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1세

 




'''로마 제국의 4대 황제
Claudius | 클라우디우스
'''
[image]
'''TIBERIVS CLAVDIVS CAESAR AVGVSTVS GERMANICVS'''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가이우스[1]
'''후임'''
네로
'''신상 정보'''
'''제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이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출생'''
기원전 10년 8월 1일
갈리아 루그두눔
'''사망'''
54년 10월 13일 (63세)
이탈리아 로마
'''재위'''
로마 제국의 황제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배우자'''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9년 결혼 / 24년 이혼)
아일리아 파이티나 (28년 결혼 / 31년 이혼)
발레리아 메살리나 (38년 결혼 / 48년 사망)
소 아그리피나 (49년 결혼)
'''자녀'''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어머니'''
소 안토니아
'''형제'''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
2.3. 내정 개혁과 관료제 구축
2.4. 사회, 경제 정책과 오스티아 항구 건설
2.5. 영토 확장과 브리타니아 원정
2.6. 메살리나와 소 아그리피나
2.7. 사망
3. 평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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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4번째 황제. 제위에 오르기 전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역대 로마 황제 중 최초로 카이사르(CAESAR)를 황제 개인 성씨가 아닌 황제 자체를 뜻하는 명사로 사용한 로마 황제이다. 하지만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도 클라우디우스를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라고 정의해 강하게 즉위를 반대하면서 한 집안 사람임을 강조하며 회기 내내 갑론을박을 펼쳤고[2], '''본인과 당대 로마인 모두 오늘날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모두를 같은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집안 사람이 무턱대고 정통성을 위해 취한 제호는 결코 아니다. 아울러 클라우디우스 본인도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종손이자 소 옥타비아의 친손자'''인데다, 네로 시대때 소 아그리피나, 네로 탄핵 당시 이를 주도한 원로원과 군대가 공개적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하나라는 것을 강조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로 언급'''하면서 '''혈통상 같은 집안 사람'''[3]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또 황제 본인 역시 즉위 당시부터 이 부분을 꾸준히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다른 가문에서 나온 황제로 분리할 이유도 없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두 가문은 하나의 새로운 가문, 즉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손들의 왕조도 하나로 묶여 기록되고 있다. 또한 그는 루그두눔(리옹)에서 태어난 까닭에 '''로마 황제 중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로마제국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동복동생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4]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小) 안토니아[5]이다.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은 아버지 드루수스가 큰형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에서 따온 이름이며, 친할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리비아와 나눈 편지에서 그를 언급할 때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를 포함한 황실 식구들은 그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자신의 ‘손자’라고 말하며 생전 내내 엄청 신경쓴 것으로 로마인들에게 유명했다. 친형은 제정 시대 로마인들의 아이돌로 찬사를 받은 게르마니쿠스, 친누나는 리빌라(리비아)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3명 중 막내이다. 그는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숙부로 칼리굴라 생전 로마 시민들에게 황숙이라고 불렸으며, 5대 황제 네로에게는 혈연상 외종조부이다.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클라우디오라고 한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글라우디오'라고 나오는데, 이는 라틴어 인명의 탈격이다.[6]
성경 사도행전에서 바오로가 총독 페스투스와 아그리파 왕 앞에서 "카이사르에게 재판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바오로가 말하는 카이사르가 바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아버지 대(大)드루수스의 임지인 루그두눔(현재 프랑스 리옹)[7]에서 5남매 중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게르마니쿠스, 누나 리빌라가 있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잃었고,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는 가늘었고 평생을 절었다. 또 고개가 자주 흔들리고 간혹 침을 질질 흘렸으며 왼쪽 팔에 문제가 있게 되는 장애를 가지게 됐다. 이런 장애는 움직일 때만 뚜렷했고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의 여러 묘사를 보면 단순한 소아마비가 아니라 뇌성마비의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BBC에서 만든 드라마에서는 뇌성마비설을 채택해서 배우가 실제 뇌성마비 환자의 행동을 연구해서 실감나게 연기할 정도이다.
여러 기록에서 나오듯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처럼 상당히 매력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키가 컸다고 한다. 그럼에도 군 복무를 해야할 로마 상류층, 특히 최상류층인 황실 사람에겐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황실 내 남녀노소에게 무시당했다. 황실 사람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되도록 바깥 출입을 자제시키려고 했고, 많은 부분을 가문의 해방노예 및 노예들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따라서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는 항상 정상이 아닌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배냇병신 같다며 집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가 누군가에게서 ‘훗날 자신의 동생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자, 큰 소리로 “로마인들에게 그런 잔인하고 부당한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까지 드렸다.
남편을 일찍 잃은 어머니 소 안토니아 역시 친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상당히 쌀쌀맞았다.[8] 그녀는 친아들 클라우디우스를 “괴물”이라고 하거나 “자연이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종종 무시했으며, 모자라보이는 누군가를 언급할 때 걸핏하면 '내 아들 클라우디우스처럼 멍청한'이란 말도 퍼부었다. 또 전갈을 보낼 때도 게르마니쿠스, 리빌라에게 보낼 때와 달리 짦고 간결하게 비난을 퍼부을 정도로 막내 아들에게는 정을 많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 내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하지 않고 잘 챙겨줬다. 인격자였던 친형 게르마니쿠스는 원래부터 밝고 다감한 성격답게 몸이 좋지 않은 동생을 누구보다 끔찍이 챙겼다. 그는 진심으로 클라우디우스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귀족아이들이나 동맹국 왕자들이 친동생을 무시하거나 괴롭힐 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지켜줬고, 놀이 친구가 많이 없는 동생의 놀이 친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군복무 중 로마를 방문해 잠시 머물 때에도 클라우디우스를 챙겼다. 이런 다정다정한 모습은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편집적으로 자신의 혈육을 아꼈던 그는 누나의 친손자이자 자신의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실 내 또래 남성 황족 만큼이나 상당히 신경썼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차갑고 가부장적인 모습과 달리 어떻게해서든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상류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자리잡도록 신경쓰고 고민했다.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과 전갈에서 언급했듯이, 티베리우스와 함께 자신의 몇 안 되는 혈육 클라우디우스의 미래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진심으로 클라우디우스를 걱정해 리비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외종손의 미래를 상당히 신경썼다. 아내에게 편지를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와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내린 결정이 힘들고 어려웠소이다.”라고 알렸는데, 이때 그는 리비아에게 “나는 걔가 형[9]처럼 공직의 단계들을 밞는 것을 반대하지 않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귀족들이 클라우디우스를 희롱하거나 멸시하는 것을 걱정하고 육체적 문제로 대중들에게 놀림거리나 비아냥거리가 되는 것에 걱정해 마르스 축제 때 황실석에서 키르쿠스 경기를 보는 것에는 반대했다.
