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텔리우스

 


[image]
'''휘'''
AULUS VITELLIUS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생몰년도'''
15년 9월 24일 ~ 69년 12월 22일
'''재위 기간'''
69년 4월 16일 ~ 69년 12월 20일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2. 황제 즉위와 몰락
2.3. 최후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로마 제국의 제8대 황제. 네로가 실각한 뒤, 시작된 내전 당시 즉위한 황제 중 한 명이다.
경쟁자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5대 황제 네로를 많이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모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이탈리아 로마 출생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베테리스(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그의 아내 섹틸리아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집정관을 지냈고,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친 섹틸리아는 명문가 출신으로 마르쿠스 섹틸리우스의 딸이었다.
부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 대해 더 살펴보면 그는 상당히 뛰어난 개인적 역량을 가지고 이를 십분 발휘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된 능력자였다.그는 어디에서 온 지 확실치 않은 이탈리아기사계급 출신이었는데, 자신의 재능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이때 단순히 정치, 행정력을 인정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주사위놀이 실력과, 전차경기 등의 지식과 분석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텔리우스의 부친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클라우디우스 시대까지 세 황제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이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상속자, 조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인 게르마니쿠스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최측근이었다. 또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도 상당히 총애를 받아 황제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인정받고 중용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가 별볼 일 없던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고, 제위계승서열이 일찌감치 밀려났던 클라우디우스를 여러 부분에서 많이 도와줬다. 그래서 그는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비텔리우스의 부친을 신뢰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역시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하려고 할 때 근친혼으로 이야기가 많던 결혼을 통과되게끔 만들었다.
이런 배경 탓에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파 귀족 자제로 태어났고, 권력가 자제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50년경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딸 갈레리아 푼다나와 결혼했다. 비텔리우스의 장인 갈레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16년도부터 23년까지 이집트 장관이기도 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게르마니쿠스가 19년 황제의 허가 없이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의 이집트 장관이었고, 세네카가 자신의 아내, 아이들과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당시 이를 도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귀환 중 난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모와 처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아래 잘나간 만큼, 비텔리우스 역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래서 그는 네로 시대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네로는 자신을 존경하고 모든 행사에 앞장서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공연에 진심으로 빠져든 그를 신뢰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했는데, 비텔리우스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갈바에게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임자와 달리 호탕하고 플레이보이 기질이 강한데다 엄청난 부자라서 얼마 안 가 부하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고 한다.

2.2. 황제 즉위와 몰락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저지 게르마니아) 사령관 부임 이후, 비텔리우스는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다루고 성격이 워낙 좋은 탓에 인망을 얻었는데, 69년 초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라인강 군단들에 의해서 쾰른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대박이 터졌다. 그리고 천운이 따랐는지 몰라도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이티아 주둔 군단들에게도 지지선언을 받으면서 반 갈바 운동의 새로운 황제로 세를 모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비텔리우스는 황제감이 아니었고, 본인 스스로 네로를 존경하고 사랑한 위인일 뿐 네로보다 못한 위인이었다.'''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니나노하며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열매만 따먹는 전형적인 윗분의 행태를 보이며, "갈바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로마 여행길동안 그는 환락과 축제, 술파티에 몸을 맡겼고 수행원들과 병사들 역시 비텔리우스와 함께 무질서함 속에서 진군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갈리아에 남아있다가 부하 장군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크레모나 전투에서 오토를 운좋게 이긴 직후에야 이동했다. 따라서 비텔리우스는 6월 말경에야 로마에 수행원들과 개선하며 입성했는데, 사실 오토가 자살한 다음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상태라서 많이 늦게 귀환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고 소금을 뿌리는 행태를 보인다. 오토를 따랐던 도나우 군단 병사들을 용서하기는커녕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병사들을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심지어 자신 휘하 군단이 도나우 군단을 이긴 지역을 시찰하고 했던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군과의 전투 현장을 둘러보며...

