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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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첫 왕조'''이다.[1] 왕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뒤섞인 일종의 연합 왕조로서,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결합된 왕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아우구스투스부터 가이우스(칼리굴라)까지는 혈연과 입양에 의해 율리우스 가문의 이름이 전해졌지만, 칼리굴라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와 네로의 씨족명은 클라우디우스이다.
이 황조는 율리우스 가문,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결합된 카이사르 가문 이외에도 로마의 전통 명문 귀족(파트리키) 가문을 대부분 포괄한 왕조로서 로마 공화정 후기의 족벌주의적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화정 시대의 노빌레스 가문들이 방계황족 또는 황실과의 인척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네로의 출신가문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외에도 독재관 술라의 직계후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 리비우스 가문, 발레리우스 가문, 유니우스 가문, 아이밀리우스 가문 등이 황조 가계도에 방계 황족 이름으로 가계도에 올리고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존 공화정 체제를 뒤엎기 위해 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 왕조의 사실상의 시작[2][3] 이라고 봤다. 따라서 카이사르부터 시작된 세습왕조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시조로 보고 있고 통상적으로도 아우구스투스를 시조로 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기 전 작성해놓은 유언장에 자신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해두어서[4] 세습의 포석을 깔아두고 있었기에 카이사르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외외종조부(어머니의 외삼촌)의 양자로 입적된 옥타비아누스[5] 는 카이사르의 가문을 이어받아 두 차례의 내전을 벌여 승리하고, 제정의 기초를 닦게 된다.
계보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까지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이중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지만, 실제로 직계 혈통을 통해 제위가 세습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따라서 제위는 보통 입양을 통해 이어졌고, 이는 로마 제국 제위 계승의 전통이 된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자세한 가계도와 입양 관계를 보고 싶으면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페이지를 참조할 것. 입양, 근친혼, 이복형제에 이부형제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황조를 비롯해 이후의 세습황조들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는 입양과 모계 중심으로 황제의 혈통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직계 여성황족들의 발언권이 대단히 강했다.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경우에는 복잡한 가계도처럼 이런 경향이 강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누나, 딸, 조카 딸, 손녀 등을 통해 거미줄처럼 복잡한 친인척 관계를 맺어 놓았고, 리비아 드루실라로 대표되는 황실여성들에게 권한을 부여해준 이유가 컸다. 따라서 왕조 존속 기간 내내 힘 있는 황실 여성들이 꾸준히 등장했고, 리비아, 대(大) 아그리피나, 리빌라, 소(小) 아그리피나 등은 정국을 쥐고 흔들거나 음모에 개입해 황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결과, 권력 싸움에 끼여든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개 암투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세야누스 같은 이들까지 음모에 깊숙히 가세하면서 수많은 황실 내 남녀 황족들이 비명횡사했다.
한편 황제가 정적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도구가 간통죄와 반역죄였던 만큼,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이 두 법에 따라 황실 반대파들이 꾸준히 제거됐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을 황족 여성과 묶어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말한 것처럼 황제를 노린 암살음모들이 원로원 내에서 시작되고 실제 유죄판결을 받은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섯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이를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6] , 실제로 황제가 측근과 황궁 관료, 해방노예의 손에 암살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왕조 등장 직후부터 '''황실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두 가문 사람들의 근친혼이 끊이지 않아서,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형제이면서 동서 지간이 되거나, 삼촌/고모부이면서 사돈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소(小) 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클라우디우스의 형인 게르마니쿠스는 6촌 누이인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는 근친혼이 전혀 없지 않은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손이 많지 않았던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양성을 위해 테오도시우스 왕조 등장 이전까지 어떤 왕조보다 복잡한 혼인, 입양 등을 통해 왕조의 뼈대를 구축했다. 그 뒤를 이어받은 티베리우스는 황제로서는 무척 유능했지만, 그의 시대후반부터는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활개와 황제의 은둔정치 아래 많은 이들이 황실 내의 음모로 목숨을 잃거나 유배당해야 했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는 환호를 받으며 제위에 올랐지만,[7] 즉위 후 몇 개월 뒤 중병으로 쓰러진다. 이후 그는 프린켑스 권한 강화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원로원과의 관계는 험악하게 됐고 광기로 치부된다. 따라서 일부 근위대와 원로원, 관료들의 배신으로 4년 만에 암살당하고 만다.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칼리굴라의 친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올라, 칼리굴라 암살 직후 황제 암살을 주도한 이들을 제거하고 일부 반란,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 등 난잡한 혼란상을 정리한다. 이후 그는 원수정 체제 강화를 시작하면서 관료제 확립, 원로원 개편 등을 했고, 국고 재정 확충과 안정에도 힘을 쏟는다. 또 칼리굴라가 추진 중이었던 제국 인프라 건설과 사법재판 개편, 황제의 조폐권 확보 등을 이어나갔고 브리타니아 전쟁을 벌여 오늘날의 영국을 로마속주로 편입시킨다. 이 외에도 그는 로마의 외항으로 곡물수송 등의 역할을 한 오스티아 인공 항구를 건설했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것이 그 악명 높은 네로이다. 네로는 그리스 문화를 열렬히 사랑한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처해 황제 본연의 의무를 망각했다. 또 그는 즉위 이후 자신의 어머니, 아내들을 비롯해 직계친인척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명사들을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따라서 서기 69년 반란이 일어나 네로는 자살하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네로 황제를 끝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로마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십대 철부지가 보위에 앉아 제국을 농단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음모나 꾸미고 서로 싸워대기나 하는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네로 대를 거치면서 귀족 중 아우구스투스의 남성 후손 거의 전부가 황실 내 권력 다툼으로 숙청되었다. 근위대를 비롯한 군권이 황제 휘하에서 성장한 지방 출신의 기사 계급(에퀴타스)에 의해 장악되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점차 신주류층을 형성하여, 오현제 시기에는 귀족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성 귀족들은 실권에서 밀려난 채 계속 약화되었다.
