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image]
'''휘'''
Titus Flavius Vespasianus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출생지'''
로마
'''생몰년도'''
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41세)
'''재위 기간'''
79년 6월 24일 ~ 81년 9월 13일 (2년 82일)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2. 유대 전쟁
2.3. 후계자 시절
2.4. 황제
3. 외모와 사생활
4.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완공되었고, 로마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베수비오 화산 폭발(폼페이 매몰)이 있었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39년에 로마에서 기사계급 출신의 직업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의 딸이었던 도미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이름(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였으며, 형제로는 아우 도미티아누스, 여자형제로는 도미틸라가 있다.
티투스는 팔라티누스 황궁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 특히 그는 동갑내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돈독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프였던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자신도 가볍게 중독되어 죽어가는 브리타니쿠스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오랫동안 마루에 쓰러져 있었다. 이 일은 티투스의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었고, 후에 그가 황제가 되자, 티투스는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 브리타니쿠스의 상을 건립해서 죽은 친구를 기렸다.
성년식 이후, 61년부터 63년에 걸쳐 천인대장(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에서 군인장교로 복무했다.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다시 65년에 마르키아 프루니라[1]와 재혼했다. 새 아내였던 마르키아 프루니라는 생가가 제위 후계자였던 네로의 반대 세력에 속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고, 거기다 그해 원로원 의원 피소가 주도한 네로 암살 의혹 사건으로 반강제적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딸 율리아가 있었는데 티투스는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강제적으로 이혼한 이후에는 평생토록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2.2. 유대 전쟁


이제야 고향의 재난에 두손을 들었느냐? 너희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너희들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가늠해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광기에 사로잡혀 동족과 예루살렘성전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너희들도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일찍이,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고 지금까지 너희는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해왔고, 마침내 아주 노골적으로 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토록 자신만만해 했던 이유가 과연 너희들의 많은 인원수 때문이었느냐? 허나, 실상은 로마군의 극소수 병력만으로도 너희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아니면, 너희가 믿었던 것은 동맹국들이었느냐? 허나, 우리 제국 밖에 있는 어떤 종족이 로마 편이 아닌 유대인의 편에 섰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희들의 신체가 강인하다고 믿었던 것인가? 하지만, 저 게르만인들조차 우리 로마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력한 성벽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저 거대한 대양(大洋)보다도 큰 장벽이 있을련지 생각해보라. 대양에 둘러싸인 브리타니아인들도 로마군에게 정복되었다. 뛰어난 전략과 영리한 지도자를 믿었는가?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지략이 뛰어난 카르타고인마저 우리에게 굴복했다. 그렇다면, 결국 너희들은 우리 로마의 관용을 빌미삼아 감히 전쟁을 시작했다고밖엔 볼 수 없다.

우리는 너희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배려했고, 동족 가운데 왕을 뽑아 세워주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율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존중했으며, 너희 동족만이 아닌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도 너희가 바라는대로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다. 너희들한테 베푼 가장 커다란 관용은 너희들의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물을 수집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다. 덕분에 너희들은 부유해졌고, 그 돈으로 우리와 전쟁을 벌일 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특권을 누리던 너희가 그것을 허락한 우리에게 오만방자하게 등을 돌리고, 친절을 베푼 우리에게 마치 독사처럼 독을 뿜어댄 것이다. 너희는 아마 네로를 무능하다며 경멸했을 것이다. 마치 몸 속에 잠복해있다가 병이 악화된 후에나 뚜렷이 드러나는 금이 가고, 찢어진 상처처럼 여태껏 잠잠히 지내다가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야 본성을 드러내어, 감히 어림도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욕심을 부렸다.

