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하향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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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상산하향 운동
5.16 조직 숙청

홍위병의 해산

1960년대 문혁 당시 지방의 집단농장으로 보내지는 홍위병들의 모습.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950~60년대 상산하향 운동
3.2. 문화대혁명 시기 상산하향 운동
3.3. 마오쩌둥 사후 상산하향 운동
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4.2. 부정적인 평가
5. 지청문학(知靑文學)
6. 참고문헌

중국어: 上山下乡运动
한문: 上山下鄉運動

1. 개요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까지 중국 공산당이 도시의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민들과 함께 지내게 한 정치운동으로 약칭으로 하방(下放)이라고 한다. 1950년대 중반에 제창되어 1980년까지 꾸준히 추진되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수백만이 넘는 지식인, 학생 등 청년들이 농촌으로 이송되어 농촌 생활 및 노동에 종사했다. 그 영향이 상당했기때문에 한국에서 쓰이는 좌천이나 유배처럼 현대 중국에서도 비징계성 문책 인사나 명예퇴직, 낙후지역으로 발령보내는 것을 관용적으로 하방이라고 일컫는다.

2. 배경


마오쩌둥은 1930년대 옌안 시절부터 지식인이 노동자 및 농민과 서로 결합해야 하며 도시의 지식 청년들이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1939년 5월 4일, 마오쩌둥은 5.4 운동 2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에서 옌안의 청년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중국의 반제반봉건의 인민대오 중에는 중국 지식청년과 학생 청년으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 이 군대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죽은 자를 포함하지 않고도 현재 수백만에 이른다. 이 수백만의 군대는 반제반봉건의 방면군(方面軍)이며, 또한 중요한 방면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방면군만을 의지하기에는 아직 불충분하다. 이 방면구만을 의지하면 적을 이기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비주력군대이기 때문이다. 주력군대는 누구인가? 바로 노동자, 농민 대중이다. 중국의 지식청년과 학생 청년들은 반드시 노동자, 농민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전국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해야 한다. 주력군대 없이, 오직 지식청년과 학생 청년들로 구성된 군대에 의지하여 반제반봉건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전국의 지식청년과 학생 청년들은 반드시 광범한 노동자, 농민 대중과 서로 결합하고, 그들과 일체가 되어야 강력한 군대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마오쩌둥은 노동자, 농민 대중과 결합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을 '반동세력'이라고 비판하며 "청년이 혁명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표준은 그 청년이 노동자, 농민 대중과 서로 결합하기를 바라며 이를 실행하였는지를 따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후 1945년 4월 24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의 정치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광범한 혁명지식인들은 당연히 자신과 농민이 서로 결합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농민은 그들을 요구하며, 그들의 원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마땅히 열정적으로 농촌으로 가서, 교복을 벗고 농민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며, 어떠한 작은 일을 시작하더라도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농민의 요구를 이해하고 농민을 각성시키고 조직시키는 것은 중국 민주혁명의 완성을 위한 매우 중요한 일, 즉 농촌의 민주혁명과 분투이다."

마오쩌둥이 제시한 "지식인은 반드시 노동자, 농민과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사상은 중국 공산통일의 과정에서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공산 중국의 성립 후 수십년 동안 진행될 상산하향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공산 중국 성립 이후, 공산 정권은 군벌의 난립, 중일전쟁, 국공내전으로 인해 산업시설이 파괴되면서 양산된 수많은 실업자들을 구제해야 했다. 1952년 7월 정무원(政務院)이 개최한 전국 노동취업회의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국 전역엔 이미 배치된 실업 인원을 제외하고도 312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들이 있었다.
이 실업자 중 일부는 공산 통일 전 농촌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이었다. 정부 및 군벌의 착취, 자연재해, 전염병이 빈번한 농촌에서의 곤궁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몇몇 운 좋은 사람들은 취업했지만, 대다수는 실업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갔다. 건국 초기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실업자들의 취업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다가 이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농업에 종사하게 하는 정책을 고안했다. 1950년 6월 17일 노동부가 정무원의 승인을 받고 발표한 '실업 노동자 구제를 위한 임시 시행 조례'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실업 노동자 또는 현재 농촌에 친척이 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실업 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자원(自願)의 원칙에 의거하여 그들을 조직하고 격려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생산케 한다. 실업 노동자 구빈원에서 본인과 가족에게 필요한 예비를 지급하는 것 외에 형편을 봐가며 구제 기금을 지급해서 생산 자금의 보조금으로 삼는다. (...) 고향에 자원으로 돌아간 실업 노동자에 대해 실업 노동자 구빈원에서는 증거서류를 발급하며, 현지 인민정부는 가능한 범위에서 원조를 하며 노동자는 고향에서 생산사업에 종사하게 한다.