또 리비아에게 편지를 통해 양손자 클라우디우스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좋은 행실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아테노도루스, 술피쿠스 같은 사람들보다는 자신과 매일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생각임을 알리기도 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황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와 매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비상함과 재능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손자의 역사에 대한 흥미 등을 일찍이 알고 난 뒤, 자신의 친구였던 당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10]를 스승으로 삼게 해서, 그가 하고 싶은 역사공부를 실컷하게 해주었다.[11] 아울러 그에게 가문의 지원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주며 역사학 외의 다른 학문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줬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할아버지의 이런 지원과 격려 속에서 일찍이 역사가로 명성을 쌓을 수 있었고 법률, 지리학, 의학 등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지게 됐다. 이런 연유로 즉위 전까지 클라우디우스는 본인 이름으로 출판도 하는 전문 역사가로도 명망을 얻었다.
손자를 수치로 여기며 비난하는 리비아에게 아우구스투스는 편지를 통해 “그 아이가 진지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때면 매우 훌륭한 기품을 보여준다”고 칭찬했고, 엉뚱한 말만 하는 줄 알았던 양손자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그렇게 잘할줄 몰랐다면서 자신에게 아주 큰 기쁨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 보좌 사제, 복점관 외에는 군과 관련된 경력이나 뚜렷한 공직, 명예를 수여해주지는 않았다.[12]
연장자인 큰아버지, , 사촌형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 일찌감치 입양되면서 어린 나이에 로마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결혼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율리우스 가문에 단단히 묶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중요한 명문가였던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맥을 이을 인물 역시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클라우디우스는 명문가의 수장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었기 때문에 즉위 직전까지 이탈리아 내 기사계급들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들의 의견을 듣고 귀족들과 황제에게 그 의견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게 됐는데 양쪽 모두에게 평가가 좋았다. 그러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 시대에도 아우구스투스 생전 때처럼 티베리우스의 반대로 군과 관련된 공직 경험이나 공적 명예를 받지 못했다.[13]
따라서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정치적 경력을 쌓으려는 꿈을 접고 교외의 저택과 캄파니아 별장 사이를 오가면서 남들의 이목에 벗어난 삶을 보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그는 술과 도박에 탐닉한다는 뜬소문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4] 신체적 결함 때문에 권력계승 구도에서 배제된 것에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황실 내의 음모에서 안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 드루수스, 율리아의 자손들, 게르마니쿠스의 자손들이 유배와 처형, 의문사를 당할 때, 아우구스투스 혈육 중 성인이 된 남성 황족임에도 클라우디우스는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생전, 클라우디우스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명문가의 수장이 되었고,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로마사, 에트루리아사, 카르타고사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골동품 수집가이자 골동품 감정사로도 명성이 자자해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를 먼저 찾아왔다.[15] 여기에 더해 그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형 게르마니쿠스의 후광으로 젊은 시절부터 이탈리아 내 평민들에게도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대중들의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카였던 칼리굴라가 즉위한 이후, 조카의 도움으로 그토록 원하던 공직 경험도 한때나마 경험하게 됐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그토록 원했던 집정관(콘술)을 잠시나마 경험했으며, 2달간 함께 한 동료 집정관은 친조카이자 황제인 칼리굴라였다. 종종 조카를 대신해 황숙 자격으로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를 주관해 성공리에 개최했다. 물론 이때 조카에게 식사자리에서 종종 농담거리로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16] 클라우디우스는 처음 콘술이 되었을 때 4년 뒤 다시 콘술 자리를 약속받았다. 또 공식석상에서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아서 “황제의 삼촌이시여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말도 들으며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는 짦은 재위 기간 내내 황숙 대우를 훌륭히 해줬다.[17] 그래서 칼리굴라는 삼촌이 억울하게 죽은 친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이 사업을 진행시키도록 해줬다.[18] 또한 그는 두 여동생과 달리 삼촌의 재산을 뺏거나 금고형, 유배형 같은 처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칼리굴라는 삼촌의 생애 두 번째 집정관직을 약속해준 것 외에도 자신의 황실 내 입지를 강화시키고 율리우스 가문과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을 모두 높이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세번째 결혼을 직접 중매까지 해주고, 적극적으로 삼촌을 후원해줬다.