이리하여 혈통주의는 빠르게 붕괴했다. 제위는 네로 사망 후 내전을 거쳐 지방 출신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에 넘어갔고, 네로 사망 후 겨우 30년 후에는 첫 속주 출신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탄생한다. 심지어 오현제 시대가 끝나고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해방 노예의 아들이었다.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들은 거의 모두가 속주의 별 볼 일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심지어는 반 게르만족인 막시미누스 같은 황제도 등장했다. 다만 이후 황제들도 모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를 자칭했고, 혈통이 아닌 상징적인 정통성은 제국이 끝날 때까지, 아니 제국이 끝난 뒤에도 유지되었다. 그 예로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 같은 칭호들은 카이사르에서 유래했다.
2. 성립 배경
아우구스투스는 두 차례 내전을 벌여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랐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내전이었고, 다음은 동지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싸운 내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를 배려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공화정 복귀 선언을 하는 등, 모양새만큼은 1인 지배 체제가 아닌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는 1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 다음 주자, 그 다음에는 다시 다음 주자가 안정적으로 제위를 이어가도록, 즉 항구적인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중심으로 왕조를 만들어내려 했다. 혈통 중심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즉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아닌 사람이 제위에 앉으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우려했다. 개인사적으로 어렸을 적에 부유한 집안 출신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입지 없이 (본인의 정치 욕심이 어쨌건 간에) 조용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종조부가 양자로 지명해서 순식간에 로마를 뒤흔들 정도의 권력을 얻었다는 점이 당시 시대의 혈통의 중요성을 본인에게 정확히 지각시켜 주었을 것이다.[8]
아우구스투스는 동시에 자신의 혈통으로는 왕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속했던 옥타비우스 가문은 평범한 지방 유지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율리우스 가문에 속하게 됐지만, 공화정 전체에서 놓고 봤을 때 당시 율리우스 가문은 몰락한 귀족 가문 정도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유서 깊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통을 보강하는 동시에, 유력 씨족과의 연합을 통해 정권을 안정화하려 했던 것 같다. 뒤에 쓰겠지만,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알바롱가 출신으로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유서 깊다는 명문가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는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고,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라는 두 아들을 데려왔다. 이 둘은 리비아의 전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리비아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후손들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에 시집가 마르켈루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딸 율리아를 시집보내 ― 사촌 간의 근친혼이다 ―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마르켈루스는 요절하였고, 애통해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 극장을 지어 그를 기린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중요한 패였지만 일찍 요절해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흑역사.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들 역시 황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들이었으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안토니우스파와의 상징적인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대(大) 안토니아는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에 시집가 네로의 할머니가 되고, 소(小) 안토니아는 앞서 언급한 드루수스와 결혼해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칼리굴라와 소 아그리피나의 할머니가 된다.
3. 유력 인물과 가문
왕조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리비아 드루실라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왕조이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두 개의 가문이 오랜 입양, 혼인으로 하나의 가문인 탓에 제3대 황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로마 일대를 통제함과 동시에 공화정 복귀 논의를 하면서 “율리우스 가문, 특히 카이사르 가문 남성은 안 된다. 클라우디우스도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고 클라우디우스 가도 같은 카이사르 가 집안이지 않냐.”라고 목소리가 일관되게 나왔고, 원로원은 이후에도 두 가문을 카이사르 가라고 부르며 '''하나의 가문임'''을 분명히 짚었다.
이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을 발표할 당시 벌어진 '근친혼' 논쟁에서도 찬반측 모두에게 사실로 지적되고 언급됐다. 이 당시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율리우스 가문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대해 황제와 클라우디우스의 재혼을 옹호하던 비텔리우스 등 원로원 재혼 찬성파들조차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두 가문은 하나의 가문이 맞다”'''고 인정함과 동시에 '''두 가문이 하나의 가문이며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가 즉위 후 취한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집안 사람이 어거지로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아들이자 로마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정통 직계[9] 라고 말한 브리타니쿠스의 경우에는 제호와 관련없는 풀네임 자체가 아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는 생전 자신들의 가문을 중심으로 어떤 로마 상류층보다도 복잡한 인척 관계를 맺었고, 두 사람과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외동딸 대 율리아와 그 자녀를 통해 직계혈통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두 가문 내 상호 입양뿐만 아니라 근친혼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 외손자가 요절하기 전부터 꾸준히 계속 이어졌다. 또 아우구스투스 부부는 이 과정에서 로마 귀족들의 전형적인 정략결혼을 활용했다. 그래서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불린 두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명문 귀족 가문들도 상당히 많아서, 로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사람들과 그 가문 및 후손들이 대거 등장한다.
따라서 위 문서에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중심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가뿐만 아니라 파트리키 명문가인 유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가(家) 외에도 공화정 시대 등장한 신흥귀족 가문들인 리비우스, 도미티우스 등도 이 황조의 가계도에 대거 나온다. 그래서 이 문서에서는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통칭해 불린 율리우스 가와 클라우디우스 가 외에도 여러 가문들을 서술했다. 그러나 루벨리우스 가문 등 방계 여자 황족들이 재혼으로 혼인 관계를 맺은 기사 계급 가문이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처음 시집가 맺어진 폼페이우스의 가문인 폼페이우스 가(家)의 경우에는 황조 존속 당시부터 비중이 크지 않아 제외했다. 반면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의 가문이자 로마 최고의 명문가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급사 전 이 사람이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낙점되던 상황이었던 점, 네로 집권 기간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과 연관되는 집안이기 때문에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3.1. 율리우스 가(家)
율리우스 가문은 왕정 시대부터 내려온 아주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가문 내 전설에서는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베누스와 닿아 있었다고 하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베누스 여신의 후손이라고 뻔뻔스럽게도 주장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가문명인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지파 이름으로, 종전에는 코끼리를 뜻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했던 율리우스 가문의 선조가 전공의 대가로 이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했었다. 하지만 현대 연구가들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라는 뜻인 '카이사리에스'의 변형으로 본다.
율리우스 가문은 명문이지만, 클라우디우스, 코르넬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발레리우스 가문처럼 거물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해내지는 못했다.[10] 공화정 중기 이후의 유명한 카이사르 가문 출신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처럼, 당시의 카이사르 가문은 전통만 있고 실질적인 영향력과 재산은 많이 떨어지는 가문이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당시 귀족들이 모여 살았던 팔라티노 언덕에 살지 않았다. 그는 서민 주거지로 여겨지는 수부라에 거주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오래된 귀족 가문임에도 전통적인 원로원 보수파에 속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워낙 잘 알려져 있듯이 민중파의 지지를 받으며 원로원파와 대척점에 선 정치인이었고, 친척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 시 시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율리우스 법을 제안해 통과시켰다.