나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너희를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너희 유대인들을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이었다면, 즉시 이곳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기부터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는 갈릴리와 근방 지역부터 먼저 공략하며 너희에게 다시금 숙고할 여유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가 약해서 호의를 베푼 것이라 착각하고, 우리들의 관대함을 핑계삼아 무모한 짓을 계속 벌였을 뿐이다. 네로가 죽자, 너희는 가장 비열한 악당이나 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 제국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나와 내 아버지가 이집트로 떠난 상황을 이용해서, 너희들은 전쟁 준비를 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전쟁 지휘관이었을 때, 너희들에게 큰 아량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제 (로마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오른 우리에게 염치없게도 반역을 꾀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나와 내 아버지가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안정을 회복하자 다른 종족들은 축하 사절을 보내왔건만, 너희 유대인들은 또다시 우리를 적대시하였다. 너희는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자들에게 반역을 선동하고, 요새 성벽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소요를 조장시키고, 명예욕에 사로잡힌 폭도들끼리 서로 내란을 일삼고는 마침내 모든 유대 땅에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극악한 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마지못해 내리신 막중한 명령을 수행하고자, 몸소 이 도시로 왔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선, 나는 매우 기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또한, 너희가 전쟁을 시작하자 일부러 장기전을 계획하며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도망쳐나온 자들에겐 자비를, 나한테 피신해온 자들에겐 내 이름으로 안전을 보장했다.

우리는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포로를 학대하는 로마 병사에겐 엄한 조치와 벌을 내렸다. 너희들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성무기를 사용했지만, 너희들을 학살려는 살기(殺氣)로 가득찬 내 부하들을 자제시켜야 했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내가 패배했는 것 마냥 먼저 너희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성전 가까이 접근한 후에도 전쟁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나는 너희 성소(聖所)와 성전을 보존해야 한다며, 거듭 너희에게 호소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자유로이 성지(聖地)를 떠날 기회를 주며 목숨을 보장했고, 너희가 원한다면 다른 곳에서 전투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모든 제안을 무시한 채, 너희 손으로 직접 성전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른 너희가 이제와서 나와 협상을 하겠다? 이미, 무너져버린 것 이외에 구할 만한 건덕지가 과연 남아있단 말인가? 성전은 벌써 무너져버렸거늘,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지킬 것이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그래, 불행을 자초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지금도 여전히 무기를 움켜쥐고, 극한 상황속에서도 전혀 뉘우침 없이 선처를 바라고 있구나!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너희 동족은 살해당했고, 너희 성전은 무너졌으며, 너희 도시는 나한테 정복당했고, 너희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은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영웅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런 너희들의 광기에 맞장구쳐줄 생각이 전혀 없다![1]

≪유대전쟁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저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유대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유대의 민족주의 정당인 열심당(젤롯, 혁명당)이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고 새로이 갈바가 황제에 오르자,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중인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갈바에 대한 충성서약을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고, 다시 비텔리우스가 오토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오토가 자살하며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티투스는 로마제국 서방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으므로 상황을 봐서 충성여부를 판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리고 다시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같은 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 무키아누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티투스 역시 아버지를 지지했고,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고 난뒤, 아버지마저 로마로 진군하자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해서 유대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2]
70년에는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통곡의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3]
73년, 여전히 항복하지 않는 열심당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티투스는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약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공격을 몹시 주저했다고 진술하고 있다.[4]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5] 왜냐하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 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2.3. 후계자 시절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성대한 유대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개선식 모습은 로마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티투스 개선문에 남아 있다. 이후,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고, 2년 뒤인 73년에는 감찰관을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집정관을 지냈다. 이처럼 티투스는 제위 계승자이자 아버지의 러닝 메이트로 정치가 겸 행정가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때 일화도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양모 가공업자들에게 매긴 오줌세에 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2.4. 황제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가 될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유대전쟁을 치르던 과정에서 만난 유대 공주 베레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 때문이었다고 한다.[6]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유대의 공주가 누구였는가 애매모호하지만 헤롯 왕가 계열의 여인으로 추측된다.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했다고 하지만 티투스의 즉위는 아무 소란도, 걱정도 없었다.
티투스가 베레니케와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 데다가 국가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해줬다.[7] 하지만 티투스는 죽기 전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8]
더해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는 높아졌다. 이는 시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투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다.[9] 실제로 티투스는 짧은 제위기간이긴 했지만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를 죽기 전까지 지켰다. 더해서 티투스는 남을 돕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인들에게 '하루를 잃어버렸다'고 한탄까지 했다.
이처럼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쉴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그의 재위 2달 만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달아 줄줄이 대사건들[10]이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시(市)의 매몰 등이 있었다. 이때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다. 4일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로마 재건 및 리모델링을 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페스트까지 돌아서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그를 '인류의 총아'로 경모했다.
같은 해,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티투스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고 말았다(81년 9월 13일).[11]

3. 외모와 사생활


그는 기품과 위엄이 있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고, 드물게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키는 크지 않았고 배가 나온 편이다.