2.2. 즉위


41년 1월 24일 근위대가 조카 칼리굴라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도 암살 현장인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에 있었는데,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지시라고 한 까닭에 헤르마이움이라는 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중 소식이 전해졌고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이 칼리굴라의 숙부기에 죽겠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커튼 뒤에 숨었다. 그러다가 황제감을 찾기 위한 군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숨어 있을 당시 발이 커튼에 보여서 걸리게 되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병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다가 뒤늦게 자신을 모시러 온 것을 알고, 근위대와 함께 자택에서 나가서 그들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추대된다.[19]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의 칼리굴라의 암살 직후 상황을 살펴보면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 건물이 아니라 유피테르 신전으로 모였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공화정 복구를 위해서 모였고 때문에 (즉위는 하지 않았지만) 로마 제정의 시초였던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온 원로원 건물을 쓰지 않았던 이유다.(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칼리굴라편 60장) 그 외에도 (공화정 지지자였던) 집정관이 원로원의 지원하에 포룸 로마눔과 유피테르 신전을 군대로 장악한 상황이었다.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클라우디우스편 11장)
당시 칼리굴라 암살에는 직접적인 암살가담자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외에도 해방노예 칼리스투스, 원로원 내에서 영향력 있는 여러 명의 원로원 인사들, 두 명의 근위대장을 움직일 수 있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황제의 동선을 관리하던 황실 관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이들은 계획에 따라 결점 많고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황제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황궁으로 불러 가둔 뒤, 칼리굴라 일가의 학살을 마무리한 직후 그에게 황제 자리를 줬다. 그래서 조카 칼리굴라가 암살되어 율리우스 가문의 직계가 끊기게 된 이후, 결국 그가 제위에 오름에 따라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처음 즉위했다.[20]
'''비록 즉위 자체는 엉성했지만 즉위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양할아버지가 일찍이 그를 판단한 것처럼 상당히 치밀하고 날카로운 행보를 보여준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 복귀 세력이 공화정 복귀를 시도했고, 집정관이 수도경비대를 이용해 로마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클라우디우스는 패닉상태에서 근위대 병영으로 이동했는데, 병영 도착 이후 차분하고 냉정한 행동을 보이며 근위대 병사들을 설득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병영 안에 들어온 직후 황제로 공포되자마자 그들을 설득하면서, 근위대의 마음을 확실히 잡기 위해 병사 개인 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하사했다. 그래서 근위대에게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근위대에게 명을 내려 국법에 따라 칼리굴라와 그 일가의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을 인도받았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가 근위대에게 충성을 서약받은 직후 사실상 구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황제를 암살한 죄로 체포돼 즉시 처형됐는데, 이중 율리우스 루푸스는 자살했다. 동시에 그는 로마민중들을 대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명예와 공훈을 행사 등을 통해 알리며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뒤, 근위대를 이용해 로마와 이탈리아 내 모든 정보를 보고받았다고 한다. 이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없다시피한 정치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조카 암살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내의 혼란을 잠재웠다. 또 공화정 세력의 위협은 억누르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업적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제정 우호 여론을 퍼트린다.
이때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 지길 기다렸다는 듯, 계획대로 신속히 움직였다. 원로원은 평소와 달리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렸는데, 이들의 회의 내내 주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카이사르 가문 남자는 절대 안 된다.”였고 과거 공화정 시대로의 회귀 여론이 들끓었다. 아울러 당시 집정관이 수도 경비대를 이용해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일대와 유피테르 신전을 장악한 뒤 원로원이 보조를 맞췄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공화정 복귀 분위기가 현실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바램과 달리 칼리굴라의 뒤를 잇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근위대를 장악한 뒤 황제 암살범과 이에 동조한 근위대 내 대대장 등을 모조리 반역죄로 체포해 처형시킨 상황이었다. 또 원로원은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은 안 되지만, 우리들이 내세울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가 벌어진 탓에 상황파악 역시 제때 하지 못했다.
따라서 수도 경비대를 장악한 원로원은 이런 논의 끝에 자신들의 권위를 지킬 요량으로 클라우디우스와 근위대에게 사절을 보내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의 유일한 최정예 부대인 근위대는 애초부터 원로원과 칼리굴라 암살을 비밀리에 주도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들 스스로 정치적으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또 그들이 옹립한 클라우디우스가 개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준 까닭에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수도 경비대를 동원해 항복하라고 요구하는 원로원은 그들에게 아니꼬운 존재였다. 그래서 근위대는 원로원의 서한이 공개된 직후 오히려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지지를 더욱 확실히 했다. 여기에 더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파 인사들과 클라우디우스의 개인 고문들은 원로원 내 논쟁에 참여해 싸우기 보다는 새 황제 밑으로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의 경고성 서한을 무시할 것을 조언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움직여 명백한 반역행위를 펼치는 원로원 전체를 끝장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의 무력수단으로 앞세워질 것이 분명해진 수도 경비대는 원로원을 내팽겨친 뒤, 근위대와 마찬가지로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 원로원은 몸이 불편하고, 경력도 짧은 집정관 경력 외에는 전무한 클라우디우스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친혈육이고, 사람 자체도 온화하고 성품이 나쁘지 않아서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의 생각 이상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그는 아버지와 형의 후광으로 제국의 주력인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던 황족이었다. 따라서 이미 로마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근위대를 장악해 통제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상술했듯 고문들의 권고에 따라 무장상태의 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에 찾아갔다. 이때 그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복귀에 따르겠다는 의사표시 대신 존중하겠다고 언급했으며, 이 사태를 갑작스럽고 있어서는 안 될 반역행위로 재규정하면서 자신이 암살범 카이레아 등을 인도받아 국법에 따라 암살집단 전체를 즉시 처형한 사실을 공표했다. 또 일부 불충한 세력에게 황제가 죽음을 맞았다고 언급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조카가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부탁하는 연설을 했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정중함이 묻어난 경고성 부탁이었는데,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예상치 못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상황 정리를 두 눈으로 본 원로원은 무력감 속에 근위대를 등에 업고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의견을 따라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전면적인 사면과 정보통제를 시작하고, 원로원을 설득해 조카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막은 직후, 급히 가매장된 조카 시신을 수습해 정식 장례 절차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 동시에 근위대와의 합의 아래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했던 주범들을 처형시켜 또 다른 암살을 방지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황제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시작하는데 우선 자신의 할머니이자 지금까지 즉위한 3명의 황제의 직계가 되는 리비아에게 신성한 영예를 수여했고 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어머니 소 안토니아를 기리는 행사를 매년 로마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벌였다. 