카이사르 가문은 마리우스에게 딸을 시집보냈다.[11] 마리우스가 다섯 번 연속 집정관에 연임되는 등 엄청나게 출세하고[12] 민중파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민중파의 색채를 강하게 갖게 된다. 카이사르 자신도 민중파의 또 다른 거두인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13]
이런 혈연 관계 때문에 카이사르는 출세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민중파의 대표격으로 인식되고, 귀족 공화정에 반대하는 반체제 세력의 수장이 된다. 또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공화정을 군사적으로 쳐부순, 즉 공화정에 대한 승리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나마 공화정을 계승한다고 외친 아우구스투스는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는 카이사르의 칭호는 물려받았지만, 이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원로원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바치게 해 이를 카이사르보다 먼저 내세우게 된다.[14]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들이 즉위할 때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통치를 본받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항상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앞에 놓였다.[15] 형식상으로나마 공화정이 지속되던 제정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대놓고 들먹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황제 가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정통성은 일부 부정되어야만 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할 때 갈리아 부족의 많은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명을 하사했다. 갈리아인들과 자신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동맹자들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율리우스’들이 제정 시대에 활약했지만, 이들은 카이사르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다. 비록 그들 중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3.2. 클라우디우스 가(家)
클라우디우스 가는 로마 역사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왕정과 공화정 이래로 로마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이다. 알바롱가 출신 가문으로 로마 건국 후 로마에 합류한 씨족 집단이다. 즉 이들의 역사는 로마시의 역사보다도 길었다. 로마의 시작부터 함께한 가문은 아니지만,[16] 거물 정치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로마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 인물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12표법을 제정한 정치인이다.
- ‘재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혹은 장님 아피우스, 이 사람의 차남의 후손이 풀케르 가문이고, 4남의 후손이 네로 가문이다. 로마 수도와 가도의 개념을 처음 입안한 정치인으로 아흔의 나이에 피로스와 타협할 것을 고려하던 로마 정치인들을 호되게 꾸짖어 타협을 단념하게 만들었던 일화가 있다. 결국 로마는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에서 유일하게 한니발과 직접 맞붙어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장군 중 한 명으로 '로마의 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니발을 전담 마크하는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한니발을 끝까지 괴롭혔고, 이후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전사할 때까지 끈질기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그 외에 전쟁 도중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카르타고에 붙은 시라쿠사를 함락시킨 장군이기도 하다.[17]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장님 아피우스(아피우스 카이쿠스)의 4남의 직계 후손으로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의 장군으로 전쟁 후반 북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기발한 전술로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전멸하고 하스드루발은 죽는다. 당시 로마 집정관이 자신의 임지를 이탈하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하스드루발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임지를 이탈해 하스드루발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출동했고, 이 결단이 로마군을 살려냈을 뿐 아니라 승리를 얻게 했다. 네로라는 말에는 ‘과감한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는 그의 이름에 맞게 행동했다.
- 클라우디아: 로마 역사상 손꼽히는 망언으로 무려 25,000아세스라는 역대급 벌금을 물어서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여성형 이름인 클라우디아를 가진 여성으로 친정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다. 클라우디아는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해군 제독이자 BC 249년도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누나였다. 클라우디아는 BC 246년 극장에서 수많은 인파가 자기 앞을 가로막자, 당시 동생의 실수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드레파나 해전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푸블리우스가 살아나 또 한번 시칠리아로 함대를 끌고 가서 이 인간들을 싹 줄여주면 좋을텐데!"라고 실언했다. 이 발언은 불명예를 얻고 슬픔 속에 죽은 남동생과 친정을 비롯해 해전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 로마군 전체와 노병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실언은 동생이 로마 사회의 질타를 받고 쓸쓸히 죽은 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한 행동이었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거만하고 고집세다’는 이미지가 강한 친정 사람들의 이미지는 이 사건 후 예전보다 더 나빠졌으며, 그녀 역시 다른 귀족 여성들과 달리 두고두고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불명예를 얻었다.
-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클로디우스’라는 이름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클로디우스의 원래 이름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이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해군 제독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후손 중 한명으로 전형적인 귀족 엘리트로도 유명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초대형 스캔들인 “보나 데아 성추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젊은 귀족이었던 그는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폼페이아에게 홀딱 반해 BC 62년 12월 최고 제사장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린 보나 데아(Bona Dea) 축제[18] 때 여장을 하고 출입했다가 신성 모독죄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중죄였기 때문에 처벌을 피하기 불가피했는데, 당시 법무관으로 재판에 참석한 카이사르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 그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시켜주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19] 이후 이 사람은 느닷없이 평민만이 출마할 수 있는 호민관 직책을 얻기 위해 스스로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귀족 신분을 버려 또 다시 주목을 받았다. 평민이 된 그는 이때 클로디우스로 이름을 바꾸고 혼란한 로마에서 자경단을 조직해 민중파의 선동 정치가이자 정치 깡패로 활약했다.[20] 결국 원로원파 정치 깡패인 밀로와의 충돌 끝에 살해당한다.
-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 장님 아피우스의 직계 후손에서 분파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은 아니지만, 포에니 전쟁의 영웅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유력 가문이다. 전쟁 영웅 마르켈루스와 그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로마 원로원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마르켈루스의 직계 5대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내전기 때 카이사르의 반대파였다. 그러나 그의 사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질손녀인 소 옥타비아(아우구스투스의 친누나)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3남매 중 아들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인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첫 번째 공식 후계자인 마르켈루스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大 율리아의 첫 번째 남편)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는 혈연상으로도 친척이었다. 마르켈루스의 누이들인 대,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또한 아그리파, 안토니우스 가문,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등 여러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 대상이 되었다.
