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로마제국 7대 황제
Otho | 오토
'''
[image]
[1]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Marcus Salvius Otho
'''제호'''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Marcus Otho Caesar Augustus
'''출생지'''
로마제국 이탈리아 페렌티움[2]
'''생몰 년도'''
32년 4월 28일~69년 4월 16일(향년 37세)
'''재위 기간'''
69년 1월 15일 ~ 69년 4월 16일
'''가족'''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父)
테렌티아 알비아(母)
살비아(姉)[3]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兄)
'''배우자'''
포파이아 사비나(강제이혼)[4]
'''자녀'''
알려진 바로는 없음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2. 황제 즉위와 몰락
3. 평가 및 이야깃거리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7대 황제. 풀네임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이며, 재위기간은 69년 1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다.
네로의 젊은 시절 친구이었고, 네로의 두 번째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의 두번째 남편으로 네로에게 아내를 뺏긴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갈바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됐지만 비텔리우스와 내전에서 패해 자결했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할아버지 마르쿠스 오토 때부터 원로원에 입성했던 집안 출신으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트루리아라고 한다. 할아버지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는 어린 시절 모두 리비아 드루실라의 집에서 자랐는데, 그들은 성장 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최측근이었고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헌신했다.
오토의 아버지 루키우스는 속주총독, 군단장 등을 지냈던 사람으로 여러 요직을 모두 경험하면서, 능력과 충성심 모두에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총애를 받았다. 루키우스 오토는 아첨꾼이 아니었고, 늘 군사령관이자 행정관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등을 지내면서 상관과 부하들에게도 엄격하고 공정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루키우스 오토의 공정함과 능력을 인정해 총애했고,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눴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인기는 없었고, 황제가 카프리 섬으로 은둔해버린 이후에는 안 좋은 뜬소문들이 돌면서 한때 길거리를 통해 티베리우스가 루키우스 오토의 어머니와 간통해 낳은 사생아라고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루키우스 오토는 칼리굴라 암살 이후 일련의 사건들과 클라우디우스 즉위 직후 터진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반란 당시에도 훌륭한 충성심과 책임감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를 예상 외로 손 쉽게 진압했고, 병사들을 다룰 때도 매우 공정하고 엄격했다. 또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 노예와 측근들을 기소해 논쟁으로 유죄를 받아낼 정도로 상당히 유능했다. 그래서 그는 사후 원로원과 옛 부하들에게 이 부분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하며, 오토의 집안은 아버지 루키우스 생전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귀족 반열의 지위를 받았다.
조부, 조모와 부친 모두 황실의 측근이었고 아버지 루키우스가 상당히 뛰어난 원로원 의원인 까닭에, 오토는 어릴 때부터 상류층 자제로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 일찍 요절한 누나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손수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 대 드루수스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아주 어릴 때 약혼시켰다. 또 그의 형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오랜 친구 네르바의 손녀(훗날 네르바 황제의 여동생)를 배필로 맞이했다. 이는 오토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아버지를 따라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알현했고 일찍부터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인 네로와 친한 친구였다.
오토는 네로가 즉위한 이후에도 함께 밤이슬을 맞으며 다니던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네로가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깨지게 된다. 네로는 포파이아와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오토에게 강압적으로 이혼을 종용했다. 이후 그는 아예 오토를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쫓아냈다.