그 외에도 형이자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의 희곡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등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벌여서 공화정 복구 여론을 잠식시키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양할아버지이자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또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대리석 아치(개선문으로 추정)를 만드는 등 친 황제 여론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2.3. 내정 개혁과 관료제 구축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건강치 못한 몸상태 탓에 일찌감치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려났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아래 역사, 법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통치철학과 정국 분석의 식견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어린 나이부터 명문가 수장이 되면서 가문 내 수많은 클리엔테스들을 후원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개최해왔다. 따라서 즉위 당시 뜻밖의 강인한 성품과 연설 솜씨, 정치적 식견으로 자신을 얕잡아보던 원로원을 놀라게 만들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붙여준 스승 리비우스 밑에서 로마사를 연구하면서, 로마가 어떻게 성장하고 정치, 사회 제도들이 구축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즉위 당시부터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철학과 정책들을 자신의 길라잡이로 삼고,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처럼 이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달리 원로원에게 유화적이고 존중적인 태도를 취했고, 진심으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평소에는 원로원 평의석에 앉아 원로원 의원들을 존중했고 특별한 정책을 입안할때만 집정관 사이에 앉거나 호민관 좌석에 앉았다. 그는 원로원의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리면서 먼저 도움을 구했다. 또한 원로원에게 먼저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고 요청을 받았을때만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그 역시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황제로서 원로원 중심의 회귀를 바라지 않았고, 해묵은 특권으로 평가된 원로원 특권들을 줄여나갔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시대는 내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로원과 분위기가 여러모로 비슷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서 로마가 항구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 내 이탈리아와 속주간의 분리보다는 통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46~47년 68년간 사장된 감찰관 직을 부활시켜 내전 승리 후 아우구스투스처럼 원로원 구성을 인위적으로 교체시켰다. 클라우디우스는 과거 카이사르에게 시민권을 받고 율리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로 편입된 갈리아 코마타 지도자들의 후손들을 대거 원로원 의원에 임명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협력하던 갈리아계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본국인과 비슷한 위치에 서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야심을 품은 원로원 내 귀족 세력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원로원의 군대 통제권과 원로원 임명 속주 권한들을 약화시켰으며, 행정의 효율성과 프린켑스 권한 강화를 목적으로 원로원 관할 국고를 황제 휘하의 재무관 2명이 담당하도록 바꿨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개혁을 진행하면서 여러 부문에서 거둬들인 세입들을 피스쿠스(황제 국고)로 돌리면서, 곡물 공급, 수로 관리, 홍수 조절, 이탈리아 내 가도 및 운하, 항구 관리권까지 황제 관할로 바꿨다. 동시에 자신의 유능한 해방노예 3인방을 황제 비서로 활용했다.[21] 서신비서 나르키수스는 황제의 도장을 찍어 제국 전역에 모든 법과 정책들을 전달했고, 칼리스투스는 속주들에서 황제에게 보낸 탄원서들을 먼저 심의했으며 팔라스[22]를 재무부 장관에 임명해 속주 내 모든 국고와 황제 대리인들의 활동을 통제, 관리토록 했다. 또한 ‘아미시 카이사리스(카이사르의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추밀원을 확대시켜 내각을 개편해 자신이 효과적으로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황제와 내각을 도울 행정부 내 부서(scrina)를 세분화시키고 특별국들을 신설했다. 따라서 이 조치들은 예전보다 프린켑스의 권한을 강화시켰고, 자연스레 관료제가 확대,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로마의 행정 효율성을 크게 증가됐다.

2.4. 사회, 경제 정책과 오스티아 항구 건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아우구스투스처럼 이탈리아 내 서민들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자금을 빌려줘 이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드는 고리대를 엄격히 금지시키고 강하게 처벌했다. 또한 고리대금업자들이 저지르는 악랄한 행위들을 근절시켰으며, 식량에 붙던 전매세를 폐지해 세금 부담으로 인한 지역 사회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 칼리굴라 때 진행된 수로, 상하수도 사업을 이어받아 이를 제국 전역으로 확대시켰으며, 칼리굴라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제국 조폐국을 다시 원로원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황제가 완전히 장악했다. 이 조치는 원로원에게는 실망스러운 조치였지만, 칼리굴라 시대 때 황제가 장악하게 된 조폐국 권한은 제국의 화폐인플레이션을 예방시켰다.
클라우디우스는 공공 개혁의 일환으로 수로, 상하수도, 운하 외에도 제국 속주 간의 무역과 공업 발전에 힘을 쏟았으며, 그 일환으로 그의 업적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오스티아 항구 건설을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벌인 초대형 토목공사 사업인 ‘오스티아 인공 항구 건설’은 그동안 모래톱에 막혀 로마 항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오스티아를 제국 수도의 외항으로 만들어 로마 내 곡물 운송과 가격 조절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로마 외항으로 건설된 신도시 오스티아의 건설은 캄파니아 지방에서 육로로 220km나 이동해야 할 곡물과 무역품들이 저렴한 비용에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하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오스티아 건설은 소비도시 로마와 오스티아의 등장으로 손해를 입게 된 선주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손해를 입은 선주들을 대상으로 파선 보험, 세금 면제, 6년간 곡물 운송을 담당한 사람들을 위한 로마시민권 부여 등으로 보상해줬다.

2.5. 영토 확장과 브리타니아 원정


클라우디우스의 내치와 경제 정책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23]의 연장선이었지만 그의 대외 국방정책은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과거 카이사르가 사용한 ‘총사령관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 충성을 받고 휘하 군단병들에게 정복과 보상을 통해 군단의 충성을 받는 형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한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보다는 즉위 직후 혼란을 틈타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포섭해 군대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달마티아 총독 푸리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반란 사건, 46년 소요로 발생한 트라키아 문제, 칼리굴라의 최대 실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살해로 시작된 마우레타니아 반란이 복합적으로 연이어 발생한 이유가 더 컸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달마티아 총독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원로원 일부 중진급 의원들과 내통해 클라우디우스를 얕보고 군을 일으켰는데, 일찍부터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이래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던 게르마니아, 일리리쿰, 달마티아 일대의 군단병들과 지휘자들은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불참했다. 여기에 더해 불참했던 군단 지휘자들이 미신을 이용해 반란에 호응한 이들까지 돌아서게 만들면서 반란은 며칠만에 싱겁게 진압됐다.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트라키아 왕국은 잦은 소요 사건으로 마케도니아, 그리스 일대의 속주들의 평화까지 위협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의외로 공세적으로 대처해 트라키아는 로마에 황제 속주로 합병됐다. 반면 마우레타니아 반란의 경우, 2년간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는 이 일대를 안정화시키고 왕국을 두 개로 쪼개 황제 속주로 개편했다.