-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로마 황제의 제위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혈통적으로 3명의 황제가 모두 이 가문의 남성들이며, 로마인들에게 “율리우스 가문(카이사르 가문) = 클라우디우스 가문(네로 가문)”으로 인식된 그 가문이다. 장님 아피우스(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4남 티베리우스에서 시작됐으며, 그의 직계손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에 이르러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포에니 전쟁의 영웅 중 한명이 되면서 명성을 떨친 분파 가문이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200년간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손자 드루수스를 비롯한 네로 가문 남성들은 잘해야 법무관에 머무는 등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번째 남편은 전쟁영웅 가이우스의 손자 드루수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1] 이다. 그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직계손이었고,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 당시 수장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카이사르파에 속한 사람이었다[22] .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티베리우스는 12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이 가문을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기 전까지 이 가문의 수장이었고,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악티움 해전 직전부터 클라우디우스 씨족 전체를 대표하는 분파가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입양되면서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수장 자리를 넘겨줬다. 리비아의 차남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진지하게 후계자로 고려했고 집정관 취임과 개선식을 앞두게 되면서 양자입적이 매우 유력했다. 하지만 그는 정식후계자에 오르기 전 개선식을 앞두고 요절했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사위였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재혼 당시 뱃속에 있던 아이인 탓에 그와 자녀들의 혈통은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통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드루수스의 두 아들과 그 혈육들이 티베리우스 사후 연이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이며, 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공동제위계승권 내지 차차기 황제로 지명된 남자황족들이나 티베리우스의 손자도 모두 드루수스의 혈육들이다. 참고로 네로는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부터 시작되는 클라우디우스 분파 가문이다. 위에서 언급된 마르켈루스 가문, 네로 가문과 함께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유력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한 집안으로 상술된 두 가문과 비교해도 그 위세가 공화정 시대부터 꾸준히 대단했다. 이런 까닭에 보나 데아 성추문 사건 당시 법무관이자 피해자였던 카이사르조차 이 가문의 힘과 자신의 공직경력 등을 종합적으로 의식해 클로디우스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시켜 줄 정도였다. 이 가문 남성들은 시조 아피 클라우디우스에서 따온 아피우스라는 이름과 로마인들이 장남에게 붙여주는 이름을 대대로 사용한 집안이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에서도 본가 격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해군 제독이자 BC 249년도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비롯해 이 사람의 누나로 BC 246년 로마사 전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망언으로 엄청난 벌금을 물었던 클라우디아, 선동 정치가 클로디우스 풀케르(풀비아의 남편) 등이 이 집안 사람들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끊긴 이후에도 로마사에서 언급되는 집안이기도 하다.[23] 초대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래 가문으로 그녀의 후손들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모두 이 가문의 피를 물려 받았다. 리비아의 아버지는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일원이었다가 리비우스 가문으로 입양되었던 사람인데, 그는 리비우스 씨족 중 하나인 드루수스 가문에 속했다. 이러한 까닭에 리비아의 차남(칼리굴라의 할아버지)에게 외할아버지의 이름 드루수스가 전해졌으며, 다른 아우구스투스 일가 남성들도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결혼하면서, 리비아가 전 남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사이에서 낳은 두 자식을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아내의 차남 드루수스가 자신의 사저에서 태어난 이후에도 한동안 키웠고 세간의 비난 탓에 다시 돌려보냈다. 그러다가 리비아의 전 남편이 죽자 “내전으로 이들 형제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내의 아들 두명을 모두 자신의 집에 데려간 뒤 사실상 친아들로 키우고 정을 쏟았다. 이들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로,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2대 황제가 되었고, 드루수스의 둘째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4대 황제, 손자인 칼리굴라는 로마의 3대 황제, (외)증손자이자 양손자인 네로는 5대 황제가 되었다. 리비아는 리비우스 가문 출신이었으나, 리비아의 아버지는 리비우스 가문의 양자로서 원래는 클라우디우스-풀케르 가문의 구성원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를 통해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과도 연결되었고 친조카 마르켈루스를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시켜 후계를 보려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를 누나 대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와 결혼시켜 자녀 3명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해 입적시켰고 그의 아들이 칼리굴라이다. 반면 유일하게 남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3남매 중 둘째인 클라우디아 리빌라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가 다시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양손자인 소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시켰는데, 소 드루수스와 클라우디아 리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한명이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이다.
3.3. 옥타비우스 가
아우구스투스의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은 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달리 로마 근교의 벨라트라이 출신으로 넓은 의미로 평민에 해당되는 기사 계급이었다. 옥타비우스 가문은 대대로 은행업에 종사한 가문으로 상당히 부유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이전에도 원로원 의원을 배출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경우에는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 가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24] 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인 아티아와 결혼했는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종조부뻘이 된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불리게 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출신 가문임에도 왕조의 이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3.4. 안토니우스 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모계를 통해 율리우스 가문과 혈연이 있다. 안토니우스의 외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통칭 카이사르)의 6촌 형,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는 카이사르의 6촌 누나였기에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는 혈연상 친척 범위 안에 들어가는 7촌 관계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동복 누나인 옥타비아와 BC 40년 결혼해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바로 대(大) 안토니아와 소(小) 안토니아 자매이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BC 32년 이혼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두 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안토니우스 사후에도 황제 가문의 일원으로 대우했다.
- 대(大) 안토니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의 혼인을 통해 세 딸과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았다. 그녀의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종사촌형 게르마니쿠스의 첫째 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네로[25] 다. 즉 대 안토니아는 네로의 할머니가 된다. 또한 그나이우스의 여자 형제 소 도미티아는 발레리우스 가문으로 시집가서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클라우디우스의 황후인 메살리나이다.
- 소(小) 안토니아: 친언니와 달리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와 외숙모 리비아의 주선으로 티베리우스의 동복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해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를 낳았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명시된 인물이며, 3대 황제 칼리굴라와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아버지이다. 이런 까닭에 안토니우스 가의 피는 모계 혈통을 통해 3대 황제 칼리굴라,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5대 황제 네로에까지 미치게 된다.
3.5. 도미티우스 가
네로의 본가는 도미티우스 일족 중 한 갈래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이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도미티우스 씨족 분파 내에서도 유력 정치인을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로마 귀족 가문이었고,[26] 다른 귀족 가문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이름 대물림으로도 유명했다.[27]
네로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술라의 내전 당시 마리우스파였던 등 골수 옵티마테스파는 아니었으나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파트리키 가문들처럼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를 맹렬하게 반대하는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수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필리피 전투 당시 카시우스-브루투스 연합군의 해군 제독으로 삼두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이후에는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딸인 대 안토니아가 그나이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을 하면서 가문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할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이모의 아들인 이종 사촌 형 게르마니쿠스의 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네로로 잘 알려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다. 또한 대 안토니아의 세 딸 중 소 도미티아가 발레리우스 가문으로 시집가 낳은 딸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라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대대로 잔인하고 거만하며 성질이 급한 것으로 악명이 높아 평판이 좋지 않은 가문이었다. 폭군 네로 또한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이 있다는 말도 있다.
