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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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여자 테니스계를 풍미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여자 테니스 선수이며, 성소수자이고,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총 12개의 그랜드 슬램 여자 단식(오픈 시대 이후 8개)을 포함해 총 39개의 그랜드 슬램 우승[2] 을 거둘 정도의 대단한 기록을 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윔블던에 강해 20개의 우승 타이틀을 갖고 있다. 당시 남녀 선수 간의 상금 격차에 대해 항의하며 주도적으로 여성 테니스 협회(WTA)를 설립하였으며, 상금이 평등하지 않으면 출전하지 않는다는 압박을 통해 US 오픈을 시초로 테니스 대회의 남녀 상금 규모가 동등해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의 WTA 투어의 전신이 되는 '버지니아 슬림 서킷' 창설하고, WTA 발기인 중 한 명이며, 초기 WTA의 운영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2.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 12회 / 준우승 6회
- 호주 오픈 우승 1회 (1968) / 준우승 1회
- 프랑스 오픈 우승 1회 (1972)
- 윔블던 우승 6회 (1966, 1967, 1968, 1972, 1973, 1975) / 준우승 3회
- US 오픈 우승 4회 (1967, 1971, 1972, 1974) / 준우승 4회
- 커리어 그랜드 슬램[3]
- 호주 오픈 준우승 2회
- 프랑스 오픈 우승 1회 (1972) / 준우승 2회
- 윔블던 우승 10회 (1961, 1962, 1965, 1967, 1968, 1970, 1971, 1972, 1973, 1979) / 준우승 2회
- US 오픈 우승 5회 (1964, 1967, 1974, 1978, 1980) / 준우승 7회
- 호주 오픈 우승 1회 (1968)
- 프랑스 오픈 우승 2회(1967, 1970) / 준우승 1회
- 윔블던 우승 4회(1967, 1971, 1973, 1974) / 준우승 3회
- US 오픈 우승 4회(1967, 1971, 1973, 1976) / 준우승 3회
프로시절 초기에는 단식보다는 복식(특히 윔블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중반에 들어서부터 단식에서 두곽을 나타냈다. 특히 1972년에는 불참한 호주 오픈을 빼고 나머지 대회 모든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마거릿 코트와 라이벌 관계였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랜드 슬램 상대 전적이나 타이틀 개수, 그리고 그녀가 거둔 성적 중 일부는 코트가 결혼과 출산으로 뛰지 못하던 시절(1968년, 1972년)도 있어서 기록 자체만으로는 다소 못미친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코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킹이 3개의 그랜드 슬램을 따냈으나, 이듬해 코트가 복귀하자 코트는 다시 3개의 그랜드 슬램을 가져왔다. 그래도 1972년 윔블던만큼은 킹이 우승[4] 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캘린더 이어 슬램을 저지하기는 했다.
1973년에 은퇴한 지 한참 된 '''55세'''의 바비 릭스[5] 와 '''성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빌리진킹은 그때 '''30살''') 릭스는 여자 테니스 경기가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남자인 자신이 5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자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며 킹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킹이 거절하자 대타로 마거릿 코트[6] 와 맞붙어서 세트스코어 2-0(6-2, 6-1)으로 가볍게 완파하며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의 관심에 흥분한 릭스는 더욱 강렬한 말로 여자 테니스 선수들을 조롱하며 킹을 자극했고 결국 대결이 성사되었다. 킹은 여자들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9천만 명이 시청하는 해당 경기를 꼭 승리해야 하는 강한 의무감을 가졌으며, 코트의 패배를 거울삼아 릭스와의 경기를 대비하여 결국 세트 스코어 3-0(6-4, 6-3, 6-3)으로 이기면서 릭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7] 이 경기의 결과로 1973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197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미국 여성들 중의 한 명으로 꼽혔으며, '라이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국인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경기는 2017년에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7년 12월 2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1987년 국제 테니스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6년에는 그녀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성 평등에 기여한 공을 기려 US오픈이 열리는 경기장의 명칭이 'USTA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로 명명됐다.
2016년에 노박 조코비치가 남성 테니스와 여성 테니스의 상금이 똑같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논란이 커지자 빌리 진 킹에게 사과를 하였다.
국제 테니스 연맹에서 2021년부터 여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 이름을 빌리 진 킹 컵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
3. 테니스 이외의 이야기
부모님 두 분 모두 운동에 능한 편이었고, 남동생인 랜디 모핏은 메이저 리그의 투수로서 11년 동안 통산 43승 52패와 평자책 3.65를 거뒀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엠마 스톤이 빌리 진 킹 역을 맡았다.
'버지니아 슬림 서킷'의 창설과 WTT(World Team Tennis) 설립을 함께 한 전 남편인 래리 킹과는 학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한 뒤 22살이던 1965년에 결혼했으나, 얼마 뒤 킹은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의 비서였던 마릴린 바넷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다 1981년 바넷이 동거 수당을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인정하게 됐다. 그 소송에도 불구하고 래리와는 여전히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나 그녀가 다시 복식 파트너와 사랑에 빠지면서 1987년에 이혼하게 됐다. 그래도 둘의 이혼 과정과 이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는지, 빌리 진은 래리가 재혼으로 얻은 아들의 대모가 되었다.
2018년은 그녀가 호주 오픈[8] 우승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지한 해의 5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호주 오픈을 참관했는데, 선수 생활 시절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전설 마거릿 코트가 동성애에 대해서 강한 비난을 퍼부은 사실 때문에, 또 다른 성소수자 테니스 선수였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같이, 호주 오픈이 치러지는 경기장 중의 하나인 '마거릿 코트 아레나의 이름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링크
엘튼 존과 오랜 친구이며 엘튼 존의 에이즈 재단에도 소속되어 있다. 엘튼 존이 킹과 그녀의 소속 프로팀 <Philadelphia Freedoms>을 헌정하는 내용을 담은 Philadelphia Freedom이 1975년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1위로 오르는 등 크게 히트쳤다.
1983년 당시, 마이클 잭슨이 발표한 신곡이었던 Billie Jean이 빌리 진 킹에 대한 노래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당연히 곡명이 빌리 진 킹의 이름과 동일했기 때문인데, 빌리 진 킹은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진땀을 빼야 했다.
[1] 빌리 진 킹은 그들 중 한 명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첫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 낀 여성[2] 여자 복식 16개, 혼합 복식 11개[3] 단 호주 오픈의 유일한 우승인 1968년은 오픈 시대 이전이기 때문에, 오픈 시대 이후로만 친다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은 아니다.[4] 코트는 크리스 에버트에게 4강에서 패배[5] 1918년생으로 1940년대 그랜드 슬램 우승 3개와 프로 슬램 우승 3개를 차지한 적 있으며 1959년에 은퇴했다.[6] 1972년에 출산으로 쉬었지만, 1973년에는 윔블던 4강과 나머지 3개 대회를 우승하면서 막강한 포스를 자랑하던 시절이다.[7] 1992년에는 지미 코너스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의 성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지미 코너스는 두 가지의 핸드캡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뒀다.[8] 당시는 호주 선수권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