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드루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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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대 로마의 초대 아우구스타. 남편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아들은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손자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증손자는 3대 황제 칼리굴라이다. 로마 제국 최초로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은 여성이며, 남편과 함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개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2]
법적 출신 가문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남동생은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에서 입양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였다. 그러나 리비아의 혈통적인 본가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가장 유력했던 로마 최고의 명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으며, 그녀와 친정은 입양된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보다 혈통적 본가(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를 자신들의 가문으로 여긴 것으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풀케르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나 영아때 입양된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였고, 어머니는 평민귀족 가문 출신의 아우피디아였다. 아버지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본래 아버지의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2. 생애
2.1. 출신 가문
본가와 양가 모두 로마에서 엄청난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며, 외가 역시 플레비스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평민 귀족 가문이었다. 양가이자 법적 출신 가문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쪽을 보면, 양할아버지는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였다. 그는 동맹시 전쟁 직전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개방하자는 법안을 내놓았다가 자택 근처에서 과격파들에게 살해당한 호민관이었다. 그런데 양할아버지의 아버지(리비아의 양증조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크게 반대한 골수 원로원파 핵심 의원으로 상당히 유명했다. 참고로 양할아버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생질은 세르빌리아(카이사르의 정부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레피두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장모였다.), 소 카토 등이었는데, 리비아의 아버지와 법적으로 사촌 관계인 소 카토 역시 공화주의자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혈통적 본가는 그 유명한 로마 최고의 파트리키 가문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최고로 자타가 인정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다. 리비아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영아기때 아들이 없었던 리비아의 양할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돼 리비우스 드루수스가문에서 자랐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자신의 양할아버지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판박이일 정도로 비슷했다. 그는 선출직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상당한 부자였고 키케로 등과 친분을 나누었던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직후 동료 원로원파 인사들과 함께 그리스로 건너갔으며, 필리피 전투 후 훗날 사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삼두군에게 항복을 거부하다가 체포 직전 공화정 수호를 외치며 자결했다.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슬하에 딸 리비아만 있어서 일찍이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차남을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그가 바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3] 였다.
2.2. 결혼과 이혼, 재혼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는 선출직 관직에는 당선도 되지 못한 일반 원로원 의원이었지만, 꽤나 보수적이면서도 명민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법적으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성, 특히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에서도 가장 위세를 떨쳤고 공화정의 상징과도 같았던 풀케르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여러 부분에서 친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는데 중점을 뒀고, 꾸준히 자신이 입양간 가문과 친가를 합쳐 새로운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에 온 힘을 쏟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자신의 딸 리비아 드루실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자마자, 자신과는 정치적 견해에서는 차이가 있고 딸과 나이차가 제법 나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시켰다.
리비아는 첫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중 장남은 훗날 로마 제2대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였으며, 차남은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이자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였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였다. 두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가까운 강요에 따라 이혼했는데, 기원전 38년에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할 당시에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다.
2.3. 황후
기원전 27년, 남편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로마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로마 여성들과 가정으로부터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평가받았다. 이후에도 그녀는 남편에게 여러 가지 특권과 명예 등을 선사받아 정식으로 정사에 관여할 수 있었다.
리비아는 젊은 시절부터 엄청난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본래부터 머리가 좋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정치력이 뛰어났다. 또 자제력과 참을성도 대단했고, 과감성도 갖추고 있어서 여장부로도 유명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녀에게 각종 명에와 특권을 내리고 자신이 부재중일 때 각종 행정을 수행하도록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리비아는 결혼 직후부터 공무로 바쁜 남편 대신 아우구스투스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모든 일들을 결정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가문의 중대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수장인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결정했다. 그런데 이런 그녀의 가정 안팎에서의 영향력은 다른 로마 귀부인들도 못 누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성향상 굉장히 드문 케이스였다.