43년,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 내 로마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을 보호하고 브리타니아 내 광물, 목재, 가축 등을 획득하며 노예를 확보할 목적,[24] 쿠노벨리누스와 그 아들 카라타쿠스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친로마파 브리타니아인들의 개입 요청,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를 위협하던 드루이드교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5만 명의 로마군 지휘를 맡겨 대대적인 브리타니아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 로마군은 켄트 상륙 후 2일 간 전투를 치뤄 승리를 거두고 템스강으로 진격했다. 오늘날 런던 일대에서 행군을 멈춘 원정군은 그곳에서 자신들과 합류할 총사령관 클라우디우스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군사 행동에 나선 클라우디우스는 먼저 도착해 주둔 중인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휘하 로마군에 합류해 브리타니아 원정군을 이끌고 드루이드교의 보호자를 자처한 카라타쿠스를 신속히 공격했다. 클라우디우스가 합류한 로마군은 그동안 친로마 세력과 로마제국 내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대를 위협하던 카라타쿠스의 본거지 카물로도눔을 장악한 뒤, 이곳에서 11명의 브리타니아인 왕들의 항복을 받았다.
브리타니아인들에게 항복을 받아낸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은 투표를 거쳐 황제의 개선식을 통과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뜻을 가진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라는 존칭을 결정해 클라우디우스와 그 가족들이 대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에 로마군을 상주시켜 브리타니아 일대 정복 및 속주 건설 사업을 지시내린 뒤 로마로 귀환해 44년 개선식을 거행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보조군에게 제대시 로마시민권과 속주민과의 통혼권을 수여하는 것이 정착화 또는 시작되었다.

2.6. 메살리나와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지만 사생활에선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매우 기백이 없었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어머니, 누나 등 같은 집안 식구들에겐 무시당했던 탓인지 해방 노예들에게 도움받으며 지내던 습성을 황제가 되고서도 버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황제 업무를 함에 있어서는 해방 노예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피해방인 3인방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또한 네 번의 결혼 생활 동안 상당한 공처가였기에 그의 아내들이었던 플라우티아, 아일리아, 메살라 발레리아(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네 번의 결혼 모두 그는 아내에게 무시받거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사실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시절 외외종조부이자 보호자였던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에 따라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약혼했었다. 하지만 레피두스 부부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에게 불충한 행동을 저질러 신임을 잃고 약혼이 파기됐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남동생의 딸과 약혼했는데 새 신부가 결혼식 당일 갑자기 사망해 또 다시 결혼이 미뤄졌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플라우티아와 결혼시켰다.
첫 번째 아내 플라우티아와 아일리아는 클라우디우스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정숙하지 못해 갈등을 일으키다 모두 이혼했다. 이후 그가 48살의 나이에 조카 칼리굴라의 도움[25]으로 맞이한 아내가 세 번째 아내였던 메살리나였다. 15세에 불과한 메살리나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사이에서 딸 옥타비아와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얻었다. 하지만 황후가 된 메살리나의 사치와 욕심으로 발생한 각종 고발과 부정행위들은 클라우디우스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 결혼생활은 그의 의도와 다르게 황후 메살리나의 간통과 중혼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면서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메살리나는 자신의 여러 연인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모해 48년 오스티아로 시찰나간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기로 음모를 꾸몄고, 실리우스와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초대형 중혼 스캔들은 클라우디우스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지만 유능한 충신 팔라스가 동료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함께 신속히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태를 보고하면서 궁정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실리우스는 간통, 중혼 및 국가 반역죄로 체포돼 공모자들과 함께 즉시 처형되었다. 하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연민하던 클라우디우스는 주동자인 메살리나 처벌에는 뜸을 들여 계속 미뤘다. 따라서 나르키수스는 결단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우스를 대신해 메살리나가 머물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 밝히고 그녀를 죽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이 파탄난 이후, 측근 팔라스의 강권 등에 따라 네 번째 결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혼상대를 고르는데 해방노예 심복 3인에게 각각 후보를 제출하게 하여 그중에서 선택하였다. 당연히 그 3인은 각자의 권세가 달린 중대사였고, 권모술수가 판치고 말았다. 이때 팔라스는 황제의 조카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소 아그리피나를 적극 밀어붙였고, 팔라스의 강권과 설득을 받아들여 아그리피나를 재혼 상대자로 결정내렸다.
사실 클라우디우스가 조카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로 한 건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임에도 다른 남자 친척들과 달리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사람으로 남아야만 했다. 하지만 당대 로마인들은 예전부터 두 가문을 하나의 가문이라고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나마 율리우스 가문이 제위를 계승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문서상’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것은 정치적으로 약점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즉위 직후부터 무리해서라도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임을 부각하고,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일거라는 풍자시까지 다시 들춰내 강조해야만 했다[26]. 이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며,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생존해있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인 친조카와의 결혼은 상당한 무리수였음에도 그는 조카와의 재혼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근친혼이 흔했던 로마에서도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상당한 무리수였고, 당시 사회 전체 분위기도 “율리우스 가문=클라우디우스 가문인데 이건 법적으로도 너무 근친혼이잖아”라면서 반대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이때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측근인 원로원의 중진 비텔리우스[27]가 앞장서 소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의 결혼을 옹호하는 쇼[28]를 해가면서까지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어쨌든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게 된다.