1950년 전국 신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전개한 후, 인민정부는 16만 5천명의 실업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들은 농민과 같이 토지, 집과 농기구 등을 분배받았다. 일부 중소도시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실업자들을 안배하는 중요한 조치로 삼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 포두시(包頭市)는 72명의 실업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수서(綏西)에 가서 농사를 짓게 했는데,그들은 토지, 집, 농우(農牛)와 종자를 분배받았을 뿐만 아니라 식구 수에 따라 5개월 치의 식량을 전차받기도 했다. 충칭 시에서는 실업 노동자를 조직하고 고향으로 돌려볼 때,정부가 돈을 내어 차표, 승선표를 사줌과 동시에 간부(干部)를 보내서 안배 지역구까지 호송했다.
1950년대 중국의 교육실정도 상산하향운동이 전개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 50년대 초기 중국의 교육 사업은 미진하여 대학교와 전문학교의 졸업생이 많지 않았고 중학교나 초등학교의 졸업생 또한 중국 전체 인구와 비교했을 때 그 수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중학교, 초등학교의 졸업생의 진학과 취업은 큰 문제가 아니었고 중학교 이상의 졸업생은 도시와 농촌에서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불균형 현상이 발생했다. 1952년의 전국 중학교의 졸업생은 18만 5천명이었지만 1957년엔 111만 2천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그해 고등학교와 중등 전문학교는 44만 2천 명을 신입생으로 모집해 중학교 졸업생의 고등 및 중등 전문학교 진학률은 39.7%에 불과했다. 즉, 60.3%의 중학교 졸업생은 취업이나 보습 교육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졸업생의 진학률도 거의 비슷해서 1952년에는 96%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1957년에는 44.2%로 떨어졌다.
한편, 1952년 이전에는 식량을 계획적으로 일괄 수매하여 일괄 판매하는 '통일구입 통일판매'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고 졸업생의 일자리를 분배할 때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졸업생 모두 일자리를 분배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53년 통일구입 통일판매 정책이 시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차츰 뚜렷해졌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집행할 때 일꾼을 안배하는 데 있어 도시의 졸업생을 우선적으로 안배하고 인원이 부족할 때에야 농촌에서 온 졸업생을 모집하면서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가 커졌다. 그리고 식량 분배도 도시를 중점으로 두고 농촌은 도시에 분배하고 남은 수량만 분배했기에 도시와 농촌 간의 생활 수준은 갈수록 차이났다. 이런 문제 때문에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에 몰려들었고 자연히 농촌의 인력품귀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인민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상산하향운동이 개시된 결정적인 계기는 소련처녀지 개간 사업이었다. 1954년, 소련은 식량생산의 향상을 위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우랄 일대에서 대규모 개간운동을 추진하면서 인력 확보를 위해 2년간 총 27만 명의 도시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다. 그 결과 전체 농민생산의 성장 속도는 물론, 전체 농업 생산의 구조를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양식이 부족했던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청년들의 취업문제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1955년 4월, 중국 정부 관계자들은 소련을 방문해 소련이 도시 청년들을 농촌으로 이주시켜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그들은 중공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도시에서 젊고 건장하고 교양을 갖춘 청년들을 황무지 개간 공작에 참가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이득이 되며, 또한 금후 진학을 하지 못하거나 직업이 없는 도시 청년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마오쩌둥이 호응하면서, 상산하향 운동은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3. 전개