리비아는 상술했듯, 결혼 직후부터 두 아들을 아우구스투스의 친양자로 입적시켜 공식적인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한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그녀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를 적극 후원했으며, 손자인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에 대한 후원도 상당했다. 하지만 리비아는 일찌감치 제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 막내손자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손자의 면전에 대고 ‘가문의 수치’라고 말할 정도로 냉담했다.[4]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까지 악녀 이미지가 생겨 아우구스투스 때 일어난 암살 사건에 관여했다는 낭설이 있으며, 심지어는 아우구스투스까지 독살했다는 루머도 있다.[5] 어쨌든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Augusta(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2.4. 장남과의 불화
그녀의 바람대로 장남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는데, 티베리우스가 즉위한 후에도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각종 권한을 행사해 아들과 황실 안팎에서 매일같이 대립했다. 두 사람은 친모자 관계임에도 냉랭했으며, 황태후 리비아와 아들 티베리우스의 불화는 서기 26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사실 티베리우스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리비아와 그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모자 사이의 관계였지만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고 티베리우스의 첫번째 결혼생활이 리비아의 입김으로 파탄난 뒤 티베리우스가 기원전 6년 은퇴해버린 3여년 간의 일련의 사건으로 과거와 달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내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 중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대 드루수스의 요절로 인해 본인의 피를 잇는 후계자 설계가 계속 어그러지고 있었다. 특히, 이 무렵부터 게르마니아 전쟁, 갈리아 속주 재편의 공로를 인정받은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간접적인 추천 아래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집정관 취임한 이후 임페라토르에게만 허용된 개선식[6] 을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개선군단들과 전선 시찰 중 낙마해 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의 요절은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일단 아우구스투스는 결혼 당시부터 리비아 뱃속에 있었던 대 드루수스를 친아들로 생각했고 무척 아꼈던 것으로 유명했다[7] . 이미 아그리파 급사 직후부터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자신의 외손자들이 있더라도 대 드루수스를 차기 황제로 낙점했음을 진지하게 실토할 정도였다. 아울러 그는 아내의 입김이 아닌 본인의 판단으로 친 아우구스투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기원전 9년도 집정관으로 입후보시키고 당선시킨 뒤, '대 드루수스 후계자 작업'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옥타비아(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사위 대 드루수스가 리비아의 소망대로 곧 차기 황제가 되는 것에 주력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대 드루수스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절규를 하며 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직접 말을 타고 국경까지 나가 며칠을 국경도시에서 대기하다가 양자의 관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자격으로 대 드루수스 유해의 장례절차를 집행하고 직접 상주까지 맡았다. 또 장례식 날에는 직접 추도사를 낭독하면서 눈물을 쏟았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된 양자의 무덤에 시를 바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대 드루수스를 그리워하는 시를 바쳤다. 이는 이 문서의 주인공인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의 경우 남편과 함께 죽을 때까지 아끼던 차남의 이른 죽음으로 심리치료와 상담까지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는 자신들의 상담역을 겸하는 스토아 학파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의 조언에 따라 대 드루수스의 전신상과 흉상들을 황궁 집무실, 침실 등에 놓고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매일같이 이야기하면서 차남의 요절을 극복했다고 한다.
사실 리비아는 상술했듯 권력욕이 상당했고, 자신의 핏줄이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가장 황제에 근접했던 차남의 요절 이후 굉장히 좌절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아그리파 사망 이후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동딸 율리아 재혼 문제에 개입해 이를 기회로 삼아 본인의 친아들 티베리우스를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은밀히 부추겼다. 이때 리비아는 공과 사를 구분해 자신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에게는 따뜻했던 남편에게 티베리우스의 이혼과 재혼이 정치적인 문제이며 후계자 문제와 관련된 공적인 문제라고 계속 설득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행복하게 결혼 생활 중인 리비아의 장남 티베리우스에게 황제의 명령으로 강제로 이혼하라고 하면서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외동딸인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피를 가진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내 빕사니아와 연애결혼을 했고, 애처가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이 당시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으며, 어머니 리비아는 애당초 새로운 후계설계의 흑막이라서 자신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아들에게 오히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따라서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일방적인 명령을 뒤집을 수 없었던 티베리우스는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강제이혼 후에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거리에서 우연히 전 아내 빕사니아를 만났는데, 빕사니아가 티베리우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자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리비아의 바램과 달리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결혼생활은 율리아의 불륜, 리비아와 율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과 고부 갈등 등이 표출되면서 흔들리더니 이 결혼에서 태어난 티베릴루스가 요절하면서 완전히 끝장나게 되었다. 그리고 차기 황제로서 호민관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 야반도주하듯 로도스 섬으로 떠난 뒤 일방적으로 은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당시 리비아는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간 뒤 은퇴선언을 한 직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대리인 자격을 하사케했고, 이후 남편을 설득해 함께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를 추진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소 드루수스의 성년식 참석을 이유로 7년 뒤 복귀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모자 관계는 냉랭했다.