3.6. 리비우스 가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정인 리비우스 가문은 공화정 시대부터 수많은 집정관, 법무관,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이다. BC 112년에 집정관을 지낸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반대하였지만, 그 아들인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동맹시 전쟁 때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보수파들에게 암살되었다.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에서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였는데 그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이다. 그는 곧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의 아버지가 되는데, 그는 양부와 달리 보수적인 원로원파 멤버였다. 그래서 그는 카이사르와 2차 삼두정을 반대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직후 그리스로 피신해 필리피 전투에 직접 참전해 싸웠다, 하지만 2차전에서 패배 후 동료 의원들과 달리 항복을 거부하다가 자결했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역시 딸 외에는 아들이 없어서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에서 양자를 구해 키웠는데, 그가 바로 리비아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다. 드루수스 리보의 친고모는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부인인 스크리보니아(율리아의 친모)였고, 친부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장인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누나 리비아와 매형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으며 조카 티베리우스 시대에는 모함을 받았다가 티베리우스에게 보호를 받고 이 사람을 모함한 인사가 역으로 반역죄로 기소돼 처형되기도 했다. 또한 드루수스 리보는 훗날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첫 번째 결혼 상대자였지만, 결혼식 당일 갑자기 사망한 리비아 메둘리나 카밀라의 아버지로도 추정되고 있다.
한편, 리비우스 가문 중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여동생) 리비아 드루사는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처음 결혼해 세르빌리아(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카이사르의 정부)를 낳고, 카토와 재혼하여 소(小) 카토를 낳았다.
3.7. 발레리우스 가
발레리우스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이밀리우스, 유니우스, 칼푸르니우스 가문 등과 함께 로마의 오래된 명문가로 공화정 초기부터 활약해온 귀족 가문이다. 이 가문 역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여러 번의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낳았다. 이 남매 중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28] 는 15세가 가까울 무렵, 자신보다 5살즈음 많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아피아누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딸 클라우디아 풀크라와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가 태어났다. 하지만 이 결혼은 아피아누스가 BC 12년 사망하면서 끝이 난다.[29]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딸인 클라우디아 풀크라는 대 아그리피나의 오랜 친구였고 그녀가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반역죄로 고발될때 함께 반역자로 고발되어 망명 중 사망했다. 반면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는 성년이 된 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의 딸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해 딸 발레리아 메살라(메살리나)를 얻었다. 메살리나는 16세의 나이에 할아버지뻘 나이였던 먼 친척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다. 이후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갑작스레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됐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와의 사이에서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아들 브리타니쿠스(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를 낳았지만, 일찍부터 지나친 사치와 불륜, 음모를 통해 사람들을 고발하고 사형에 처하게 하는 등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 그녀는 원로원 의원이자 콘술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간통했고, 결혼식까지 올렸다. 실리우스와 메살리나가 일으킨 이 사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따라서 이 사건 후 그녀와 불륜을 저지른 실리우스는 간통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의 처벌을 자꾸 뜸들이며 미뤘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측근인 나르키소스가 루쿨루스 별장에 머물던 그녀를 살해했다.
3.8. 아이밀리우스 가
제2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레피두스가 속해 있는 집안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본가로도 잘 알려진 전통 세습 혈통 귀족 가문이다. 가문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2대 왕 누마에서 시작된 가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공화정 시대 내내 수많은 정치인, 장군 등을 배출했다.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네로의 본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이름 대물림과 괴상한 이름 짓기 방법으로 당대부터 상당히 유명한 명문 귀족 가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30]
아이밀리우스 가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레피두스 가문은 일찍부터 복잡하게 얽힌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를 맺었다. ‘삼두’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조카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소 율리아(빕사니아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율리아는 간통죄로 섬으로 추방당하고 본인은 반역죄로 사형당했다. 티베리우스 시대에는 이 가문 출신인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세야누스의 음모에 공모해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유폐돼 굶어죽고 그녀 역시 자신의 노예와 간통한 혐의로 고발된 뒤 자살했다. 또 아이밀리아의 형제로 추측되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역시 친척 관계인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딸 율리아 드루실라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율리아 드루실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며 마르쿠스는 전 부인의 오빠인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한 혐의로 체포돼 유배 후 처형됐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여러 가문원들이 집정관을 역임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타키투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황제의 잠재적 경쟁 상대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특히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역임자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위의 소 율리아의 남편 루키우스의 형제)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레피두스는 제국을 다스릴 능력이 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는 말까지 있다. 이 레피두스는 권력에 대한 열망을 보이지 않고 처세술을 발휘했기에 티베리우스 시대의 숙청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3.9. 유니우스 가
유니우스 일족은 코르넬리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일족과 함께 로마사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귀족 가문이며, 역사의 유구함과 명성 면에서 율리우스 가문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 정치인들을 여럿 배출했다. 로마 왕정 시절부터 시작된 유니우스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명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 시대를 연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며, 카이사르의 암살자들 중 가장 유명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이 가문 출신이다. 브루투스 가문 외의 유니우스 일족 내 분파 가문들 역시 로마 건국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유명 정치인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배출했다.
유니우스 일족 중 실라누스 가문은 네르바 가문처럼 공화정 말기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협력 귀족 가문이었고, BC 25년 옥타비아누스과 함께 하는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배출했다. BC 25년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손자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녀[31]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그의 세 아들과 두 딸은 모두 네로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누명을 쓴 뒤 유배됐다. 장남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32] 는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네로가 즉위한 직후 억울하게 반역죄로 고발된 뒤 죽임을 당했다. 이때 그의 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건실하고 온건한 청년이었지만 네로의 고모인 도미티아 레피다[33] 와 함께 주술을 부리고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이유로 셋 다 모함을 당해 혈관을 자르는 방식의 자살을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동생이자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차남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아그리파와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레피두스 동생의 후손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그는 본래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언행 역시 거만했다. 하지만 네로 즉위 직후 형과 조카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에도 살아남았는데, 결국 네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된 뒤 죽임을 당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죽임을 당하기 전, 그의 동생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역시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자신의 아들을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려고 한 소 아그리피나의 음모로 인해 명성이 크게 손상됐다. 이때 그는 조작된 소문인 누이동생과 근친상간의 의혹만으로 소 아그리피나에게 고발당한 뒤 원로원 의석이 박탈됐다. 이후 그는 죽은 형의 아들들을 돌봤는데,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한 당일 자살을 강요당해 사망했다.
