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간

 


1. 서진의 황족인 평원왕
2. 서진의 황족인 진왕


1. 서진의 황족인 평원왕



司馬幹
(232 ~ 311)
서진의 인물. 자는 자량(子良).
사마의장춘화의 막내 아들이며[1], 사마의의 전체 아들 중에서는 7남 혹은 6남이다. 사마사, 사마소의 동복 형제로 사마량, 사마주, 사마륜의 이복 형제다.
위나라 때 안양정후, 평양향후에 봉해지고 산기상시, 무군중랑장을 역임했다가 264년에 오등작이 부활하면서 정도백에 봉해졌으며, 265년에 조카 무제 사마염서진을 건국하자 평원왕, 시중에 봉해지면서 1만 1300호의 식읍과 말 2마리를 하사받았다. 사마염은 함녕[2] 초기 봉국에 봉해진 제왕들을 일제히 봉국으로 보냈지만 사마간에게는 정신병이 있으면서 성격은 지극히 순수하고 욕심이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수도에 남겼다.
290년에 종손(조카의 아들)인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자 좌공록대부로 승진했으며, 검리상전[3]과 입조불추[4]가 하사되었다. 사마간은 인사를 반드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으면서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연달아 애첩이 죽자 관에 못을 치지 않고 빈 방에 두면서 며칠 동안 보기도 하고 시간을 행했다가 시체가 썩자 비로소 매장했다.
이복 동생 조왕 사마륜이 혜제를 보정하자 사마간은 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301년에 혜제를 폐위하고 사마륜이 스스로 즉위하자 제왕 사마경이 반발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 때 사마간은 사마경에게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대가 천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공적이오. 하지만 아직 내란이 끝난 것이 아니니 그대는 조심하기 바라오"라고 주의를 줬으며, 결국 사마경이 사마륜을 패사시키고 혜제를 복위시키자 사마간은 시중, 태보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간이 예상했던 대로 사마경은 결국 302년에 성도왕 사마영 등에게 주살당하고 잇따라 팔왕의 난이 가속화하기 시작했으며, 306년에 동해왕 사마월이 팔왕의 난을 평정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회제 사마치를 옹립했다. 사마간은 그를 혐오하면서 문을 닫아 만나지 않고 은거 생활을 했으며, 결국 311년에 여든 살로 훙서하였고 유총이 낙양을 침공하면서 시호를 받지 못했다.
사마간의 장남 사마광(司馬廣)은 요절했으며, 차남 안덕현공 사마영(司馬永)이 뒤를 이었다. 사마영은 290년에 안덕현공에 봉해졌다가 산기상시가 되었지만 영가의 난 때 피살되면서 사마간의 대는 끊겼다.

2. 서진의 황족인 진왕



司馬柬
(262 ~ 291)
서진의 인물. 자는 홍도(弘度).
사마염의 3남으로 모친은 무원황후이며, 혜제 사마충의 동복 형제이다. 서진의 진(秦)왕.
265년에 평원왕에 봉해지고 270년에 여남왕, 277년에 남양왕으로 옮기고 좌장군, 영우군장군, 산기상시가 되었으며, 좌장군으로 숙부 제왕 사마유의 고부에 기거하면서 천하의 주목을 받았다. 289년에 진(秦)왕으로 옮기고 거기장군, 서융교위, 가절, 도독관중제군사가 되고 초왕 사마위, 회남왕 사마윤과 함께 부임했으며, 형 혜제가 즉위하자 낙양으로 돌아와 표기장군, 시중에 봉해지고 291년 3월 대장군이 되었지만 그 해 9월 14일에 훙서하고 시호는 헌(獻)이라서 모두 더하여 진헌왕이다.
자손이 없어서 이복 동생 사마윤의 아들 사마욱이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으나 사마윤과 함께 피살되었으며, 그 후 오왕 사마안의 아들 사마업이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다. 이 사마업이 바로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 사마업이다.

[1] 출생 연도를 따지면 '''사마의가 53세, 장춘화가 43세일때 낳은 것인데''' 오늘날 기준으로도 이 시기에 낳은 아이는 늦둥이 취급을 받는 걸 생각하면 당시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늦둥이다.[2] 275 ~ 280년이다.[3] 검을 차고 대전에 입조할 수 있는 특권[4] 대전에 입조할 때 종종 걸음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