3.1. 1950~60년대 상산하향 운동


1955년 8월 11일 '인민일보'는 "반드시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졸업생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생산노동에 종사해야 한다."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사설은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여론을 분석하고 대도시와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와 초동학교 졸업생은 만약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고 일자리도 찾지 못하면 농촌으로 가서 생산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9월, 허난 성 쉬창 지위 농촌공작부가 작성한 '겹현 이씨 집성촌의 향에서 합작화 계획을 진행한 경험'이라는 글을 읽은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매우 훌륭한 문장이다. 각지에서는 참고하도록 하라. 중고등학생과 고급초등학교 졸업생을 합작화(合作化) 공작에 참가하도록 조직하는 것은 특별히 주의할만한 가치가 있다. 농촌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인들은 응당 기쁜 마음으로 그곳으로 가야 한다. 농촌은 넓은 세상이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1956년 2월 27일, 마오쩌둥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를 발표했다. 그는 많은 농촌 출신 젊은이들이 도시에 몰려와서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한 문제를 지적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많은 청년들은 정치적 경험과 사회적 생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구 중국과 신 중국을 서로 비교하는데 능하지 못하며, 중국 인민들이 이전에 어떤 천신만고의 투쟁을 겪어서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의 억압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사회주의를 건립하는 데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대중 가운데서 항상 생생하고 실제적인 정치교육을 진행해야 하고 또한 흔히 발생되는 곤란을 그들에게 진실하게 설명해야 하며, 그들과 함께 어떻게 곤란을 해결할 지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장이자 중공중앙부주석 류사오치는 1957년 2월 18일부터 4월 14일까지 56일간 베이징에서 시작해 베이징-관둥성간 철도 노선을 따라 남하하여 보정, 석가장, 한단, 펑펑광, 신샹, 정주, 쉬창, 우한, 창사, 주주, 광주 등 8천여 리를 시찰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수행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백만 명 가량의 중학교 졸업생이 진학하지 못했으니 반드시 농촌으로 가서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거나 황무지를 개간하든지, 집에서 독습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다른 방법은 전혀 없으며 큰 소란을 피워도 이 길밖에 없다. 절대로 그들의 현실적이지 못한 요구에 쉽게 동의해서는 안 되고,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