메살리나와의 관계도 그렇고, 그의 후처가 된 아그리피나와의 관계도 그렇고. 메살리나 발레리아는 그리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고 전해지는데, 불륜과 반역죄로 체포할 때까지 클라우디우스가 그녀를 내쫓으려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또한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후, 차츰 그는 그녀의 영향을 받기 시작해 아그리피나가 권력을 갖게 하는 데 큰 힘을 주었다. 다만 클라우디우스는 메살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브리타니쿠스를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이 당시 그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고작 5살짜리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7. 사망


즉위할 당시 반백발이었고 회색 눈동자를 가졌으며 키는 컸지만 한쪽 발을 절었다고 한다. 또 식탐이 심했고 버섯을 아주 좋아했는데, 결국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옹립하기 위해 독살했다고도 한다.(버섯에 독이 들었다는 설과 사래 들렸을 때 사용하는 깃털에 독을 발랐다는 설이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4년 전 옥타비아의 남편 아헤노바르부스(네로)를 양자로 삼은 상태였다. 하지만 정황상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29]를 후계자 후보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브리타니쿠스가 제위에 오르기를 계획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과 브리타니쿠스를 무시하고(클라우디우스가 네로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한 건 아니었으므로,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유력한 후계자이다) 네로를 추대한 건 폭력과 살인이 동반되지 않았을 뿐이지 반쯤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아그리피나와 그녀를 따르던 네로 옹립파들은 오늘날까지도 클라우디우스 독살설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30][31]
클라우디우스 급사 당시 로마의 여론은 재미없고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해 클라우디우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데[32], 젊고 재기 발랄한 네로의 첫 등장은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따라서 유언장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이 공동 제위계승권자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부루스 등이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명분을 내세워 휴지조각처럼 무시했다. 이때 원로원도 세네카가 적어준 첫 연설문을 읽어 나간 네로를 지지하면서, 네로 만을 황제로 승인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중들도 네로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워낙 매력 넘치는 젊은이였기에 네로에게 호의적이었다. 때문에 독살설까지 도는데도 이 비합법적인 제위 계승 문제는 별 말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선대의 티베리우스 이후 젊은 칼리굴라를 환영하던 시민들이 곧 염증을 느낀 것처럼 클라우디우스를 계승한 네로를 환영하던 원로원과 시민들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네로는 즉위 후, 매일같이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희화화하면서 그의 말투를 흉내내고, 버섯을 가리켜 신격화된 클라우디우스를 비꼬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는 등 패륜적 행동을 일삼았다. 이때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게 공주와의 불륜, 고리대금업 등을 이유로 여러 번 숙청대상이 됐던 세네카 [33] 역시 클라우디우스를 비하하면서 맞장구쳤는데, 네로 말년 세네카는 황제 암살미수 사건 개입의혹으로 정맥이 잘리는 형식으로 자살당했고, 네로를 불신임했던 로마 속주 총독들과 로마군이 내세운 명분 중 한 가지는 전임자이자 양부인 클라우디우스를 깎아내리고 직계혈육들을 살해한 부도덕함이었다.

3. 평가


온화한 성격으로 야심이 큰 편은 아니었던, 역사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학식이 뛰어나고 사려깊은 모습을 보이지만 신체장애 때문에 로마 정치 엘리트의 필요조건인 군복무를 못한 데다 문약하고 심지가 약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황제가 된 뒤로는 역사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건실하게 노력했다. 따라서 '''오늘날 로마 황제 중에서 좋은 선정을 베푼 명군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선천적으로 갖게 된 장애와 충분치 못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제정 시스템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명군'''이라고 불리고 있다.
원로원 개혁, 내정개혁, 오스티아 건설 등에서 드러나듯 즉위 전까지 정치, 실무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휼륭한 행정가'''였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를 평가했듯 “정신만 제정신을 차린다면” 어릴때부터 훌륭한 자질과 기품을 가진 사람답게 보다 많은 정치, 행정, 군사 실무를 쌓았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즉위 전의 심각한 결점을 안고 있음에도 즉위한 이후 갑작스럽게 발생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정국을 신속히 안정화시켰고, 자신을 향한 달마티아 반란 진압,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마우레타니아 문제 해결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뛰어난 사람인지 증명하는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프린켑스정을 다시 안정화시켰다고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제정 시스템을 이전보다 공고히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즉위 후 새롭게 개편한 원로원과 새롭게 만든 내각, 행정관료 시스템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확립한 체제들을 보강하고 정비한 내각과 관료시스템 부분이 그의 최고 업적이라고 괜히 불리는게 아닐 정도. 실제로 클라우디우스의 내정 개혁들은 후대 황제들이 방대한 로마 제국을 이전보다 중앙집권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네로 때 제국이 붕괴되지 않고 네로 사후 내전기에 접어든 제국이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 안정을 찾게 된 기반 중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가 한 제국의 체제 정비는 최고 업적인 오스티아 인공항구 건설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래로 제국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편입되던 기사계급들은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새로운 개혁 시스템 아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돼 이후 제정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안정되는데 기여하게 됐다. 아울러 그가 즉위 후 밝혔듯이 아우구스투스의 방식을 활용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수정하는데에 있어서 과거 사례를 통해 재정비한 부분 역시 칼리굴라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강화된 원수정으로 인한 반발[34]을 다시 줄어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점진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프린켑스의 권한을 키워 나갔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보통 이상의 황제 내지 명군이라고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지나치게 온화한 성품, 부족한 정치 경험, 오랜 시간 소외된 탓에 부족한 자신감은 원로원 내 반대파들과 세네카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나치게 우유부단하다’, ‘아내나 해방노예에게 이용당한다’ 등으로 까였고, 오늘날에도 그의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보다 더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50대의 나이에 즉위한 이후에도 마땅한 후계구도를 마련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최대 실책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됐다. 실제로 그가 급사한 이후 뒤를 이은 네로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에 비해 나이가 많았음에도 제왕교육이 충분치 않은데다 아직 10대에 불과해, 소 아그리피나가 그의 측근 3인방과 함께 네로 즉위 초 국정을 좌지우지 하면서 네로 측에 선 세네카, 브루스 등과 대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는 몇년 후 네로와 아그리피나 간의 직접적인 권력투쟁으로 확대돼, 네로의 가까운 친척들이기도 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직계가 모조리 네로 손에 제거되는 비극으로 연결됐다.
또한 정치술이 부족한 까닭에 선량한 의도로 원로원 의원들을 향한 고발과 재판을 신중히 검토해 메살리나, 아그리피나 등의 음모를 막은 부분도 당대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중심주의자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당대에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됐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신중하고 선량한 일처리를 평가절하하면서 그를 가리켜 “얼간이 같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황제”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일반 로마 민중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의 행동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재판에 성실히 출석해 꼼꼼하게 사건을 검토하면서, 억울하게 유죄를 받아 처벌받는 사례가 크게 줄었기 때문.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헌 등을 통해 알 수 았듯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속주 총독이나 정무관 주재 재판보다 황제 개인 법정에서의 재판 처리가 증가했다. 반면, 빗발치는 황제 측근과 아내 주도의 음모 사건들의 피해자가 된 원로원 귀족들이나 정적들은 본래부터 그의 장애 등을 이유로 클라우디우스를 미워했고, 그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선정을 베푸는 행위를 한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재판하는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재판을 챙겨 검토해 넘어간 사건들을 오히려 “변덕스럽다”, “얼간이 같다” 등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평가는 훗날의 황제가 했던, 진짜 변덕스러웠고 개인의 욕망을 위한 숙청을 위해 누명을 씌웠던 판결들이 나오면서 그저 까기 위해 깠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4. 여담


  •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어린 시절부터 리비우스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로마, 그리스 석학들 밑에서 역사,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을 배운 탓에 일찌감치 역사가이자 교양 높은 학자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런 명성은 황족인 신분보다는 본인 스스로도 계속되는 역사 연구와 골동품 수집 등을 통해 에트루리아, 카르타고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로마사, 에트루리아사, 카르타고사 권위자로 유명했다. 실제로 로마 황실의 일원이자 최고명문귀족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35] 당시 로마 지식인들도 쉽게 구사하기 힘들었던 에트루리아어, 페니키아어까지 상당한 완성도로 구사할 줄 알았다. 황실의 일원인데도 정치에 집중할 수 없는 한계로 정치 대신 학예에 집중해서 높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는 먼 후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스 7세와도 공통점이 있다.
