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Domus Flavia
'''
69년 ~ 96년
'''성씨'''
플라비우스(Flavius)
'''창건자'''
'''베스파시아누스''' (69~79)
'''주요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로마 제국의 왕조'''
네 황제의 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1. 개요
2. 플라비우스 가(家)
3. 집권
4. 역사
5. 역대 황제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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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네로의 자결로 단절된 뒤, 베스파시아누스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진 내란기를 종결시키고 서기 69년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티투스가 1년 만에 죽은 후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암살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을 자가 없자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왕조의 존속기간은 30년 정도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 모두 내란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 황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도 고대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재평가[1]되고 있다. 바꿔 말해서 로마의 최전성기로 가는 기틀을 닦은 왕조.
플라비우스는 '황금' 또는 '금발' 등의 뜻을 가진다.

2. 플라비우스 가(家)


1세기 무렵 로마에서는 오랜 세월 원로원과 로마 사회의 주축을 담당해 온 명문 귀족 가문들이 서서히 쇠락해가고 있었고,[2] 이를 대체하여 소위 '평민 귀족'이라고 불리는 평민, 기사계급 출신의 신흥 가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플라비우스 가문도 이 중 하나였는데,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플라비우스 가문은 어디서 굴러먹다가 등장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3]였다. 처음으로 플라비우스 가문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할아버지 때의 일로,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 밑에서 백인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는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면서 꽤나 부를 축적 하고 이를 이용하여 기사계급으로 신분을 격상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 대에 이르러서 마침내 플라비우스 가문은 원로원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로도 플라비우스 가문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영국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서기 51년 집정관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이어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동으로 파견된다.

3. 집권


베스파시아누스가 약 8만 명의 병력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한창 진압하고 있던 서기 68년 네로가 원로원의 불신임[4]을 당하고 자살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뒤를 이은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전령을 보냈지만 갈바 역시 집권 후 반 년이 겨우 지난 서기 69년 1월에 오토에게 암살당했고, 그와 동시에 게르마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황제를 자칭하면서[5] 로마는 내전기로 치닫는다.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내전에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 채 간을 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이 비텔리우스의 승리로 끝난 7월 1일 측근들의 충고를 듣고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전반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리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는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경험치가 거의 만렙에 달했던 정예 병력만 8만 명에 달했으며, 이 당시 로마의 식량 공급을 전부 책임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던 이집트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의 손 안에 있었다.[6] 여기에 도나우 강 일대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군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던 것은 덤.[7]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 세력을 제압했고[8],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황제로 승인한다. 또다시 내란으로 무정부사태가 재발할 것을 우려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한 다음 해인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가문의 황위 세습권을 승인해 줄 것을 원로원에게 요구했고 원로원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마침내 플라비우스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4.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들의 개별 항목을 참조할 것.

4.1.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정확히 10년을 통치했음에도 정말 남아있는 사료가 눈물나게 적다(...)[9] 그렇지만 몇 가지 업적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네로 황제와 내전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박살난 로마 제국의 재정을 되살려냈으며[10][11], 제위계승과 관련된 법을 만들어 살아생전 두 아들의 후계문제와 관련된 문제와 프린켑스 지위 문제의 단점을 해결했다. 또한 유대인의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서 내란기에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제국 변경 곳곳에서 일으킨 반란 역시 즉위 이후 수월하게 진압해내면서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속주 출신들을 대거 원로원에 편입시키고 그들에게 파트리키 지위를 부여해 신흥귀족가문들을 등장시켰고, 황제 자문위 같은 전문행정분야 부분도 보강했다. 또한 로마의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콜로세움 역시 베스파시아누스 시기 빵과 서커스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4.2. 티투스 황제


능력도 있고, 개인적 매력도 상당한 데다[12] 의지도 있는 황제였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즉위 직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 남이탈리아의 부유한 캄파니아 지방이 아수라가 되고 폼페이는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다. 이후, 겨우겨우 이게 해결되나 싶었더니 수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따라서 즉위 내내 자신이 가진 역량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재난 대책에만 몰두하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

