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바하나 왕조
1. 개요
기원전 3세기 말 혹은 기원전 1세기에 데칸지역을 중심으로 시무카 왕이 창설한 중부 인도의 국가이다.
이 왕조를 안드라 왕국이라고도 부른다.[1] '안드라' 는 부족의 이름이고, 왕조 이름만 '사타바하나'이다. 단, '안드라 왕국'은 외부인들이 붙인 이름이며 사타바하나 왕조가 남긴 기록에서는 안드라라는 말은 없다.
데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왕조들 (바카타카 왕조, 칼라추리 왕조, 찰루키아 왕국, 라슈트라쿠타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 야다바 왕조, 마라타 동맹)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세력 중 하나이고 오랫동안 그 힘을 유지하며 마우리아 왕조부터 슝가 왕조, 인도 그리스 왕국, 인도 스키타이 왕국의 남진을 저지하며 수시로 북진을 일삼았다.
2. 역사
2.1. 초창기
사타바하나의 데칸 지역은 본래 마우리아 왕조의 영토였다. 하지만 마우리아 왕조가 힘이 미약해짐에 따라 시무카가 데칸 지역에서 마우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타바하나 왕조이다. 사타바하나는 마우리아 왕조 말기인 기원전 195 - 192년의 북진으로 인도 중남부의 왕국에서 명실상부한 중부의 패자로 거듭나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가 망한 뒤에 사타바하나 왕조는 동쪽으로는 칼링가 왕국 북쪽으로는 마가다의 슝가 왕조랑 칸바 왕조와 경쟁했었다. 기원전 1세기에 슝가 왕조를 물리쳤었고 뒤를이은 칸바 왕조를 아예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타바하나 왕조는 중북부 통틀어 인도 최강국이 된다.
이후 사타바하나는 서북지역에 몰려오던 그리스계의 국가들 인도-그리스 왕국과 스키타이일파인 샤카족 즉, 인도-스키타이 등 이민족들과 경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원후 4년에 동해안과 오릿사의 마하메가바하나 왕조와 20년에 인도-스키타이에게 침략을 받아 쇠약해졌고, 인도-스키타이에게 북쪽 영토를 뺏긴 다음에 같은 스키타이의 일파인 서사트라프 왕조[2] 에게 53년에 한 차례 정복당한다.
2.2. 중후반기
기원후 78년부터 쿠샨 왕조의 침입을 받은 후 서사트라프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저항을 통해 기원후 88년에 사타바하나 왕조는 다시금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던 샤카족의 서사트라프는 말와 지역을 정복하고 기원후 1세기 말 무렵에는 사타바하나 왕조로부터 나식을 포함한 남인도의 서북 지역을 빼앗는다. 이와 같이 어렵던 상황에서 사타바하나 왕조를 구한 왕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 왕이었다. 그는 106년부터 130년까지 왕국을 다스렸는데, 사타바하나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고 칭송받던 그는 파르티아, 서사트라프 등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친다. 그리하여 구자라트. 카타이와르, 라지푸타나, 말와, 베라르, 북 콘칸 등의 지역들을 획득하여 사타바하나의 최전성기를 이루어낸다. 그는 자신만이 유일한 브라만을 자처하며 주변의 크샤트리아 지배자들을 물리쳤다. 북으로는 말와지역에서 남쪽으로 카트나티크 지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다.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는 정복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당시 비문에 따르면 그는 사회개혁에도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서사트라프의 재침입으로 일부 영토를 손실한다.
이후 그의 아들 바시슈티푸트라 풀루마이가 왕으로 즉위하여 약 20여 년간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그 시기에 서북지역의 강국 서사트라프에 의해 구자라트, 말와, 라지푸타나, 북 칸콘 지역 등을 빼앗기게 된다. 서북지역에서는 별 다른 힘을 못 썼으나 남동지역으로 영토 확장에는 성공한다. 비록 풀루마이가 샤카족들에게 영토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그는 사타바하나 왕조의 해군력을 강화하여 외국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경제적인 부를 이루게 하였다.
풀루마이 왕 이후에도 사타바하나에는 몇몇 유능한 왕들이 있었으나 지속적으로 쳐들어온 서사트라프, 쿠샨 왕조 등의 이민족 세력들에 의해 힘을 점차적으로 잃게 된다. 슈리야즈나 샤타카르니 왕 시절에 잠깐 마지막으로 전성기의 영토를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바로 다음시대에 이 영토들은 상실하게 된다. 날로 쇠약해지던 사타바하나 왕조는 기원후 3세기 중후반 무렵 다섯 개의 작은 왕국들로 나뉘게 된다. 거기서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바카타카 왕조의 힘이 강해지면서 완전히 정치력을 상실하고 흡수당하게 된다.
3. 영향
사타바하나 왕조는 지리적으로 중앙 인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마우리아 왕조 이후 남인도 지역에 새로운 아리아인들의 문화를 전파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반대로 북인도에는 남인도의 드라비다인들의 문화를 전파해주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후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 완성된 힌두교 사상이 이전부터 남인도로 전파되기 시작한것도 이 사타바하나 왕조 때부터였다.
또한 사타바하나 왕조는 한창 절정기 시절에는 크리슈나 강 남쪽에 위치했던 촐라 왕조, 체라 왕조, 판디아 왕조 등을 제외한 남인도 지역과 북인도 지역을 지배했었는데 이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거대했던 왕국이었다. 이리 강력했었던 왕국이라 사타바하나는 남인도나 기타 인도 소국들로부터 서사트라프, 쿠샨 왕조와 같은 이민족들의 침입에 좋은 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