실라누스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지막 남자 후손들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의 음모로 살해됐다. 따라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네로 사후 혈통에 의한 황제 후보는 전멸하고 각지의 속주 총독들이 황제를 자칭하는 데 걸림돌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딸 유니아 레피다는 살아남았으며, 유니아의 딸 카시아 롱기나는 장군 코르불로와 결혼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황후가 돠는 도미티아 롱기나를 낳았다.
3.10. 코르넬리우스 가
로마역사상 유니우스, 파비우스 가와 함께 오래된 최고의 명문 파트리키 가문이 있다면 바로 코르넬리우스 가문이다. 이 파트리키 가문은 공화정 시대동안 가장 유력한 집안답게 공화정 역사동안 독재관, 개선장군, 감찰관, 법무관 등 주요 관직 경력자를 수 없이 배출했다. 특히 분파 가문 중 스키피오 가문은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와 함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전까지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영향력과 명성이 대단했던 공화정 명문가의 상징이었고, 종신독재관 술라 등장 이전까지 다른 분파와 달리 영향력이 떨어졌던 술라 가문 역시 독재관 술라 이래 이름을 날렸다.
이중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즉 카이사르 가문이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은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그 유명한 술라 펠렉스의 직계인 술라 가문이었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첫남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요절로 일찍이 홀로 되자 그녀를 대 안토니아와 도미티아 레피다,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34] 와 결혼시켰다. 이후 그는 파우스투스 술라가 가계상 자신의 어린아들과 혈연상 외삼촌과 조카 사이라는 것과 사위인 이 사람의 인품과 능력 등을 높이 샀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제왕교육을 시작시킬 시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들의 조력자 내지 징검다리로 염두해뒀다고 하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 주도의 궁정쿠데타로 또 다른 사위이자 양자 네로가 옹립되면서 무산됐다.
네로는 동서 사이이며, 고모의 아들이기도 한 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를 끊임없이 견제했고 어린시절부터 아주 미워했다. 따라서 어머니 아그리피나 살해 이후 꾸준히 사촌형 제거를 시도했다. 이런 까닭에 파우스투스 술라는 팔라스, 부루스 주도의 반란음모라는 사건이 네로와 티겔리누스 주도로 처음 언급될 당시 기소된 이후 지속적으로 네로에게 공격을 받았다. 따라서 네로는 그를 처음 기소한 이후 3년 뒤 어거지로 유죄를 만들어 기어이 갈리아로 추방시킨 이후 죽였다. 이후에도 네로는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까지 피소음모 사건을 터뜨리면서 제거하고 이 가문을 공격했는데, 이들 부부가 네로에게 억울하게 처형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의 정통직계는 역사상 완전히 전멸하고 만다.
4. 역대 황제
5. 주요 황족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계획 아래 상호입양, 근친혼으로 맺어진 만큼, 상당히 가계 자체가 복잡하다. 여기에서는 다섯 황제를 제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내 아우구스투스 직계[35] 황족이므로 타 가문 방계황족들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하지 않겠다.
5.1. 남성 황족
- 마르켈루스: 본명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제위 계승권자이자 친조카, 사위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친누나 소(小) 옥타비아의 아들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아우구스투스의 2인자 아그리파와는 미묘한 경쟁 관계에 있었다.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황태자. 아우구스투스의 외동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이다.
-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제위 계승권자. 아우구스투스의 외동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번째 아들이다.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통칭 드루수스, 대(大)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한 가계가 티베리우스 이후 이어진 아우구스투스 직계 혈통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로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러는 소문이 돌았고, 로마인 대부분은 이를 사실로 여겼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의 사위이며, 황태자였던 게르마니쿠스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제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할아버지, 제5대 황제 네로의 외증조 할아버지이다.
- 게르마니쿠스: 대(大)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양자이자 황태자.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종손이며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이다.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큰아버지 티베리우스가 공식적으로 양자 입적 후 황태자가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따라 불과 18세의 나이에 차차기 황제로 내정됐다. 제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와 제5대 황제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아버지이며, 제5대 황제 네로의 외할아버지이다. 아울러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형이다.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통칭 소(小) 드루수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이자 게르마니쿠스 사후 황태자가 된 사람이다. 혈연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한방울도 흐르지 않은 탓에 아우구스투스 생전에는 제위 계승 서열이 낮았지만,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될 때 카이사르 가문에 자동적으로 함께 입적돼 아우구스투스 생전 당시부터 카이사르 집안 사람이 되었다. 건강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요절했는데, 훗날 아내 리빌라와 세야누스의 공모로 독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마르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아그리파 부부가 낳은 다섯 자녀 중 막내이자 삼남. 아그리파 급사 후 태어난 유복자로 두 형(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한 이후, 생전 부모와 아우구스투스 약속(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외의 다른 남자아이는 입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파기되고 티베리우스가 공식 입양될 때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양됐다. 하지만 황궁 안에서 망나니인 데다 잔인성과 폭력성 문제로 시작된 각종 문제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든 양자 관계가 파기되고 추방된 뒤, 외조부 사망 직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처형됐다.
- 네로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세 아들 중 장남. 본명은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36]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첫째 형이며 제5대 황제 네로의 외삼촌이다. 고모부이자 삼촌, 장인인 소(小) 드루수스가 사망한 뒤 황태자가 됐지만,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가 반역죄로 고발될 때 함께 고발돼 유배됐다가 유배지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뒤 자결했다.
- 드루수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세 아들 중 차남. 본명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둘째 형이며 제5대 황제 네로의 외삼촌이다. 어머니와 형이 세야누스에 의해 반역죄로 고발 후 유배된 이후, 티베리우스에 의해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소개됐다. 그러다가 세야누스의 유혹에 넘어가 불륜을 저지른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세야누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녀와 세야누스 일당에게 누명을 쓴 뒤, 황궁 지하실에 유폐됐다. 세야누스 몰락 직전, 티베리우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석방령이 내려졌지만, 풀려나지 못했다. 세야누스 몰락 후 소(小) 드루수스의 독살 등이 연이어 밝혀지면서 티베리우스의 무관심 속에 황궁 지하실에서 아사했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와 당시 정황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가둔 사실에 매우 후회하면서 그의 생사를 걱정했고, 공식 후계자였던 그가 굶어 죽은 채 발견되자 원로원과 마찬가지로 무척 침통해했다고 한다.