티베리우스 입장에서, 어머니 리비아는 본인의 친부를 결과적으로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를 택했으며 본인 역시 그녀로 인해 끊임없이 인생의 발목을 잡혔으니 그리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양된 이후에도 모자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은 있었고,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즉위한 이후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게 되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친어머니 리비아와의 대립 끝에 결국 양아버지 생전에 누린 각종 특권을 박탈했다. 이때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수장 자격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통해 율리우스 가문에서 영향력을 보장받고 행사할 수 있게 된 어머니의 가문 내 특권까지 누리지 못하게 했다. 이후 리비아는 손자와 두 증손자가 세야누스의 음모로 희생되는 일을 겪었는데, 게르마니쿠스의 막내 아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음모에서 보호하고, 돌보며 함께 살았다고 한다.[8]
2.5. 사망
리비아는 노환으로 29년, 향년 86세의 나이에 사망했는데, 그녀가 죽자 아직 미성년자였던 증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율리우스 가문 대표로 로스트라에 올라 그녀의 업적과 인품 등을 기렸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리비아의 유언장 집행도 무시했다. 따라서 그녀는 아들 티베리우스 생전에는 복권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증손자 칼리굴라가 즉위한 뒤 그녀의 유언이 집행되고, 명예가 회복됐다. 이후 손자 클라우디우스 때 완전히 복권되고 신격화되었다.
3. 대중매체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ROME 등 창작물에서는 첫 남편과 이혼한 것도 옥타비아누스의 권력을 좇아간 것으로 묘사되는 등 냉혹한 권력욕의 화신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해지는 아우구스투스를 몰아치고, 친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가 공화정 복귀의 뜻을 품은 것을 알자 단호하게 독살하며,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자 티베리우스에게 의심병을 불어넣어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씨앗을 뿌린다. 주인공 클라우디우스의 첫사랑 여인을 독살한 것도 리비아. 하지만 말년에는 권력의 무상함과 주변인들에게 모두 배신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죽으면 타르타로스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떠는데 이때 과거의 원한을 잊고 리비아를 유일하게 위로해준 클라우디우스의 진가를 알게 되고 클라우디우스에게 용서를 빌며 자신을 신격화해서 타르타로스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디우스는 제위에 오른 후 약속대로 리비아를 신으로 받들어 모신다.
ROME에서는 2부 후반부에 등장. 옥타비아누스의 냉혹함과 정치적 계산에만 입각한 행동에 불만을 품던 시어머니 아티아 및 시누이 옥타비아와 사이가 매우 나쁘다. 물론 시리즈 자체가 옥타비아누스의 임페라토르 즉위까지만 다루는 작품이므로 그 이후 이들 간의 관계가 더 그려지지는 않는다.
https://www.flickr.com/groups/734740@N25/ 에 가면 리비아를 묘사한 역사적인 자료들 (석상, 그림 등등)을 확인할 수 있다.
4. 성격 및 평가
당대 사람들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도미티아누스 시대 역사가 겸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의 공통된 평가에 따르면, 리비아 드루실라는 '''보수적인 어머니이자 여장부'''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황실 권력의 어둡고 잔인한 면모도 갖춘 악녀로도 세간에 비춰졌다.
리비아 드루실라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한 외모를 가진 미녀였고, 부유한데다 성격적으로는 양친 모두 명문가 출신답게 출신가문들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다. 이는 공화정 후기, 원수정 초기의 최상류층 로마 귀부인들과 비슷한 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교양이 풍부했으며 곱게 자란 명문가 출신답지 않게 의지력도 엄청 대단했다. 하지만 리비아는 동시대 또래 여인들이나 의붓딸 율리아, 손자며느리 아그리피나 등과 달리 사생활적으로 애인을 두거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패거리를 만들고 스폰서 형태의 그 비슷한 관계조차 맺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9] , 선동정치가 클로디우스의 누나이자 메텔루스 켈레르의 아내 클로디아[10] 등 공화정 말 영향력이 상당했던 여걸들처럼 꽤나 활동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미지와 달리 놀라울 정도로 상냥하면서도 가정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리비아는 젊은 시절부터 손수 아이들을 양육, 훈육했던 전통적인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당시 로마인들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이탈리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가부장적이고 절대적인 아버지의 전형이었던, 남편 아우구스투스는 그런 아내를 내전 당시부터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이며 모사꾼으로 생각했고, 로마 세계의 일인자가 된 이후에도 실제로 많은 부분의 결정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타키투스는 리비아를 "가정적인 부분에서는 구식이었고 구세대 로마인 여성답지 않게 상냥했다"고 말했는데, 당시 로마인들도 리비아를 마찬가지로 생각했고, 로마와 이탈리아 일반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아우구스타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보수적이면서도 가정적인 스타일에 열광했다. 따라서 원로원과 상류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은 그녀를 전통적인 로마인 가정의 어머니로 봤다. 또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그녀에 대해 "명민한 남편과 냉담하고 매정한 아들을 두고 있음에도 한 가문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 모범적이었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리비아 드루실라는 동시대와 후세 로마인들에게 전제적인 어머니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이 뜻은 그녀가 여타 로마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집안에서 가부장 못지 않은 권한과 지위를 유지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굉장히 보수적인 로마의 가부장답지 않게 많은 특권들을 부여해줬고 리비아는 이런 권한들을 적극 활용했다.