3월 22일, 류사오치는 창사 시 중학생 대표와 만나 담화를 발표한 후 4월 8일 '인민일보'에 사설을 실었다. 사설의 제목은 <중학교와 초등학교 졸업생이 농업생산에 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이었다. 사설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올해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대부분 진학하고 일부분은 진학하지 못하고,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졸업생이 일부 진학하고 대부분 진학하지 못한 상황이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년(1956년)과 몇 년 전에,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거의 모두 진학하고, 중학교의 졸업생이 대부분 진학하고 일부 진학하지 못한 상황은 오히려 일시적인 현상이며, 중등교육은 고등교육의 발전의 요구를 따라 잡지 못 하고, 고등학교 졸업의 양적 성장은 아직 고등교육기관이 신입생을 모집하는 것을 따라잡지 못한 특별한 조건 하에 나타난 특별한 현상이다. 상황의 변화는 중국의 교육 사업이 이미 비교적 정상적인 상태로 돌입하기 시작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올해 새롭게 나타난 이런 상황은 앞으로 다소 발전할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장기적인 현상이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의 책무는 먼저 취학 연령 아동이 모두 입학하는 것이다. 차츰 초등학교를 보급함과 동시에 우리는 계속해서 중학교 교육,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교 교육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동안에 전반적인 추세는 장차 더 많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생이 진학 하지 못 하고,반드시 생산에 참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안배하는가이다. 자기 학습을 하든지, 또는 민간이 설립한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안배의 방법이며, 나중에 취업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장 중요한 방법은 진학 하지 못한 학생을 도와 취업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취업할 것인가? 국가기관, 사업기관과 기업 단위는 현재 모두 기구를 정선하여 인원을 조정 중으로, 일이 년 내에 비록 얼마간의 직공을 모집할 수 있지만 그 수량이 많지 않고 아주 적다. 이 밖에 일부 도시의 서비스업과 수공업에는 아직도 얼마간의 수습생과 직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말하면, 가장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농촌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업종 또한 농업이다. 그러므로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졸업생을 안배하는 주요한 업종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들은 취업시키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토지개혁과 농업합작화는 중국 농촌의 두 가지 역사적인 중요한 개혁이다. 합작화 이후의 농촌은 새로운 농촌이고, 농민은 새로운 농민이다. 그러나 현재의 농촌과 농민은 아직 문화가 결핍되어 있다. 농업합작사의 경영관리임무를 잘 처리하기 위하여, 그리고 정진적인 농업 기술의 혁신을 진행하기 위하여, 농촌은 문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며, 농민 자신도 문화의 향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교양 있는 사람이 농민이 될 필요가 있다. 대량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농업생산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 만약 금년부터 해마다 약 백만 명 또는 백만 명이 넘는 중학교 졸업생이 농촌으로 가면 5년 이내에 400만에서이나 500만 정도에 이르는 중학교 졸업생이 농업생산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해마다 보다 더 많은 중학교 졸업생이 농촌으로 가서 농민대중과 함께 생산적 노동 과정에서 긴밀하게 결합한다면, 농업합작사의 경영관리임무와 농업의 기술혁신은 커다란 추진력을 얻어서 중국의 농촌을 촉진하여 또 다른 중요한 개혁 즉, 기술혁신을 실현하게 되면, 중국의 농업생산을 촉진하고 공전의 발전 속도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어떤 사람은 진학 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 것이,"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확실히 일부 사람들은 개인의 명리를 간절히 바라고 많은 돈을 쫓거나 대우가 좋고 비교적 가벼운 일을 하려고 하며, 봉급이 적고 대우가 좋지 않고 비교적 어려운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설령 그 일이 국가와 인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쁜 풍조이다. 우리는 청년들이 이 나쁜 풍조 앞에서 입장을 확고히 하고 이 나쁜 풍조에 휩쓸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중국 혁명이 성공하기 전에, 중국공산당원과 많은 혁명가들은 죽음이나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은 고향을 떠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명리를 따지지 않고, 좋은 대우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의 존망과 인민의 화(禍)복(福)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혁명사업의 승리를 위하여, 용감히 희생하고, 각고 분투하며,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즉시 대신하였으며, 혁명에 실패하면 바로 재기하여 계속해서 전투했다. 이처럼 위대한 혁명의 패기와 자아희생정신을 가진 사람을, 과거 반동 통치자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반역자"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오직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인민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며, 개인의 앞날을 생각하고 국가의 전망을 생각하지 않는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역사의 결론은 공정한 것이다. 혁명은 이들 "바보"와 많은 인민의 노력에 의존하여 전국에서 승리하였고 반혁명을 전복시켰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우리의 이상은 아름다웠지만 우리의 노정은 힘겨웠다. 조국건설의 각 방면은 더 많은 이들 "바보"에서 비롯됐으며, 이러한 "뚝심"을 발휘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다.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손해를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이며 저속한 취미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류사오치의 이 같은 사설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중학교와 초등학교 졸업반의 정치교재가 되었다. 한편 마오쩌둥은 1월 25일에 최고 국무회의를 소집해 중공중앙부가 제출한 '개요초안'을 토론했다. 그는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건설 고조의 기초 위에서 농업생산과 농촌의 업무의 발전에 대한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며, 전국 농민과 농업종사자의 분투 목표로서 농업 이외의 각 하옥의 작업을 신속하게 따라잡아 사회주의 고조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중공중앙정치국은 <전국농업발전개요초안>을 제출했는데, 이 초안의 제39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1956년부터 각지의 상황에 따라, 각각 5년이나 7년 내에,도시의 실업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현재 도시의 실업 인원들이 모두 취업의 기회로 획득케 할 것이다. 도시에 취업할 수 있는 인원 이외에, 그들의 취업 수단은 교외로 가거나 농촌으로 가고 또는 농지구나 산간 지역에 가서, 농업·임업·목축업·부업·어업 등 각종 생산사업과 농촌의 과학, 문화, 교육, 위생 사업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후 정부는 도시에 거주하는 실업 청년들에게 농촌으로 가서 생활하고 농업에 종사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1957년 10월 25일, 중공중앙부는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전국농업발전강요>에서 처음으로 '상산하향'을 공식 언급했다.