  • 즉위 당시부터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는데, 즉위 전 본인이 직접 아우구스투스의 일대기를 기록한 위인전을 만들어 출판했다.
  • 보통은 듣보잡 황제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 덕택에 재평가되었다. 네로가 황제에 오른 이후 세네카 등이 〈Apocolocyntosis divi Claudii〉(神皇 클라우디우스의 化)(...)라는 제목의, 저승에 간 클라우디우스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에게 까이는 희곡을 썼는데[36] 시오노는 로마의 신들이었다면 클라우디우스를 동정해 주었을 것이고 아우구스투스도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를 그런 식으로 혹독히 까며 단죄하지는 않고 나름대로 인정해 줬을 것이라고 평했다.
  • 서구권에서는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로 꽤 인지도가 있던 황제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말더듬이에 약골이라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심지어는 어머니에게마저[37]), 유일한 친구였던 형 게르마니쿠스 등은 할머니 리비아의 음모에 희생당하거나 죽어버리지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버텨나가며 약골에 바보천치로 알려진 겉모습 덕분에 최후까지 살아남는 인물로 나오며, 리비두스나 폴리오 등으로부터는 성실하고 현명한 청년으로 불린다.[38]
  • 헐리웃 영화에서는 잉여나 돼지로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영화 성의의 후속작인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에서는 칼리굴라 황제 옆에서 찌질거리는 팔푼이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황제가 되는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악명 높은 포르노 영화 칼리굴라에서도 비슷한 이미지로 나오고 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1] 로마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에 따라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에 의거[2] 물론 원로원의 결론은 “율리우스 가문=클라우디우스 가문이고, 같은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라서 진짜 싫은데 이 사람 외에 대안이 없네. 수도 경비대까지 등을 돌려서 공화정 복귀 가능성도 없고, 근위대와 친황실파들이 죄다 클라우디우스 즉위에 찬성하니 인정이나 해주는 척하고 위신이나 지키자.”였다고 한다.[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이유 자체가 어차피 두 가문은 결혼, 입양 등으로 묶인 관계이기에 사실 율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분리해서 왕조를 나눌 필요가 없다.[4] 흔히 대(大) 드루수스, 네로 드루수스라고 불리는 인물로 이 사람의 후손들이 바로 티베리우스 사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3명의 황제들인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5]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 친언니는 네로의 친할머니인 대(大) 안토니아이다.[6] 개신교 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티베리우스'를 '디베료'로,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등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신교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7] 게르마니아 전쟁을 지휘하던 대 드루수스는 20대 중반의 나이부터 갈리아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으로 있었다. 이때 그의 아내인 소 안토니아는 황족이자 상류층 부인임에도 남편 임지로 거처를 옮겨 첫째 게르마니쿠스 외의 4명의 자녀를 모두 루그두눔 내 총독 관저에서 낳고 손수 키웠다.[8] 소 안토니아는 동나이대 귀부인들과 달리 전통적인 로마 여인들처럼 손수 자신의 세 아이들을 젖을 먹여 키웠으며 이들의 인성교육 등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죽은 남편이 남긴 세 아이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다. 따라서 안토니아는 몸이 불편한 까닭에 일찌감치 제위계승서열에서 밀린 막내 클라우디우스에게는 더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9]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10] 아우구스투스와는 비슷한 나이대였으며 서로 우정을 쌓은 친구였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황제의 친구임에도 정치쪽과는 담을 쌓고, 흔히 <로마사> 또는 <로마 건국사>로 알려져 있는 142장의 <아브 우르베 콘디타 리브리(Ab Urbe Condita Libri)> 저술에 몰두했다.[11] 아우구스투스의 이 결정은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한다.[12] 로마 사회에서 황실 남성들과 상류층 남성들에게 군사적 업무 수행은 명예로운 경력을 걷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형과 달리 힘든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정치쪽으로 나가고 싶어했음에도 비군사적인 관직인 복점관 업무나 자신의 곁에서 제사를 돕는 사제 외에는 그가 원하던 군업무를 끝까지 못 맡게 했다.[13] 티베리우스가 즉위한 뒤, 클라우디우스는 친삼촌에게 “저에게 공직을 줄 수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처음 그 소리를 들은 티베리우스는 조카에게 콘술 휘장을 줬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진짜 콘술 자리를 달라고 재촉했다. 이에 참다 못한 티베리우스는 “내가 너에게 주는 금화 40닢은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시길라리아 축제 동안 장난감이나 사라고 주는거다.”고 차갑게 대꾸했다고 한다.[14]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딸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배를 던져 먹다가 질식사로 사망하면서 세야누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15] 이 무렵,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 위대한 영웅 대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영웅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친동생이었고, 역사가로서도 상당한 뛰어난데다 명문가의 수장이었다. 따라서 수많은 클리엔테스들의 방문은 당연했고 유명인사들이 그를 찾아오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16] 조카 칼리굴라가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를 식사자리에서 놀리긴 했지만, 네로세네카처럼 클라우디우스를 희화화해서 조리돌림식으로 인격이나 명성에 흠집을 내지는 않았다.[17]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일찌감치 재위계승서열에서 밀려난 친삼촌이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정치적 부담거리가 되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안 될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클라우디우스 본인의 성품이나 성격도 워낙 온화해서 칼리굴라 입장에서는 자신의 몇 없는 친혈육인 작은아버지를 굳이 견제할 이유도 없었다. 황위를 넘볼 가능성이 없는 친척은 조력자, 조언자로서 유용했기 때문이다.[18] 이때 공사 기일을 느리게 추진했다고 해서 누명이 씌워져 잠깐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했다고 한다.[19] 흥미롭게도 조카(당무종)에게 무시받다가 조카가 급사하고 준명군 축에 끼는 인물로 당선종이 있다. 당선종의 아들 당의종도 심각한 막장은 아니었고 예술에 빠져 정무에 소홀했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네로와 비슷하다.