이외에도 그녀는 타고난 머리 회전과 명민함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엄청난 수준의 참을성과 과감성, 그리고 의지력과 관대함에 대해서 매우 높게 평가받았다. 사실 그녀의 남편 아우구스투스는 절대권력자가 된 이후 좋은 부분이 강조되고 많이 신격화되었다고 해도, 여성편력과 바람끼는 친딸 율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양부 카이사르와 비슷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리비아와 재혼한 직후부터 친구 마이케나스의 아내 테렌티아를 정부로 뒀고, 미소녀들을 데리고 수 많은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리비아는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었고, 늘 남편과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리비아 드루실라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명민함, 참을성을 인정하면서 그녀가 아우구스투스의 여성편력을 견딘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반면, 리비아는 오늘날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알 수 있듯 악녀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렇게 평가받은 가장 큰 이유는 이 당시 오직 리비아가 가지고 있었고, 그녀만이 남편에게 보장받았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카이사르 가문) 내에서 누린 수 많은 특권들과 로마 최초의 아우구스타라는 직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 외에도 리비아는 실제로 자신의 명민함과 정치적 감각 등을 두 아들과 손자들이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지위와 특권을 물려받는 것에 집중했다. 또한 리비아는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모임에서 패거리를 만들기 보다는 본인의 명민한 두뇌, 정치적 감각과 결단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본인의 능력을 활용해 눈칫껏 행동하는 아우구스타였다. 즉, 손자며느리 대 아그리피나, 증손녀 소 아그리피나와 달리 파벌을 만들어 뭔가 일을 꾸미기 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한과 지위를 통해 힘을 행사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살아있을 당시부터 악녀 이미지를 반대파들에게 얻었고, 후대인들에게 이런 행동들은 영악하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오게 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대부터 리비아 드루실라는 황실 내 분쟁과 모든 음모가 언급되고 거론될 때마다 만악의 근원 내지 흑막으로 의심받았고, 아들 티베리우스 시대가 열린 무렵에는 "아들의 빠른 즉위를 위해 남편을 독살했다"는 둥의 도시괴담 이야기의 흑막 내지 모든 악행을 저지른 악녀라고 평가받게 됐다.
[1] 이집트의 파이움(Fayum)에서 출토, 기원전 27~23년의 원본을 4년에 복제한 것으로 추정됨.[2] 남편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 가문과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결합된 세습왕조이다. 당대 로마인들조차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라고 여길 정도로 두 가문은 상호 간의 입양, 결혼 등으로 이어졌는데, 이 왕조의 가계도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더불어 복잡하기로 상당히 유명하다.[3] 본가와 양부의 가문 모두 원로원파였지만, 양누나 리비아의 남편인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다. 그는 집정관까지 역임했고, 아우구스투스 치세때 황제가 선정한 사제, 올림픽 집행위원 등에 올랐다. 그의 친고모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를 낳은 스크리보니아였다.[4]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를 감싸거나, 자신의 양손자가 얼마나 훌륭한 기품과 재능을 가진 아이인지 칭찬하는 글들을 보냈다.[5] 아우구스투스가 독을 탄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싱싱한 무화과만 따먹자 리비아가 나무에 매달린 과일에 독을 칠했다는 얘기. 하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독살설과 더불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살해의 배후는 사실 리비아 드루실라일 거라는 주장이 당대 호사가들에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6] 약식 개선식으로 대 드루수스의 생애 첫 개선식이 로마에서 치뤄질 예정이었다고 하며, 이는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했던 티베리우스와 매우 다른 결정이었다고 한다.[7] 이미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당대부터 있었을 정도였다.[8] 티베리우스에게 각종 특권을 박탈당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의 영향력은 상당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세야누스 일당조차 어린 칼리굴라를 제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9] 첫 남편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두 번째 남편은 쿠리오, 마지막 남편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10] 리비아 드루실라의 혈통적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클로디우스 플크루스) 집안 출신이므로 리비아와는 혈연상 친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