도시의 중, 소학을 졸업한 청년들 가운데 진학하였거나 취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국가의 호소에 반드시 호응하여 상산 하향하여 농업 생산에 참가하고 사회주의 농업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참가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85%가 농촌에 산다. 농촌이 만약 발전하지 못하면, 공업 또한 단독으로 발전할 수 없다. 농촌으로 가서 일을 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며,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해서 도시의 실업 청년들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 노동에 투입하는 정책을 공식화한 인민정부는 이른바 '청년 개간대'를 창설한다. 1955년 여름과 가을 동안, 청년단은 전국에서 조직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베이징, 상하이, 톈진, 허베이, 산둥, 헤이룽장, 후베이, 후난, 저장, 푸젠, 장시, 윈난, 광둥, 지린, 랴오닝, 허난 등의 성, 시에서 1년간의 시간 내에 50여 개의 청년 원정 개간 대를 조직했는데, 여기에 가담한 청년들의 수는 3만 7000여 명이었고 참가를 신청한 청년은 약 100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중공중앙부는 1956년 하반기부터 새로운 개간대 조직을 중지했다. 많은 개간대가 경험이 부족하여 지역을 잘못해 황무지의 토질이 지나치게 척박하거나 토지의 양이 적은 곳에서 무리하게 개간하려 했고, 어떤 개간 대는 도시 청년의 비중이 너무 커서 황무지를 어떻게 개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중공중앙부는 대부분의 개간 대를 국영농장이나 농영합작사와 합병시켰다.
이러한 상산하향 운동은 여러 부작용이 있었지만 중국의 미개척지를 개간하여 식량 생산 증진에 어느 정도 기여했고 실업률을 대폭 줄일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무리하게 대약진 운동을 펼치다가 말아먹으면서 상산하향 운동에도 차질이 생겼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진행된 대약진 운동은 생산력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해 국민 경제의 주요 비율의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국가와 인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입혔다. 또한 도시에서 농촌으로 온 청년들은 농촌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범죄를 일으켰고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결국 중공중앙부는 대약진 운동의 중단을 선언하는 한편 상산하향 운동 역시 잠재적으로 중단시켰다. 다만 이미 농촌으로 가 있는 청년들의 도시 복귀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1962년 10월, 국무원 농림부서는 저우언라이가 직접 서명 발급한 회의 통지에 따라 처음으로 국영 농장, 임업장, 목장, 어장 등에 대도시에 거주하는 정선 직공과 청년학생을 배치하기 위한 보고회를 열었다. 회의는 각 지역과 각 성,시, 자치구 농림부서의 책임자가 정선하고 배치한 상황에 대한 보고를 청취했으며, 계속해서 정선과 배치에 관한 관련 정책과 물자 보장의 문제를 논의했다. 또한 회의는 도시 지식청년들을 농촌으로 하향시키는 문제를 안건에 포함시켰다. 저우언라이는 도시의 인구가 매년 100만여 명 증가하는 상황에서 그 일부분을 하향 배치하여 농업으로부터 활로를 찾아야 하며 농장, 임업장, 목장, 어장 등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도시의 잉여 노동력을 배치하기 위한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농촌에 배치하는 학생은 일반적으로 18세가 된 청년이어야 하며 나이가 너무 어리면 노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11월 22일, 중공중앙부와 국무원은 관련 부서에 상산하향 정책의 추진을 지시했다. 이 새로운 정책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1) 배치 대상은 대도시에 거주하며 금번 정선 과정 중에 정선되고 하향 조건을 갖춘 직공과 금년 졸업생 중 진학이나 취업하지 못한 18세의 독립적인 생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청년 학생 또는 기타 유한 인원에 국한한다.

(2) 배치 방식은 우선 기존의 국영 농장,임업장,목장,어장에서의 퇴직 대체 또는 보충 방식으로 배치하다; 조건을 갖춘 곳에서는 확장 방식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 농장, 임업장, 목장, 어장 등을 새로 건설하는 것은 투자비가 많고 효과가 적으며 배치 인원수도 적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

(3) 배치 계획은 반드시 성급 지도자가 심사하고 안건을 최종적으로 확정해야 하며, 하항 인원과 배치 단위가 맞아야 하고, 경비와 물자를 서로 결합시켜야한다. 배치의 순서는 일반적으로 노동력이 먼저 하향하여 거주의 기초를 만든 후에 가족을 받아들여야한다.

(4) 배치 경비의 지불은 최대한 경제적 효과를 발휘해야한다. 1962년과 1963년 2년 간 3억 5천만 위안의 배치이용 예산이 안배되어,1962년에 우선 2억 위안을 미리 지불하며, 특별비용은 그 용도로만 사용해야함을 보증한다. 경비의 지불 항목과 표준, 그리고 예산의 관리 등에 대해 중앙 주무부처는 공동으로 통지하고 하달한다.

(5) 필요한 각종 항목의 물자는 먼저 1962년에 지방의 재고 조사와 자산에 따른 물자를 유용하며, 1963년에는 단계적인 보고를 거쳐, 국가의 전문적인 계획을 수립하며, 계획 위원회를 통해 물자를 균형 있게 안배한다. 하향한 인원의 일용품 공급은 현지 상업 부문의 공급과 판매 계획에 포함시켜, 공급은 보증해야한다.