2.2. 황제 즉위와 몰락


어린 시절부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훌륭한 부잣집 막내도련님 이미지였기에 오토는 로마 상류층 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강제로 아내를 뺏기고 추방된 일은 그에게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 강제로 로마에서 쫓겨나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오토는 네로와 밤이슬을 맞으며 다니던 시절과는 정반대로 성공적으로 속주를 통치했다. 따라서 유명한 플레이보이의 완벽한 변신은 수도 로마에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날 정도였다.
오토는 10년 동안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지내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갈리아 속주 총독 빈덱스로 시작된 반 네로운동에서 자기 속주 옆의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 갈바를 맨 처음 지지하며 반 네로운동에 가세한다. 아마 포파이아로 인한 개인적 원한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듯한데 실제로 오토는 네로를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토와 빈덱스의 반란은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최종적으로 네로의 뒤통수를 치면서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후 궁지에 몰린 네로는 자결하고 갈바가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자 오토는 갈바와 함께 로마로 돌아간다.
그러나 갈바는 오토가 맨 처음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실책이 많았다. 특히 갈바의 여러 실책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오토를 팽하려는 측근들을 기용한 일과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삼은 결정이었다. 피소의 등장은 고령의 갈바에 이어 제위를 꿈꾼 오토에게 큰 실망감을 줬는데, 이 시기 동안 갈바와 그 측근들의 행동은 그를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게 했다.
따라서 오토는 갈바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고, 근위대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오토는 10년간 타라코넨시스에서 보여준 성과에도 원로원에게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네로의 오랜친구였고, 개과천선했다고 해도 갈바 제거에서 보여준 과감함과 잔인함이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토는 즉위 직후부터 유능하고 활동적으로 국정을 펴나갔고, 원로원은 플레이보이에서 훌륭한 정치가로 변신한 오토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 그는 내전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혼란을 수습하는데 상당히 노력했는데, 그가 가장 먼저한 행동은 네로의 상들을 복구시키고 네로 시대의 관료들을 일부 복직시켜 행정공백을 최소화한 조치였다. 그렇지만 오토는 즉위하자마자 라인 강 군단들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비텔리우스를 상대해야 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나마 라인 강 군단의 남하에 자극받은 도나우 군단의 적극적인 지지 표명으로 오토는 라인 강 군단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한다. 또 비텔리우스에게 공동 권력을 제안하고, 비텔리우스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여기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5]라는 유능한 사령관이 오토에게 가세하여 그가 지휘하는 군대가 라인 강 군단을 서전에서 격파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전투 뒤 그들을 추격 섬멸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 라인 강 군단은 재편성할 수 있었다.[6] 이후 라인 강 군단이 속속 합류하여 남하하였고, 여기서 파울리누스의 만류에도 불구, 오토는 회전을 치루기로 결심하고 4월, 베드리아쿰에서 격돌한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투에서 오토의 군대가 패배하자 깨끗하게 자살로 석달의 치세를 마쳤다.

3. 평가 및 이야깃거리


동시대의 마르티알리스 등 로마인들에게 10대 시절에는 로마에서 악명 높은 플레이보이였지만, 경쟁자 갈바, 비텔리우스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황제로서 보여준 종말의 모습은 영웅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가 깨끗하게 자결했을 때, 병사들 중에는 그의 용기와 책임감에 감탄해 같이 죽으려는 경우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오토의 유해를 화장해 유골항아리에 담아 기념탑에 그의 시신을 안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플라비우스 왕조네 황제의 해 최종 승리자였던 까닭에, 이 시대와 그 이후의 로마인들에게 꽤나 평가절하됐다. 그래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은 오토를 약간은 부정적이고 권위가 떨어지는 함량미달의 황제로 서술했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저녁식사 도중에 난입한 근위대에게 의자에 서서 울면서 물러가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후대 로마인들의 기록에서의 오토는 황제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동으로 비웃음을 샀고, 다음 날 근위대에게 각각 5000 세스테르세스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어느날에는 근위대를 통해서 황제에 오른만큼 그들에게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까이기도 했다. 즉, 그가 내전에서 승리했으면 좋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의견에 의문이 생기는 일화를 기록해 그를 폄하했다.
여담으로 오토는 잘생기고, 꽤 멋쟁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연상되듯 항상 자신의 수염을 면도 후 물에 적신 빵으로 문질러 면도 후 피부를 관리했다고 하며, 왁싱에 많이 신경썼다고. 성격 역시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안짱다리였던 단점이 있었고 대머리였던 부분이 컴플렉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발을 쓰고 다녔는데, 가발로 이를 워낙 잘 가려 주변에서 그가 대머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 오토는 미남이었지만, 20대부터 탈모가 심각했다. 따라서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늘 가발을 쓰고 다녔다.[2] 이탈리아 라치오주의 비테르보 근처의 도시로 현재는 파괴되어 흡수됐다.[3]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의 손자, 게르마니쿠스의 차남, 칼리굴라의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티베리우스 시대때 약혼했다. 하지만 요절.[4] 네로에게 강요당해 이혼당함.[5] 황제열전으로 유명한 수에토니우스(이쪽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리우스)와 같은 씨족명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정확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에토니우스의 아버지가 오토의 군단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6] 파울리누스의 경력이 재밌는데 그는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있는 도중 군단을 이끌고 인신공양을 일삼는 드루이드를 청소하러 가다 부디카 여왕의 대규모 반란에 직면한다. 이 반란 소식을 듣고 즉시 런던으로 진입하나 1만 명의 병력밖에 없어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고, 가는 도중 브리튼인들에게 따라잡힌다. 여기서 1만 명의 병력으로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 남겨진 그는 10만이 훌쩍 넘는 브리튼인들과 회전을 요청하고(카시우스 디오는 무려 23만이라는 병력을 제시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진 상황에서 벌어진 회전(왓틀링 길가의 전투)에서 그들을 궤멸시키는 충공그깽한 전과를 거두어 브리타니아의 상실을 막아낸 공을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