4.3. 도미티아누스 황제


개요 항목에서 상술했듯이 고대 로마 시기에는 공포정치와 자기우상화 때문에 폭군의 아이콘으로 단죄돼 미친듯이 까였고[13], 죽은 뒤에는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폭넓게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근처까지 제국의 영역을 확장한 데 이어, 형 티투스가 미처 끝내지 못한 로마의 화재 재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또 로마의 고질적 문제인 가렴주구 문제와 고리대 문제 해결도 적극 나서 이 부분에서 로마 민중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평가절상을 통하여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것과 게르마니아 일대에 대규모 방벽을 세워놓은 것도 주요한 업적.
다만 도미티아누스는 '당시 시대 대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기우상화를 했고, 제위를 차지하기 전의 혈통으로 따지면 플라비우스 왕조와는 비교도 안 되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보다도 더 귀족적인 데다 사치가 심한 단점이 있었다. 서기 93년 게르마니아 총독이 반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이후로 심심하면 원로원을 내란죄로 기소 후 온갖 고문법을 개발해 가혹하게 탄압[14]해서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 지식인들의 반감을 사고만다. 그리고 이런 공안 정국의 연속 와중에 자기 역시 암살당하고 만다. 도미티아누스의 암살 이후 네르바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창설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치세를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5.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베스파시아누스
69년 7월 1일 ~ 79년 7월 23일
2대
티투스
79년 7월 23일 ~ 81년 9월 13일
3대
도미티아누스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6. 기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로부터 시작되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제들 또한 클로루스가 플라비우스의 이름을 칭한 이래 대대로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취해 이를 '신 플라비우스 왕조(Neo-Flavian dynasty)'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 이 시기쯤 오면 플라비우스를 전통적인 씨족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통적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에 가깝게 맨 앞에 사용하는 일이 훨씬 많으며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왕조 개창자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같은 유력자들까지도 플라비우스를 칭했기에 왕조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떨어진다. 황제의 칭호로서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후의 '안토니누스' 등과 같이 황제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1]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고자 라인강슈바르츠발트 일대에 설치한 게르마니아 방벽.[2] 율리우스 클라디우스 황제들 시기 여러 사건에 관련되어서 쓸려 나갔다.[3] 특히나 전 왕조가 로마에서 명문 귀족 가문 중에서도 가장 명문으로 꼽히는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합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대비되었다.[4] 네로를 국가의 적 로 규정해버렸다.[5] 정확히 말하자면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갈바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시기의 통신 사정상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야 로마에서 오토가 갈바를 암살한 것을 깨달았던 것, 어쨌든 비텔리우스는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달려 보자'라면서 오토고 갈바고 신경 안 쓰고 신나게 자기 휘하의 전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온다(...)[6] 다만 실제로 식량 공급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언의 협박으로 '까불면 끊을 수도 있어'라고 행동했을 뿐.[7] 도나우 강 수비대는 사실 맨 처음에는 오토를 지지했다가 내전에서 비텔리우스에게 패하면서 온갖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그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다가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베스파시아누스 편에 붙어버린다(...) [8]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본인은 유대인 반란을 마저 진압하겠다는 핑계로 비텔리우스 세력과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비텔리우스와의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최측근이자 황제에 오를 것을 간정했던 킹메이커 무키아누스.[9] 이 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타키투스의 '역사'가 서기 70년 초 이전까지의 일부분만 전해지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10] 근데 정말 온갖 세금을 다 거두어서 쪼잔하다고 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공중화장실에서 나온 대소변을 퇴비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둔 것. 덕분에 현대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이름보다는 공중화장실을 상징하는 은어로 남아있다고(...)[11] 소위 '오줌세'와 관련되어 야사도 남아있는데 다음과 같다. 아들 티투스가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고 항의하자 베스파시아누스가 주변의 은화를 한 움큼 쥐어와서는 티투스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 말이 ''''지린내가 나지 않느냐.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12] 키가 작고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사람 자체가 유쾌한 데다 신분이나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묘하게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어 로마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1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부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까지 반백년 이상을 원로원 의원을 지내다 은퇴한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를 평가할때 폭군이라고 대놓고 평가한 뒤, 이 사람과 비교했다. 또 콤모두스 암살 후 원로원에서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할 때, 이구동성으로 나온 말이 콤모두스는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처럼 악랄하고 잔인한 폭군인데 두 사람을 합친 것처럼 최악 중 최악이라고 언급하면서 깠다.[14]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20명의 원로원 의원이 반란죄로 처형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