(6) 이 일의 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무원 농업부서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지시에 따라 전문적인 지도 위원회를 조직한다. 지도 위원회는 농지 개간 부와 임업부 그리고 수산부가 공동으로 조직하며, 근무 장소는 농지 개간 부에 설치한다. 각각의 대 지역은 농업부서의 관리를 책임이고 각 성, 시, 자치구도 전문적인 지도 위원회와 사무 기관을 창립한다.

그러나 도시 청년들을 하향시키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농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유한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을 하향 배치시킬 때마다 국가의 재정이 1000위안 가량 지불해야 해서 재정 부담이 매우 무거웠다. 1963년 5월 말까지 농장과 임업 장에 하향하기로 한 33만 2천 명 중 오직 15만 4천명만이 하향을 완료했다. 이에 중앙배치임무지도부는 상산하향의 임무를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1963년 6월 29일부터 7월 10일까지 각 대도시 정선 직공과 청년 학생 배치 임무 지도자 그룹 팀장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 11개 주요 성과 시의 주관 배치임무 책임자들도 참가했다. 당시의 회의에서는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산 대에 편입될 것인지를 중심 의제로 삼아 진행하였다.
회의 결과, 중앙배치임무지도부는 정책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첫째, 하향하는 대상은 대도시 출신만 배치하는 선에서 벗어나 작은 도시와 농촌 출신으로 확대했다. 둘째, 농장에 주로 배치하던 것을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셋째, 평지에서만 배치하던 것에서 벗어나 산간 지역에도 청년들을 하향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저우언라이는 여기에 더해 농촌 생산 대에 청년들을 배속시켜서 노동하고 생활하는 방안을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내년에 70만 명을 초보적으로 배치 계획하고, 만약 그들 모두가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한다면, 사람마다 200위안이고, 단지 1억4천만 위안이 필요하다. 가흥 한 현에서 1100여 명을 배치했으나, 큰 난리가 나지 않았다. 가흥의 전문적인 지역에 5만 여 명을 배치했고, 절강성(浙江省) 전체로는 9만9천 명을 배치했다(모두 도시 거주민의 하향을 포함하고 있다). 절강처럼 땅이 적고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할 수 있다면, 기타 지역에서는 생산 대에 많은 사람이 편입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주와 가흥 같은 도시는 도시 인구의 부담이 다른 지역보다 과중하지 않고, 항주에서의 생활은 이제까지 급박하지 않았으며, 소주의 생활수준은 높을 뿐만 아니라, 하향작업도 잘 진행되고 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고 하는데, 소주와 항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지역에서도 반드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가흥의 한 전문적인 지역에서 5만 여 명을 배치했으니, 전국 범위의 160개 전문적인 지역이 모두 이렇게 하면, 바로 800만 명을 배치할 수 있다. 만약 모두 가흥을 따라 배우고, 항주를 뒤쫓는다면,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1964년 1월 9일, 중공중앙부 총서기 덩샤오핑은 중앙 서기처의 회의를 주재하여 지식청년 상산하향에 대해 토론했다. 그는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첫째, 도시 지식청년의 하향은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 하는 것을 위주로 하며, 이것은 장기적인 대사이다. 매년 100여 만 명을 배치한다. 생산 대에 편입 시키는 방법을 이용하면,1인당 배치비용은 200위안을 넘지 않을 것이다. 농장에 배치한다면 1인당 1000위안이 필요하니, 만약 100만 명이 농장에 배치된다면,10억 위안이 필요하며,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둘째,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성마다 약간의 현(县)들을 고르고, 토지의 잠재 능력이 있는 지구와 산간 지역에서 잠재 능력이 있는 지구에 대량으로 청년을 배치하며, 치산치수하는 것과 알칼리성 토지를 활용하는 것을 결합한다면, 투자의 이익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민경제 발전 계획과 결합할 수 있다.