'''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중 '티투스 편', 3 '''

동생 도미티아누스처럼 금발머리였지만 이마가 매우 넓고 매우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력적이고 잘생겼다는 이야기와 달리 실제 티투스는 키가 컸던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키는 작고 배가 나왔으며 얼굴은 네모형에 미간이 좁은데다, 플라비우스 가 특유의 이마가 넓은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황실 내 황제 초상을 관리하는 관료와 예술가들은 티투스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배가 안 나오도록 신경썼다고 하며, 이는 그의 전신상에서도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티투스의 성격은 즉위 이후에는 관대함과 온화함으로 유명하지만, 즉위 전까지의 모습은 로마인들에게 냉정, 잔인함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또 그의 사생활 중 기록된 이야기들에 따르면 티투스는 매일 저녁 미소년이나 환관 무리에 들러싸여 밤 늦도록 놀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이런 술잔치의 끝은 늘 폭음과 폭식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자들은 이런 사생활적 습관이 그가 즉위 후 있던 일련의 과로와 엮여 돌연한 죽음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4. 평가


동시대 로마인들의 황제로서 티투스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로 정리해 말하면 "치세 2년 내내 '''고생만 하다가 2년 만에 죽었던 황제.''' " 거기에다 나이도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꽃다운 41세'''였다. 사실 제국 황제의 업무량은 굉장히 무겁고 건강을 갉아먹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골골거리며 장수한 아우구스투스가 괜히 대단한 게 아니다.
즉위 이후의 티투스는 평판이 좋은 황제였으나, 즉위 전까지는 한때 민심을 잃은 후계자인 데다 본래 성격도 따뜻하면서도 냉정하고 잔인한 면도 가지고 있어 굉장히 입체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위 전까지 티투스는 아버지 생전 근위대장에 취임해 아버지와 플라비우스 가문의 위협이 될 사람들을 제거하고, 혐의를 날조하는 공작활동을 벌이는 구린 행동을 전담해 그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은 "온화함과 타고난 청렴이라는 가면을 쓰고 추악한 행동을 벌이는 위선자"라고 그를 평했다. 여기에 더해 티투스는 헬레니즘 귀족이나 왕족들처럼 미소년, 환관 무리에 둘러싸여 밤 늦게까지 음주가무를 즐긴 탓에 '''방탕자'''로 유명했다. 따라서 동시대 로마인들 중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평했다.

