 대개의 로마 최상류층 자제들이 그렇듯 같은 계급의 원로원 의원 자제와 같이 잠자고 교육을 받는 방식으로 수업을 배웠는데 이때 그와 함께 가정교육을 받은 친구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였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걸음마를 뗀 이후부터 티투스와 늘 같이 살면서 가정교사들에게 수업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47년, 소시비우스와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는 어린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접견하면서 공개적으로 "어린 브리타니쿠스의 안위와 카이사르 가문의 안정"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 시기, 칼리굴라 암살 배후에 원로원 의원이자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로마 민중들에게 지지를 얻기 시작한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이는 메살리나가 이 사람의 막대한 재산과 그가 가진 호화로운 루쿨루스 정원을 노렸다고 해도 조작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학자들 역시 그가 칼리굴라 암살 배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고 말한다[1] .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즉시 체포돼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 왔는데, 그는 변명보다는 스스로 정맥을 잘라 죽는 방식으로 죽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브리타니쿠스의 안위를 위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 인사들과 메살리나는 지속적으로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행동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이런 연유로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자녀들이 이때 반역죄로 기소됐으며 여러 증거들이 유죄로 인정돼 그녀와 자녀들은 반역죄로 처형됐다.
그러나 메살리나는 이런 일과 별개로 매우 음탕하고 권력욕이 심했다. 따라서 자신의 여러 연인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모해 48년 오스티아로 시찰나간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기로 음모를 꾸몄고, 실리우스와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초대형 중혼 스캔들은 클라우디우스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지만 유능한 충신 팔라스가 동료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함께 신속히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태를 보고하면서 궁정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실리우스는 간통, 중혼 및 국가 반역죄로 체포돼 공모자들과 함께 즉시 처형되었다. 하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연민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주동자인 메살리나 처벌에는 뜸을 들여 계속 미뤘다. 따라서 나르키수스는 결단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우스를 대신해 메살리나가 머물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 밝히고 그녀를 죽였다.
브리타니쿠스의 지위는 이 무렵 처음으로 꼬이게 됐고 이는 일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이 파탄난 이후, 측근 팔라스의 강권 등에 따라 네 번째 결혼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혼상대를 고르는데 해방노예 심복 3인에게 각각 후보를 제출하게 하여 그중에서 선택하였다. 당연히 그 3인은 각자의 권세가 달린 중대사였고, 권모술수가 판치고 말았다. 이때 팔라스는 황제의 조카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소 아그리피나를 적극 밀어붙였고, 팔라스의 강권과 설득을 받아들여 아그리피나를 재혼 상대자로 결정내렸고 근친결혼임에도 이를 강행해 그녀와 결혼했다.
2.3. 계모 아그리피나와 네로의 등장
브리타니쿠스의 계모 아그리피나는 혈연적으로 사촌누나였는데, 그녀는 첫 남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후일 네로)를 두고 있었다.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다시 들어온 뒤, 브리타니쿠스보다 3살 많은 친아들 아헤노바르부스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다음 황제로 만드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녀와 브리타니쿠스의 증조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자신의 친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를 아우구스투스의 정식후계자로 만드려는 것과 판박이였고, 실제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아헤노바르부스를 과거 대 드루수스처럼 클라우디우스의 차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시킨 뒤 양자로 만들어 사위가 장인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모양새로 야망을 현실로 만드려고 했다.
49년 브리타니쿠스의 친누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고,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사위이자 의붓아들이며 조카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예 양자로 들이고 이름까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고 지어줬다. 아울러 아그리피나의 뜻에 따라 그녀의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임명시켜주고 네로의 교육은 박식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담당케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친아들 네로를 위해 브리타니쿠스에게 호의적인 근위대장 루키우스 게타, 크리스피누스를 제거했으며 기어이 51년 네로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젊은 1인자)라는 칭호까지 내리게 손을 썼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의 위치는 순식간에 애매해지고 매우 불안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여전히 네로를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부르고 인망 높고 인품이 훌륭한 큰사위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2] 를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염두해두면서, 아직 어린 브리타니쿠스에게 내심 차기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우스는 54년 10월 13일 밤, 저녁 식사 후 몇시간 지나지 않아 급사했으며,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오른팔 팔라스, 네로의 스승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16살의 네로를 로마시 옆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데리고 가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2.4. 사망
네로 즉위 후, 계모 아그리피나는 친아들을 위해 브리타니쿠스의 잠재적 보호자들을 하나둘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추방시키거나 반역죄, 간통죄 같은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그래서 타키투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3] 부자를 비롯해, 브리타니쿠스의 외가 식구들인 도미티아 레피다 등이 제거됐다.