셋째, 한 인민 공사에 약 백 명을 배치하면, 바로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다. 하향한 동지의 반응에 따르면, 농촌에는 세 가지 역량이 있는데, 첫째는 현지 간부이고, 둘째는 제대 군인이며, 셋째는 하향한 지식청년이다. 이 세 가지 세력이 잘 협조하면, 바로 일을 잘 할 수 있다.협조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집중적인 방식을 취하면 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그들을 공고히 하고 문화 오락 활동과 여가 학습을 하는 것을 쉽게 조직할 수 있고,신문 및 정기 간행물도 쉽게 공급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지적하고 도울 수 있으며,각자가 밥을 지을 필요도 없고, 과학 실험도 잘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쉽게 볼 수 있다.집중적인 방식을 취하면 검사도 쉽게 할 수 있다. 주택 배치 방면에서는 사원의 기만하지 않는다. 다른 농업 투자를 지출하여 자세히 계획하며, 배치비와 농업 투자가 서로 결합되게 사용한다. 이것은 섬멸전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일을 하는데 있어 조리가 없고 개별적이어서는 안 된다. 산서 남부 지역에서 알칼리성 토지를 활용하기 위해, 투자하며, 약 백만 명이나 50만 명을 배치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천진 남부 창(沧)현에도 하나의 거점이 될 수 있다. 남방의 인구가 적은 지역 중 대별산 같은 지역도 하나의 거점이 될 수 있으며, 청년을 배치하여 치산치수할 수 있다.이러한 지역을 선택하고, 지식 청년도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 청년에게 이상을 줌으로써, 자연을 개조하게 하면, 보람이 있을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도시 청년이 하향하여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단지 농인의 역할만을 담당하면, 그들을 공고히 할 수 없다.

네 번째, 청년을 동원하여 하향하기 전에 훈련해야하며, 한 달이나 두 달 모두 괜찮다. 어쨌든 도시에서 양성 반을 운영하며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청년들에게 기량이나 기술을 전수해야한다.

다섯 번째, 그들에게 신문 및 정기 간행물을 공급하며, 일선에는 반드시 《중국청년보(中国青年报)》를 공급하고, 발행량을 증가해야 한다. 신문에 관련 문장을 써서, 농업 방면의 지식과 과학 방면의 지식을 보충한다. 또한 여러 가지 소책자를 편저하며, 국가 보조금의 방법을 이용하여 농촌에 공급한다.

그 후 1963년 10월, <도시 지식 청년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농촌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는 것에 관한 결정> 초안이 완성되었다. 이 <결정> 초안은 1963년 11월에 개최된 '도시 청년 하향 및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경험 교류회'에 넘겨져 널리 의견을 구하였다. 그리고 1964년 1월 9일, 중공중앙부 서기처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통과되었으며 1월 17일에는 중공중앙부와 국무원의 명위로 각 대 지역과 각 성과 시, 자치구에 발송되어 계속되어 의견을 물은 뒤 모두의 동의를 받고 마침내 공표되었다.
그 후 각지 당 위원회와 정부는 <결정>이 지시한 바에 따라 상산하향 정책을 보다 더 착실하게 수행했다. 1964년 전국에 68,000여 명의 청년들이 하향 배치되어 연간 계획의 67%가 달성되었고 도시에 거주하던 주민 98,000명을 동원해 고향으로 돌아가 식량을 생산하게 했다. 그 해 동원 배치 업무를 완성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는 일부 지역에서 계획을 크게 만들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일부 지역에서는 계획을 늦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일하던 중, 많은 의식 문제와 지역 사이에 격차가 뚜렷했고, 일부 배치 정책을 실현시키지 못했던 것 등을 폭로했으며, 또한 지식 청년에게 타격을 주거나 박해를 하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생겼다.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중공중앙부는 1965년 초부터 다음해 상반기까지 지식청년 업무 회의를 세 번 개최해 <결정>의 진행 상황을 검토하고 상산하향 운동의 부작용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1965년 2월 베이징에서 배치 업무 회의가 열러 그동안의 실적을 최종 점검했다. 저우언라이는 려대 시 김현, 리수구 생산 대에서 청년 27명을 하향 배치해 식량과 땅콩, 과수를 증산했다는 보고에 크게 기뻐하며 "성마다 반드시 리수구가 있다. 성마다 반드시 형연자와 동가경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중남 지역의 후난 성 강연 현에서 3000명의 하향 청년을 배치해 한 생산 대에서 3명이나 5명을 배치하고 생산에 필요한 인력에 대해 대중을 통해 토론한다는 말을 듣자 "반드시 성마다 가흥과 강영이 있어야 한다."며 기뻐했다.
허베이 성 보지현 두장장 대대 당지부 서기 양기는 그들의 농촌에서 사람마다 4여 묘의 토지가 있어서, 10개 생산 대에서 천진 시 하향 청년 80여 명을 배치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이 청년들은 농민을 스승으로 모시고 10여 중의 농사일을 배우게 하고 농촌 생활을 보내고 있으며, 설날 동안 도시에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농촌에서 빈농 스승과 함께 혁명적인 설을 지냈다고 보고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좋다! 이 생산 대를 잘 만들면 모범이 될 수 있겠다. 곳곳마다 리수구가 있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하루 종일 각 지역 대표의 보고를 청취한 후 2월 28일 배치 업무 회의에서 상산하향 운동의 인식을 향상시키라고 강조하며 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배치 업무는 큰 업무이고 완전히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지만, 1년 동안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또 몇 년 동안에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도시 청년의 예비 노동력과 일부 방치된 노동력을 동원하여 농촌으로 가서 농업에 참가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바로 도시와 농촌을 적절히 결합할 뿐만 아니라 공업과 농업, 그리고 유체노동과 정신노동도 결합하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이 세 가지의 차이는 차츰 축소되고 있다. 이것은 장기적인 일이 아닐까? 우리는 이제 농촌과 도시를 일치하게 만들어서 반드시 도시는 농촌이 되고 농촌이 도시가 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의 지역이 아주 넓어서, 이것은 우리가 20세기 안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것이다. 3개의 차이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 단계이며, 우리는 반드시 기초부터 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마오 주석이 창도한 노동 제도와 교육 제도이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청년단이 당의 조수이며 배치 업무는 반드시 한 청년단이 조수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청년단이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분야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저우언라이의 지령에 따라, 중앙 배치지도그룹은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의 배치 구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

