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1. 고대 로마의 유력 가문, 씨족명
2. 로마 황제


1. 고대 로마의 유력 가문, 씨족명


CLAVDIVS
The gens Claudia/Clodia
코르넬리우스,[1]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파비우스, 만리우스 등과 더불어 고대 로마 초창기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 귀족(Patricii) 가문이며, 마르켈루스나 클로디우스 등 평민(Plebs) 분파들도 존재했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세습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로 유명하다.
시조는 사비네족 출신의 부유한 유력자로, 로마와의 평화를 지지했으며 로마에 온 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라는 로마식 이름을 취했다고 한다. 로마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에서 유력한 귀족 대우를 받고 원로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심지어 기원전 495년에는 집정관까지 당선되었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가 B.C. 509 ~ B.C. 503까지 여섯 해 동안 4번이나 콘술에 선출될 당시, 로마 인근의 라틴족 씨족 중 무려 5천여명의 일족을 데리고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의 인솔 아래 로마로 이주한 가문이 바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라고 한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인물들은 귀족적이며 고집이 세고 강인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공화정 로마에서 수많은 고위 공직을 맡아왔다. 수에토니우스는 저술 당시 이미 사라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언급할때 아우구스투스와 그 가족들의 업적과 악행을 서술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본래 이 가문 출신인 티베리우스 황제 편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전까지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28명의 집정관, 5명의 독재관, 7명의 감찰관, 6번의 개선식, 2번의 약식 개선식”을 기록한 명문 가문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왕조가 시작되기 전부터 위세가 대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입안하고 직접 총감독을 맡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로마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활약했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맞수이자 시라쿠사의 정복자로, 네로는 메타우루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명하다.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초기까지 옥타비아누스는 혈연의 도움으로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소 옥타비아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를 낳았고, 그는 요절하기 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였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격인 풀케르 가문에서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입양된 인물이었기에 풀케르 가문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가 되었다. 리비아가 전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를 중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분파로 귀족 가문인 풀케르, 네로 가문과 평민 가문인 마르켈루스 가문이 있다. 풀케르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으로부터, 네로 가문은 4남(실질적으로 차남)으로부터 이어지는 가문이다. 아피우스 카이쿠스 이전에는 사비누스('사비네 출신'), 크라수스('뚱보') 등의 가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문 전체 역사상 가장 융성한 분파 가문은 풀케르 가문인데, 이 가문은 공화정 역사상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전체를 상징한 집안이었다. 반면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네로 가문은 분가 이후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한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법무관 또는 일반 원로원 의원만 배출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결합해 로마 제정 최초의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했다. 이들은 로마인들에게 카이사르 가문이라고도 불렸는데,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2]와 그 양자이자 후계자인 제5대 황제인 네로[3]가 바로 클라우디우스 씨족에 해당한다.[4]
남성 이름 중 가이우스,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과 아피우스, 푸블리우스, 티베리우스를 대대로 많이 사용했다. 이중 아피우스(Appius)라는 이름은 오직 가문의 시조 사비누스의 직계 후손들, 카이쿠스 이후로는 풀케르 가문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외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티베리스 강에서 유래한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은 카이쿠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에서 시작된 네로 가문 사내들이 대대로 많이 사용했는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당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이 이 프라이노멘을 대대로 세습해 사용한 까닭에 제정 중기 이후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같은 풀네임들을 제정시대 역대 집정관 목록에서 흔히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경우에는 드루수스라는 프라이노멘을 많이 세습해 사용했고, 씨족 내 분파명이기도 한 네로라는 이름도 이 가문 남성들이 많이 사용한 대표적인 이름이다.[5] 여성 이름은 클라우디아, 클로디아이다. 반면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프라이노멘 루키우스라는 이름은 오래 전 가문 내 모든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철저히 금지하는 개인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남성 두명이 노상강도와 살인죄를 선고받으면서 공공도덕과 명예를 중시여기는 가훈을 어겼기 때문이다.
제정 시기까지도 3세기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등 가문명이 클라우디우스인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이나 황족 클라우디우스들의 클리엔테스 또는 그 후손이거나[6],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형제처럼 아예 야만족 출신 등 하층민의 자칭일 수도 있어 아피 클라우디우스를 시조로 했던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후손은 3세기 이후 대가 끊겨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위세를 잃고 로마 내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단, 푸피에누스 황제는 모계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조사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 가문의 대는 3세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혀 관련없어 보이지만 콘스탄티누스 왕조콘스탄티누스 2세율리아누스 황제의 풀네임에도 클라우디우스가 들어간다. 이 시기쯤 되면 황제의 이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율리우스, 플라비우스 등 정통성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고대 가문 및 인물들의 이름을 갖다 붙이게 되었기에 큰 의미는 없다.
현대 이탈리아를 비롯한 라틴 문화권과 기타 서구권 국가에서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비롯되었거나 가문명을 그대로 사용한 이름들이 남아 있다. 바로 남성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클라우디오, 클로드, 여성 이름으로 사용되는 클라우디아이다.
여담으로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뒷머리를 뒷목덜미 아래로 길게 기르는 스타일 역시 클라우디우스 씨족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하며, 로마로 대규모 이주 후 로마 시민권을 받았을 당시부터 로마 내 일곱언덕 중 하나인 카파톨리누스 언덕을 가문의 가족 공동묘지로 배정받고, 아니아 북부 지역을 가문과 그 일원들의 거주지로 배정받았다고 한다.

2. 로마 황제




3. 니트로 플러스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나오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1] 스키피오, 술라 등이 이 씨족 출신이다. 공화정 시기 최고의 명문 씨족으로 역대 콘술 중 30% 이상이 코르넬리우스 씨족에서 나왔다.[2]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3] 원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4] 티베리우스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속하지만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이며, 칼리굴라도 부계 혈통으로는 클라우디우스 가의 후손이다.[5] 제정 초기부터 전통적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을 잘 사용하지 않고 가문 이름이나 별명을 앞에 쓰기도 하는 흐름이 생겼다.[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맏사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