반면 네로는 자신보다 3살 어리고, 고종사촌누나의 아들이기도 한 브리타니쿠스에게 즉위 이전부터 어떤 악감정도 없었고, 그를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에는 브리타니쿠스는 공동제위계승권자였고, 어린 브리타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유일한 적통이자 전임자의 아들인 까닭에 피바람이 불면 제거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브리타니쿠스의 성년식이 다가올 무렵 네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고 네로와 아그리피나 사이가 정적관계가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 등은 브리타니쿠스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이유는 네로가 친구 오토의 아내 폼페이아 사비나에게 홀딱 반해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멸시하고 이 과정에서 아그리피나가 네로와 사사건건 대적한 일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타키투스는 아그리피나가 이 시기부터 대놓고 브리타니쿠스를 내세워 그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네로와 그 측근세력을 적대시하면서 민중 앞에서 브리타니쿠스를 공개적으로 소개한 일을 거론했다.
소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한 것의 정확한 의도는 확실치 않다. 이것이 진짜로 네로를 실각시키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 안듣는 네로를 위협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네로보다는 브리타니쿠스의 정치적인 입장은 더 강력하였고 때문에 이는 네로에게 있어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네로는 14살이 되면서 변성기가 찾아온 브리타니쿠스가 훌륭한 목소리와 기품, 잘생긴 외모를 갖춘 것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질투하면서 폭발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브리타니쿠스는 공개석상에서 소개된 이후, 선황의 인기와 민중들의 자발적인 지지까지 등에 업게 됐는데 이는 아그리피나가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를 내세우면서 측근들과 브리타니쿠스 편을 들자 네로를 앞세워 권력투쟁을 벌이던 세네카, 부루스 등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게 만들었다.
따라서 브리타니쿠스는 클라우디우스 사후 4개여월 만에 네로에게 저녁식사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3. 사후
브리타니쿠스가 살해될 당시, 네로는 놀란 참석자들에게 "간질을 앓고 있어서 발작증세를 일으킨 것이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살인 것은 너무 명백해서, 네로는 서둘러 죽은 브리타니쿠스의 시신을 몰래 황궁 밖으로 옮긴 뒤 비가 내리는 와중에 급히 화장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
그러나 이후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 아내를 연이어 살해하고 이후에도 막장행동을 벌인 끝에 68년 실각 후 자살했다. 그런데 네로 몰락 전 로마인들에게 브리타니쿠스는 잊혀진 존재는 아니었으며, 네로 탄핵 당시 주요 악행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됐다. 또 그가 살해당한 부분은 원로원과 군대, 심지어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과 후대 황제들에게도 단순 언급을 넘어 네로가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제 손으로 끊은 범죄자로 단정된 이유가 됐다.
친구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될 때 식사자리에 함께 있던 티투스에게 일평생동안 잊지 못할 충격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티투스는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다가 즉위 후 브리타니쿠스의 모습을 황금상으로 만들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렸다고 하며, 이는 네로의 잔인성과 플라비우스 가문의 합법적 정당성 강화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1] 아시아티쿠스는 메살리나의 부정한 의도와 별개로 과거부터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모두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비니키아누스의 내부 협력자이자 동조자였다. 그래서 비니키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내심 아시아티쿠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이례적으로 갈리아에서 연설 중 간접적으로 이 사람을 힐난했다고 한다.[2] 브리타니쿠스의 외할머니가 재혼해 낳은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혈연상 외삼촌이기도 했다.[3] 이 사람과 그의 아들 모두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생전 "이 사람보다 착한 사람은 없다."고 평하고 야심조차 없어서 걱정이라고 할 정도로 온순한 황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