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시아누스

 



[image]
'''휘'''
Titus Flavius Vespasianus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출생지'''
로마 제국 팔라크리나이
'''생몰년도'''
9년 11월 17일 ~ 79년 6월 23일
'''재위 기간'''
69년 7월 1일 ~ 79년 6월 23일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2. 내전 수습과 유대 전쟁 종결
2.3. 내정 개혁
2.4. 사망
3. 여담
4. 평가


1. 소개


고대 로마 제국의 제9대 황제.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조이자, 콜로세움 건설을 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출생지는 사비니 리에티이며, 최초의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 로마 황제이다. 네로의 자살 이후 세 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극도로 혼란스럽던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69년 공식적으로 황제에 등극했으며, 제위 계승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 이전까지의 로마 제정 세습 체제를 확고히 했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AD 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비니 지방의 레아테 근처의 작은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기사계급 출신이다. 그의 조부는 경매업자였고, 부친은 소아시아 속주에서 세금징수원을 지내다가 퇴직 후 라이티아 속주(오늘날 바이에른 지역 일부와 스위스 동부)에서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던 사람으로 이 직업들로 돈을 번 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 후 정착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가는 사비니 일대에 과수원, 경작지 등을 갖춘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나름 유복했고,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교양인의 척도 중 하나였던, 모국어인 라틴어 외에도 그리스어 역시 상당한 수준을 구사할 수 있었다.
모친 베스파시아 역시 기사계급 출신이며, 위로는 형이 한 명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 가문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했으며, 36년 트라키아 속주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했다.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 때인 37년,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먼저 공직에 몸담고 있던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1]를 따라 자연스레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조부, 부친이 모두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까닭에 일찍부터 재무와 관련된 직무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고, 성격이 워낙 꼼꼼해서 복무지였던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훌륭한 공적 경험을 쌓았다. 이후 39년 안찰관에 추천받아 이 관직을 지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실제 재무와 군무 모두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선보여, 기사계급 출신 중 평이 안 좋은 징세업과 고리대금업 집안 출신임에도 40년 법무관에 올랐다.
법무관이 끝난 직후인 41년 1월, 당시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근위대장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암살됐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자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옹립돼 황제에 올랐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갓 즉위한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참모 3인방 중 한 명인 나르키수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신임받는 해방노예 여성 카이니스의 천거로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제2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됐다. 이때 카이니스와 인연을 맺어 카이니스가 죽을때까지 사실상 부부로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무수한 행정, 군사적 경험들을 쌓았으며,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 등으로 두 황제에게 인정받고, 여러 공직을 거친 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됐다. 이후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장군으로 상당한 공적을 쌓으면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네로 시대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잠깐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왜냐하면 네로 치세 때 시 낭송회에서 네로가 시를 읊는 도중에 잠을 자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잠시 네로의 진노를 얻어 목숨을 겨우 건진 채 섬으로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지에서 양봉으로 소일하기도 했다.[2] 하지만 이 사건 외에는 네로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아서,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재등용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즉위 전까지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다. 따라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계속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다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명장 코르불로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된 이후,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 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쪽의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다를 무리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 무키아누스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2.2. 내전 수습과 유대 전쟁 종결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네 황제의 시대라고 불리는 네로 후기와 세 황제의 난립기로 인한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진력하였다. 비텔리우스파의 난동으로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고 방만한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유지 재측량 작업으로 상당한 국고수입 증대를 이뤘다(그 과정에서 공중변소의 오줌[3]에까지 세금을 물린 탓에 비웃음을 받기도 했지만...)[4] 재정수입의 증대 덕에 그의 아들들 대까지 콜로세움과 같은 공공 건축 사업을 원활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비텔리우스 즉위 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로 터진 게르마니아 반란, 오늘날 벨기에에서 시작돼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는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에게 두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내렸는데 그는 손쉽게 두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5]
서방에 이어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 후, 후임으로 유대전쟁을 총괄한 황제의 장남 티투스의 손에서 마무리되어갔다. 로마군을 이끌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부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전쟁은 양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었고,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은 로마에 저항한 본보기로 예루살렘 신전 등이 모두 약탈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2.3. 내정 개혁


베스파시아누스는 한평생을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제정을 공식적인 제도로 만들고 공화정을 부인하는 등 선은 분명하게 그었다.) 반대파들을 억누르기보단 설득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원로원과 관계가 완만했고 이들의 위상과 자부심을 존중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원로원을 서서히 약화시켜나갔다. 당시 네로 사후 혼란기동안 당시 원로원 수는 2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무려 800명의 인사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충원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사실상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리비우스 왕조에 협력적인 인사들로 자연스레 교체됐다. 이처럼 원로원을 약화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제국 행정부를 강화시켜나갔다. 이 조치는 내전을 치루면서 항구적인 행정을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으며, 과거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동안 관료층을 서서히 차지하던 해방노예 출신들을 다시금 밀어내고 기사계급으로 채워넣는 조치이기도 했다. 또한 개국 공신이지만 자체 군사력이 있어 한편으로는 권신이 될 우려가 있었던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에게도 명예직을 주어 자연스럽게 은퇴시키는 방법으로 퇴장시켰다.
이런 내정 개혁 중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후세까지 큰 명성을 가져오게 한 개혁은 재무행정 분야였다.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황제에게 재무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던 사람답게 그는 네로의 사치와 내전기 혼란으로 바닥난 국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본래부터 꼼꼼하고 검소한 사람답게 그는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등을 부과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네로 시대 이후 박살난 나라살림을 재건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세수의 기본이 되는 인구, 재산 조사를 실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횡령을 적극 색출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6]. 하지만 속주들에게는 새로 만든 세금들을 적극적으로 부과했다.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여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유지한 것이다.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가장 만만한 게 속주세였다고 할 수 있다.