당연하지만 이 적들은 도나우 군단. 문제는 이들은 비텔리우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곤 하나 이 자들도 같은 로마인이자 로마군이었기에 상당히 문제가 큰 발언이었다. 따라서 내전 수습에는 평상시보다 더 고난이도의 정치력을 발휘해도 모자랄 판에 이 말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당연히 도나우 군단의 비텔리우스와 크레모나 시민들에 대한 분노는 깊어졌다.
비텔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돌아와서 오토의 형 살비우스 티티아누스를 사면시켜주고, 오토 측 인사들에게도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곤 계속해서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로마에 와서 근위대를 해고하고 자신의 라인강 군단 병사들로 근위대를 새로 꾸렸다. 하지만 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돌리는 행동이었고, 뒷수습도 말끔하지 못해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
이후 비텔리우스는 대놓고 네로를 찬양하고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책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로마의 돼지”라고 불리는 별명답게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폭식에 탐닉하며 국정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래부터 느긋하고 게으른데다 성격 역시 좋은 집안 출신답지 않게 방종한 사람인 터라 로마 귀환 후 한 일이라곤 각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 탐닉에 치중했다. 또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섹틸리아에게 불효를 저지르고, 내전 당시부터 잔인하고 생각없는 말을 대놓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텔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 증오심에 불타던 도나우 군단이 시리아 속주 총독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면서 비텔리우스 또한 단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무키아누스는 유대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비텔리우스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된다. 무키아누스는 로마로 진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도나우 군단이 군단장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 하에 무키아누스에 앞서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 군과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 이번에는 도나우 군단이 승리했고 비텔리우스편의 총사령관이었던 카이키나마저 도나우 군단에 사로잡히면서 비텔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고 만다.

2.3. 최후


비텔리우스는 의욕을 잃고 그저 먹는 일만 하다가 12월 16일 포로 로마노에서 퇴위를 선언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원로원이 비텔리우스의 퇴위 선언을 받아들여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궁지에 몰린 비텔리우스의 패잔병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로마 시 장관 사비누스를 살해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이것을 막지도 않은 채 무기력하게 시간을 때웠고, 오히려 전직 아프리카 총독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혼자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나우 군단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하지만 그 역시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만다.
69년 12월 20일, 황궁 구석에 숨어있던 비텔리우스는 마침내 로마를 점령한 도나우 군단에게 사로잡혀 처형되고 머리는 장대에 꽂혀 퍼레이드 행렬에 동원되었으며 시체는 티베르 강에 던져지게 된다. 그의 아들과 동생 역시 죽임을 당했다.[1]

3. 평가


69년에 단명한 세 황제 중 제일 무능한 인간으로 공인될 정도로 평가가 최악이다. 동시대 사람 타키투스는 대놓고 ''' '무가치한 인간' '''이라고 그를 표현했고, 다른 로마인들도 ''' '자기 실력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덕분에 운 좋게 오르지 않아야 할 자리까지 오른 인간' '''이라고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
그의 비극은 격에 맞지 않는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부린 탓일지도 모른다.[2]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로마의 내전은 일단락을 짓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간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소환수 중 하나로 등장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몸통이 시커메지면서 거기에서 얼굴이 나타나는 형식. 갈바가 근접전 용도로, 오토가 원거리전 용도로 사용된 것이 작중에서 확인된 것과 달리 이 비텔리우스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 얼굴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의 부활이나, 사이크라노쉬의 결계 마술을 사용할 때 필요한 것은 확실.
그야말로 안습... 재미있는 것은 그 소환수의 나머지 둘의 이름이 전임 황제들인 갈바오토라는 것이다.


[1]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자신을 사로잡은 부대의 지휘관과 몸값을 협상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참수되었다고 한다.(...)[2]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군단 병사들을 향해 "내가 그래도 한때는 너희의 황제였다."라고 일갈했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비텔리우스가 '''생전에 보여준 그나마 황제다웠던 유일한 모습'''이라고 조롱한다.(출처: 김경현 차전환 역 「타키투스의 역사」, 2011년,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