'''치세가 짧으면 누구라도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

네로 황제 사후 난립한 단명 황제들이 어떤 통치들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야말로 자기 나라 역사도 모르는 어불성설에 불과한 말이지만, 실제로 워낙 입체적이고 황제 즉위 전후로 달라진 탓에 이렇게 평했다(...)
그럼에도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는 티투스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지극히 티투스를 좋아한 그의 이런 평가 달리 티투스는 소위 '''사랑스러운 부류의 인간'''이라고 평가받음에도 사실 즉위 이전까지는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로마판이라고 찬사를 받은 게르마니쿠스와 달랐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생전, 티투스는 능력은 있으나 혹독하고 인기 없던 후계자였고, 성격 역시 냉정함과 따뜻함이 적절히 공존한 탓에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진 행동을 하는 후계자"로 평가를 받았다. 즉,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인기 없던 티투스는 후세 로마인들과 현대 연구자들의 일관된 말처럼 즉위 전후를 기점으로 평가 자체가 180도 바뀐 부분은 아직도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과는 별개로 티투스의 개인적 역량과 성격적 매력, 그리고 자제력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또 티투스는 아버지 생전 아버지, 본인과 가문을 위한 권력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쁜 역할을 담당하긴 했어도 개인의 천성은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티투스는 어린 시절 베프였던 브리타니쿠스의 억울한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를 그리워해서 황제가 된 이후 친구의 살아생전 모습을 조각한 동상을 금으로 제작할 정도로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늘 공과 사는 분명한 황태자이자 황제였다.
따라서 민심을 잃은 황태자였어도, 또 음주가무를 헬레니즘 귀족들처럼 즐긴다고 까였어도 원로원과 민중들을 마구잡이로 보복하기 보다는 관대함으로 일관해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능력도 있고 책임감도 강해서 즉위 후 그의 진면목을 본 로마인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일관되게 받은 것은 당연했다. 아울러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당대 로마 상류층 전체에게 일관되게 악평을 받았고, 티투스 생전 그가 사적인 이유로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특권을 제한하고 동생을 올바르게 통제한 부분 탓에 짧은 재위 기간에도 그의 평판은 모든 로마인들에게 좋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이에선 로마와 티투스를 아돌프 히틀러 급으로 증오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로마에 티투스의 문이라는 건물과 이름이 들어간 다리를 지날 때, 자칭 정통파 이스라엘인, 즉 하레디들은 여길 지나는 것조차도 금기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각자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개인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티투스는 이스라엘인을 마구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멸망 이후 분열된 이스라엘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점도 있으니 히틀러급으로 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좋게 보는 시각도 꽤 된다.
[1] 트라야누스 황제의 이모[1] 하지만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를 보면, 로마군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온갖 잔인한 학살들이 자세히 언급된다. 반란과 전혀 관련이 없는 유대인 1200명을 로마군이 경기장에 모아놓고 모조리 죽이는 내용과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로마군이 성벽 아래로 내던져 죽이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2]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결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일단 맡고 있는 유대 전쟁을 확실히 끝장내야 했으며,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을 맏긴 것은 후계자로서 티투스의 인지도를 올리고 - 실제로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티투스는 티투스 개선문을 받는다 -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하는 데 필요한 전략이었다.[3]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가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붕괴될거라 예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 50여년 전의 예언. 이 때 유대인이 최소 100만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데 100만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 주장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4]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요세푸스의 진술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긴 하다. 그러나 티투스는 로마 역사가들에게도 사려 깊은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티투스의 성전 파괴는 그를 아직까지 증오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해서 유대교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하나의 징벌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6] 티투스는 황태자가 된 후 돌싱이었으므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시민들은 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티투스는 끝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이 커플에 대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대체로 외국인에게 관대했음에도 이런 전력과 함께 외국인이 로마의 정치에 관계하는 것에는 선을 그었기에 야유가 쏟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티투스는 로마에 방문한 베레니케를 일부러 멀리하며 노력했지만, 매년 공주 생일에 선물도 보내고 관심을 가지며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7] 이것은 친동생인 도미티아누스와는 대조되는 부분인데 도미티아누스는 거만하고 의심많고 사치스럽다고 엄청 까였다.[8] 사실 후계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데 어차피 티투스에게는 12살 차이가 나는 형제 도미티아누스가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플랜 아래에서 그가 죽으면 도미티아누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형제가 성숙되기도 전에 티투스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는 거지만...[9] 이 부분 역시 친형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고소 등으로 원로원과의 사이가 극악이었다.[10] 2011년 3월에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이 연달아 계속 터진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다.''' 그리고 이때 에다노 관방장관이 나흘간 잠도 못 자면서 사태수습을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던 걸 생각해보자. 이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이를 수습해야 했던 티투스의 건강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이 20년을 넘긴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관료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 황제는 모든 인사와 중요 서류 결재를 맡아야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엄청난 격무이고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정을 슬금슬금 구축해가는 대사업'''을 진행하면서 44년간 황제 자리를 맡은 아우구스투스는... [11]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빨리 황위를 얻고 싶었던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