[20]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도 직계가 아닌 입양관계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21] 당대 클라우디우스를 비판하는 정적들이나 후대 역사가들은 클라우디우스가 집안 해방노예들에게 좌지우지됐다고 비하했지만, 실상은 클라우디우스가 이들을 제대로 통제해 국정을 운영했으며, 피해방인 3인방도 자신의 주인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했다.[22] 클라우디우스의 부모인 드루수스,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클라우디우스와 칼리굴라를 도운 집안 피해방인이다. 그리스 출신인 팔라스는 어릴때부터 상당히 명석한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는 티베리우스때 권신 세야누스의 음모를 알아내 주인인 안토니아에게 이를 알려 세야누스를 몰락시키고, 게르마니쿠스 가문의 멸문을 막았다. 이때 팔라스는 안토니아의 명에 따라 감시를 피해 서신을 품고 티베리우스가 있던 카프레이야 별궁으로 찾아갔다. 도착 후 그는 목숨을 걸고 안토니아의 전갈과 뜻을 전달해 칼리굴라가 안전하게 타베리우스 곁에서 보호받도록 만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몸이 편치 않은 클라우디우스 곁에서 그의 손과 발이 되었던 사람으로 같은 그리스 출신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함께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을 받던 3인방 중에서도 가장 총명한 충신이기도 했다.[23]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 시대의 내치와 경제 정책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방식과 유사했으며, 그가 건설한 로마 내 수도교 건설, 속주 각지에 건설한 운하 건설 등은 후임인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비슷했다.[24] 여담으로 브리타니아 전쟁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본 인사 중 한명이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에게 믿지 못할 사람으로 평가돼 숙청될뻔한 인사이자 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세네카이다. 그는 브리타니아에서 고리대업과 노예 등 무역 등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고 알려져 있다.[25] 칼리굴라는 자신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위상과 장래를 확고히 하고자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결혼을 직접 주선해 양친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15세의 메살리나를 신부로 간택해 결혼식을 진행시켰다.[26]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결혼 3개월 뒤에 아우구스투스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태어난 직후 사람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고 믿었고, 클라우디우스 재위기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27] 네로 사후 즉위한 4명의 황제 중 한명인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게르마니쿠스의 친구이자 최측근이었고, 피소 재판 당시 피소의 만행과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과정을 낱낱이 폭로해 주목을 받았다.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벗이기도 했다.[28] 제국 통치를 위해서는 '''사소한''' 윤리적 문제 정도는 눈감아줘야 한다는 것, 원로원 의원들도 중요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눈감아주고 넘어가게 된다.[29] 공화정 후기의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으로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의 할머니는 네로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대 안토니아의 딸 도미티아(네로의 고모)였다.[30] 대표적인 예로는 네로때 즉결처형된 나르키수스가 있다. 그는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아그리피나를 따르던 팔라스와 달리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아그리피나는 눈엣가시였던 나르키수스를 토목사업 자금 횡령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아울러 타키투스에 따르면 나르키수스 역시 아그리피나를 팔라스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를 만들어 두 사람 모두를 실각시키려고 했다.[31]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기 며칠 전 아그리피나는 통풍에 시달린 나르키수스를 요양차 지방 온천으로 파견보냈던 것이 그 예라고 한다. [32] 귀족들과 달리 민중들에게 클라우디우스가 욕먹은 이유 중 하나는 검투사 경기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잘못 행동한 이유가 컸다. 당시 민중들은 클라우디우스가 패배한 검투사를 살리길 원했는데, 정석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할 황제가 뜬금없이 사람이 죽을 때 어떤 표정을 보이는지 궁금하다면서 검투사의 죽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33]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유독 세네카를 싫어했다.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웅변실력과 재능을 견제하면서 야심 많은 세네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각종 불법행위 등이 적발되자 진노해 평소 싫어했던 세네카에게 사형판결까지 거의 내릴 뻔 했다. 이때 세네카는 천식으로 비쩍 마른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변론을 펼쳐 겨우 사형을 면했고, 칼리굴라가 41년 암살당하면서 넘어가게 됐다. 이후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에게도 미움을 받았는데, 황후 메살리나에게 황족과의 불륜을 이유로 고발됐다. 이때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진노를 얻고 간통 혐의로 8년간 코르시카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겨우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 힘을 키워 나갔으며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기 전에는 소 아그리피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뒤 친구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다.[34] 이 부분에서 칼리굴라는 퍼포먼스와 자기 우상화, 정적 숙청의 방법을 사용해 4년 만에 본인이 측근인 근위대장에게 암살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아울러 그 결과, 자신의 병력과 지나치게 솔직하고 짓굿은 농담조 어투 등이 하지도 않은 일들과 거리의 뜬소문과 결합해 진짜 한 일로 인식되면서 구제불능의 막장 폭군으로 기록되는 불명예까지 얻게 됐다. [35] 당시 로마 교양인들과 상류층들은 모국어인 라틴어와 지중해 동부 일대의 공용어인 그리스어 모두에 능통했다.[36] 천국 문 앞에 와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해 달라는 클라우디우스의 요청에 유피테르가 여러 신들을 모아서 그의 신격화를 인정해 줄지에 대해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저런 놈까지 신격화를 인정해 주면 앞으로 누구도 신들을 믿고 공경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신격화되지 못한 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이야기.[37] 스파르타처럼 약골로 태어난 아이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진 않았지만, 자식으로 인지하지 않고서 그냥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종종 있었다고 한다.[38] 다만 리비두스에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갈굼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