2.4. 사망


70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된 직무를 지속해오다 열병에 걸려 쓰러진 뒤 눈을 감았다. 그가 쓰러질 당시 후계자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기에 뒤는 이름이 똑같은 장남 티투스가 이어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소 촌철살인 농담을 즐기던 황제답게 임종 직전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여보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7]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서서 죽어야 한다며 죽기 직전에 병상에서 억지로 일어나다가 시종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3. 여담


  • 상당히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농담을 즐겨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황제가 된 이후의 습관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모두를 웃게 만들 수 있었는데, 모국어인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모두를 웃게 할 정도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잘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어로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였다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그리스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증거이며,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배운 교양인이라는 증거 중 하나라고 한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남긴 명대사가 꽤 많은데 대표적인 말로는
> "나는 개가 짖는다고 해서 개를 죽이진 않소."
라는 발언이 있다. 이때부터 그가 그렇게 한 방 먹인 철학자들은 견유학파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지만 디오게네소스가 살 때부터 자신은 '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고 영어 단어로 냉소적임을 뜻하는 씨니컬 또한 그리스어로 개 같다는 뜻이다. 견유학파가 세상에 냉소적인 삶을 살며 자신들은 개 같은 삶을 산다고 했기 때문에 냉소적임이란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디오게네소스의 무덤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개를 조각했다고 하는데 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인물이니 견유학파의 유래는 적어도 베스파시아누스보다는 위로 올라간다고 봐야한다. 시오노 할매가 로마 황제를 띄워주기 위해 흘러다니는 일설 중 하나를 택한 듯.
  • 탈무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대 반란 당시 벤 자카이란 이름의 랍비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 황제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작은 학교라도 좋으니 이를 세우고 그것만은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한 뒤 예루살렘 전체를 파괴하되 벤 자카이와의 약속대로 조그마한 학교는 남겨두어서 유대인들의 전통과 지식을 지켜나갔다는 내용이다. 위의 요세푸스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유대인들에겐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 벤 자카이는 포위된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에 숨어서 나왔다. 로마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항전하던 강경파는 관을 들춰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차마 랍비의 시신을 모독할 순 없다며 그냥 보내줬고, 로마군의 경우 실제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관을 가지고 온 제자들이 '당신들의 황제께서 돌아가셔도 이런 짓을 할 거요?'라고 반대해서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야기.

4. 평가


베스파시아누스는 사상 최초로 수도 로마가 아닌 지방 출신의 황제였고, 이는 이후에 로마 황제의 출생지에 대한 로마 제국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어 나중에 가면 속주 출신 황제들도 나올 정도가 되게 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리 집안의 차남으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모국의 다큐에서는 이 사람과 네로를 비교하면서 네로가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오페라 관람을 하는 속물이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맥주 마시면서 축구 구경을 하는 건실한 평민적 남성이라고 했다. 틀린 건 아닌 거 같은 게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졸아버린다'''든가 재위 중에 축구장만 한 콜로세움을 착공한다든가...
다만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등 세수를 알뜰히 증대한 탓에 시민들에게는 다소 짠돌이 황제로 인식되었는지,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풍자하는 희곡이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베스파시아누스 본인의 장례식에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8]가 들어갔다고 하자 죽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놀라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그 돈 중에 1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날 주고 내 시체는 그냥 티베레 강에 던지지 그랬어'''"라고 하는 내용의 희곡이었다.[9] 그럼에도 황제 티투스는 그 희곡이 상연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고. 티투스는 상당히 관대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였다.

[1]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아 로마 시 장관을 지낸다.[2] 사형이나 다름없는 자살강요까지 받을 수도 있었던 위기를 구해준 것이 페트로니우스로 네로에게 "오르페우스는 하프 연주로 케르베로스를 잠들게 했는데, 폐하는 시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했으니 이는 오르페우스의 업적과 맞먹는 것입니다"라고 '''살짝 야유가 섞인 칭찬'''으로 네로의 분노를 풀어주어 베스파시아누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3] 단, 오줌 누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오줌을 수거해서 표백이나 세탁 등에 쓰는 업자들에게 오줌 사용료를 내라는 의미다. 이때 아들인 티투스가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는데 그의 앞에서 금화를 보여주며 '배뇨세금으로 만든 이 금화에 냄새가 나냐?'라고 한마디 했고 여기서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한다. [4]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이라는 뜻이라고. 실제로 이탈리아어 사전에 vespasiano라고 찾아보면 '(남자용) 공중변소'라고 나온다.[5] 키빌리스의 반란은 초기에는 군단장 보쿨라는 전사, 군단장 루페르쿠스는 포로로 잡혀 인신공양을 당하는 등 고전했으나 결국 반란의 근거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탈환하여 진압했고 키빌리스는 로마 영토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벨기에에서 일어난 켈트족 반란의 경우, 일찍부터 로마화되고 난 이후부터 로마 주류사회로 편입되어가던 갈리아 속주 내 켈트인들의 무관심으로 호응도 크게 못 얻고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6] 이는 불필요한 공공지출에 관한 내용일 뿐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 경비, 사회 인프라, 교육 분야에서의 공공지출은 확대했다.[7]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고대 로마 황제들은 대부분 사후 신으로 추앙되었다. 예외는 내전에서 패한 이들(베스파시아누스 이전의 내란기의 3명)이거나 동시대의 원로원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들, 그리고 생전에 자신이 거부한 경우(티베리우스 외)가 있었다.[8] 현대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 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물론 아무리 황제의 장례식이라도 실제로 이 정도의 돈이 들었을 리는 없고 풍자를 위한 과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9] 참고로 고대로마나 교황령 시절 로마에서 티베레 강에 던진다는건 '''부관참시급 형벌'''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