-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게멜루스: 통칭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자.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사촌 동생이자 양자, 공동 제위 계승권자. 소(小)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쌍둥이 아들 중 살아남은 아들이다. 어머니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공모해 아버지를 독살했음이 밝혀진 뒤, 정통성에 타격을 받았다.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공동 제위 계승권자였지만, 티베리우스와 관계가 험악했던 원로원의 무시로 황제가 되지 못했다. 사촌 형 칼리굴라가 건강하던 시절, 공식적으로 사촌 형의 양자이자 황태자가 됐지만, 중병 이후 의심병이 생긴 칼리굴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 통칭 브리타니쿠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로 부모 모두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정통 후계자이다. 그러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생전에 후계자로 공인받지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매형이자 계모 소(小) 아그리피나의 친아들 네로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小) 아그리피나와 네로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불과 13세의 나이에 식사 자리에서 네로의 손에 독살당했다.
5.2. 여성 황족
- 리비아 드루실라: 아우구스투스의 네 번째 아내이자 황후.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어머니이자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증조 할머니, 게르마니쿠스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할머니이다.
- 옥타비아: 통칭 소(小)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의 동복 누나. 옥타비아의 두딸과 그 후손들이 티베리우스 사후 대대로 제위를 계승했다.
- 율리아: 통칭 대(大) 율리아. 아우구스투스가 세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로 유일한 혈육이다. 총 세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남편인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大)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낳았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었으며,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 대(大) 안토니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첫째 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해 1남 3녀를 낳았으며, 제5대 황제 네로의 친할머니,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인 메살리나의 외할머니이다.
- 소(小) 안토니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둘째 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대(大) 드루수스와 결혼해 게르마니쿠스, 리빌라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낳았다. 그녀는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할머니이자 제5대 황제 네로의 외증조 할머니이다. 손자 칼리굴라가 즉위한 뒤, 리비아 드루실라가 가지고 있던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얻었으며, 차남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이후 매년 그녀와 그녀의 남편 대 드루수스를 기리는 행사가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개최됐다.
- 대(大) 아그리피나: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가 두 번째 남편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녀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이다.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해 제3대 황제 칼리굴라를 낳았다. 제5대 황제 네로의 외할머니이다.
- 리빌라: 본명은 클라우디아 리비아 율리아. 리빌라는 통칭이자 집안에서 부르던 애칭이다. 대(大) 드루수스와 소(小) 안토니아의 고명 딸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종손녀, 옥타비아의 외손녀,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녀이다. 2차 창작물이나 야사에서는 그녀의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음모를 꾸미고 사람들을 죽이는 악녀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악녀였으며 그녀의 행동으로 왕조가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됐고, 그 후유증으로 두 가문 모두 멸문하고 만다. 리빌라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으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해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와 다시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다. 세야누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직전까지 불륜 관계였으며, 그와 함께 황궁 안팎에서 남동생 클라우디우스, 막내 조카 칼리굴라, 아들 게멜루스를 제외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남자 후손들을 모조리 죽이는데 공모했다. 그녀는 세야누스와 공모해 남편인 황태자 소(小) 드루수스를 독살해 세야누스 몰락 후 사실이 밝혀진 뒤, 티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에게 끌려 갔다. 이때 그녀의 모친 안토니아의 명으로 그녀가 살던 방 안에 가둬진 채 굶어 죽었다.
- 소(小) 아그리피나: 게르마니쿠스와 대(大) 아그리피나의 장녀로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여동생이다. 이모 할머니 대(大) 안토니아의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해 제5대 황제 네로를 낳았으며, 친삼촌인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했다.
- 빕사니아 율리아: 통칭 소(小)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대(大)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둘째 딸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으며, 그녀의 아들과 딸은 언니 대(大) 아그리피나의 자녀들과 결혼했다.
- 율리아 드루시 카이사리스 필리아: 통칭 율리아 리비아. 소(小)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딸이며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외삼촌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이후 남편인 네로 카이사르가 반역죄로 추방형에 처해진 뒤 자살하자 기사 계급 출신인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와 재혼했고 2남 1녀를 뒀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절, 메살리나에게 ‘근친상간 및 부도덕죄’로 고발돼 처형됐다.
- 메살리나 발레리아: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 출신이며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 제5대 황제 네로의 고종 사촌 누나이며, 칼리굴라의 주선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종손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장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가장 오래까지 생존한 황실 직계 황족이다. 첫 남편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두 번째 남편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이다. 이복동생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와 남편 파우스투스 술라가 모두 네로에게 살해당했으며, 본인 역시 네로의 재혼 요청을 거절한 일이 꼬투리잡혀 피소 음모 사건 당시 반역죄로 기소돼 처형됐다.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위의 소(小) 옥타비아의 증손녀로 보통 옥타비아라고 통칭한다.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메살리나 발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1남 1녀 중 첫째이다. 제5대 황제인 네로의 첫 번째 아내이기도 하다. 남편 네로에 의해 남동생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됐으며, 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마저 남편 손에 죽임을 당한 뒤 그녀 역시 네로에 의해 간통죄 누명을 쓰고 이혼당한 뒤 처형됐다.
6. 여담
중세 이탈리아와 르네상스 시기의 로마를 휘어잡았던 가문들 중 하나인 오르시니 가는 자신들이 이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37]
[1] 여기서 주의해야할 게, 서방의 왕조는 조선 왕조 같은 동방의 왕조와는 그 개념이 많이 다르다. 동양의 왕조는 직계 자손 위주로 계승 되지만, 서방의 왕조는 꼭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으므로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그 차이와 더불어 로마 귀족 특유의 족벌주의, 6촌 이내 친인척 간의 복잡한 혈연과 입양으로 맺어져 있다.[2] 카이사르는 새로운 로마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설계한 제정만큼 정교한 체제는 아니었겠지만, 이처럼 1인 세습 통치 체제를 구축할 구상 정도는 해 두었을 것이다.[3]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나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 회의록 발언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로마인들은 이 황조의 시작을 카이사르로 봤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직계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또는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불렀다.[4] 유언장의 내용은 사후에 공표되었다.[5]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딸이며, 아티아의 아버지는 폼페이우스의 고종 사촌 형제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혈연적으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먼 친척이었다.[6] 간통죄는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주로 활용했다. 반역죄 기소 후 반대파 제거 방식은 티베리우스 말기의 공포정치 당시와 칼리굴라 시대 중 갈리아 출전 직전 두 집정관의 모반 사건이 들통난 직후 많이 사용됐다. 그런데 이 시대의 반역죄 처벌은 세야누스파 제거나 실제로 황제 암살 시도가 적발된 이유가 컸다. 그러나 네로 시대때 급증한 반역죄 처벌은 지극히 황제 개인이 죄없는 친인척과 부자들을 제거한 수단으로 악용됐다.[7] 칼리굴라는 황실 가족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소문상 음험한 늙은 노인네였던 티베리우스의 통치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8]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는 네로 사후에 그대로 적중했다.[9] 제5대 황제 네로의 경우에는 부계와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맞지만, 부계를 통해서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고 모계를 통해서만 이어받았다. 아울러 네로의 경우에는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한 직후 어머니,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의 친위쿠데타를 통해 공동계승권자 브리타니쿠스를 밀어내고 즉위한 케이스였고, 선황 생전부터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리면서 양자 입적 이후에도 정통성 부분은 첫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통해 의지했다.[10] 귀족 가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명한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것은 아니다. 공화정 중기 이후로 가면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졌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선거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공직에 나설 수 없었고, 오랜 세월 정치인을 배출해내 귀족보다 더 귀족답게 여겨지는 평민 가문도 많았다. 예를 들어 폼페이우스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는 당시 카이사르 가(家)의 영향력과 권위를 압도했다.[11] 그래서 마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된다.[12] 공화정 로마에는 한 번 집정관에 당선되면 10년간 집정관을 역임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로마가 위기 상황이었다지만, 어쨌든 이 규정을 '''생까고'''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것이다.[13]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가 킨나의 딸과 이혼할 것을 카이사르에게 강요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고 도피 생활을 한다.[14] 다만 카이사르 본인은 자신이 공화정을 무너뜨렸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다. 독재를 했지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였고 원로원을 없애거나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워낙 가던 길이 길이다보니 왕좌를 노린다는 말을 듣지 않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15] 카이사르는 제위 계승자에게도 내려지는 칭호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칭호였다. 심지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로마가 넷으로 나뉠 때도 정제(正帝)는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썼고, 부제(副帝)는 카이사르를 썼다.[16] 귀화한 사비니인 출신이다.[17] 마르켈루스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일족의 평민 분파로,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 또는 그 후손이라는 추측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18] 굳이 번역하면 ‘선한 여신’이라고 부르는 축제로 오직 여성들만 참석할 수 있던 제사 의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들의 출입은 엄금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신성 모독죄라는 중죄로 처벌받았다. 따라서 이 제사 의식은 베스타 여사제가 담당했고 최고 제사장인 카이사르조차 출입이 금지됐다.[19] 이때 나온 말이 카이사르가 폼페이아와 이혼하면서 발언한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였다.[20] 클로디우스는 주로 카이사르와 협력했지만, 카이사르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21] 부모 양친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혈통인 사람이다.[22] 이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탓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카이사르파에 속한 젊은 귀족 중 한명이기도 했다. 그는 카이사르 밑에서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카이사르군의 해군 제독으로 알렉산드리아 해전을 치뤘으며, 카이사르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갈리아 일대의 로마화 작업 책임자로 파견됐다. 아울러 그는 법무관 재임 무렵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편에 있으면서 한때 옥타비아누스의 주요 정적 중 한명이었다.[23] 3세기 때의 황제인 푸피에누스가 모계를 통해 이 가문의 피를 이어 받았고,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이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이 현대 연구에서 밝혀졌다.[24] 스파르타쿠스 잔당들을 토벌했으며, 법무관을 거쳐 마케도니아 총독까지 역임했다. 특히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던 시절,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에게 편지로 그에게 조언을 받으라고 충고할 정도로 성과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로마 귀환 중 객사했다.[25] 네로의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26] 단, 로마 전통 귀족인 파트리키에 속하지 않아 평민 귀족으로 분류되었다.[27]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초기에는 그나이우스-루키우스-그나이우스-루키우스 식으로 두 세대마다 같은 프라이노멘을 사용하는 패턴을 보인다.[28] 어머니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재혼할 무렵 뱃속에 있었다.[29] 이후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는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로도 불려지는 전직 콘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재혼했다.[30] 같은 씨족의 대가 끊긴 다른 가문명인 파울루스를 레피두스 뒤에 붙이거나 아예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하거나 하는 등 매우 헷갈리는 작명 방식으로 후대의 연구자들까지 고생하게 만들었다. 친형제인데 장남은 가문명이 파울루스, 차남은 레피두스인 경우까지 있다. 황족과 통혼한 명문 귀족인데도 가문의 가계도조차 확정되지 못하고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31]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소 율리아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32] 타키투스의 기록으로 대표되는 신뢰성 높은 로마시대 기록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생전 양보다 순하고 온화한데다 개인비리 같은 사소한 문제 자체도 없다고 말한 명문귀족이었다.[33] 메살리나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어머니로 브리타니쿠스의 외할머니였다.[34] 도미티아 레피다가 네로의 고모이므로 네로와는 고종사촌형제이며, 네로의 고종사촌형이다. 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클라우디우스의 황후였던 메살리나와는 이부남매 관계가 되며, 처남 브리타니쿠스가 혈연상 이부누나의 아들이므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과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가 된다.[35] 원로원과 황실 사람들 모두 기본적인 황실의 직계로 본 것은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로 이어진 혈통, 그리고 티베리우스와 그의 아들 소 드루수스,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이다. [36] 제5대 황제 네로와는 풀네임이 다르다. 네로의 경우, 양자 입적 후 즉위 전 공식 풀네임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이다.[37] 이 가문에서 배출한 교황만 3명(첼레스티노 3세, 니콜라오 3세, 베네딕토 13세)이고 추기경만 3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