1) 동북지역: 50%의 사람들을 식량과 면화를 생산하는 지역으로 배치하고, 25%의 사람들을 산간 지역에 배치하며, 25%는 가뭄과 장마에 대비한다. 길림성의 하향 청년들은 주로 5개 관개 지구로 배치하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토양을 개량해서 논을 발전시킨다. 동북 농지 개간총국은 북경 4만 명의 청년들을 받기 위해 준비한다.

2) 화북지역: 본래 대다수 사람들을 식량과 면화를 생산하는 지역으로 배치했지만, 산간 지역으로 분산 배치한다는 결정에 의거하여 회의 후 조정을 진행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상산으로 배치한다. 또한 황화(黄骅)일대에는 농장을 만들고 저지의 알칼리성 토지를 개조하며, 북경과 천진 두 시(市)의 지식 청년들을 주로 변방 지역에 배치한다.

3) 서북지역: 15년 내에 내지에서 20만 명의 퇴역 군인을 배속할 뿐만 아니라, 도시 지식 청년 86여 만 명도 받아들이며, 주로 국영 농장과 임장, 그리고 목장에서 배치할 것이다. 그 성(省)과 구(区)의 하향 청년을 주로 인민공사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것으로 할 것이다.

4) 신강 생산과 건설 병단: 매년 내지 대도시에서 5만 명의 지식 청년과 2만 명의 퇴역 군인을 배치할 예정이다.

5) 중남지역: 대부분을 사상으로 배치한다. 1965년에 이미 3만 명을 배치했는데, 이는 계획 배치 총 인원수의 1/3을 차지한다.1966년의 계획 배치 인원수는 배치 총 인원수의 50% 이상이 될 것이다. 광동(广东)은 소관(韶关)과 조경(肇庆)일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배치한다.

6) 서남지역: 세 번째 노선과 첫 번째 노선의 건설에 협동하기 위하여, 하향 청년은 주로 산간 지역과 소수 민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배치하다. 사천(四川)평원은 인구가 너무 많아서, 배치의 중점은 대파산(大巴山)을 개발하는 것에 두고, 달현(达县) 전구(专区)와 서창(西昌)전구, 그리고 량상(凉山) 지치주로 포함한다. 구이저우 성(贵州省)의 중점은 주로 동남 묘족(苗族)산간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1962년부터 도시의 인구를 계획적으로 동원해 하향시키기 시작해 1966년 8월까지 전국 범위에서 도시 지식청년과 실업자 196만 9000명이 상산 하향했다. 그 중 지식청년은 129만 2800명에 달했고 모든 하향 인원수의 65.6%를 차지했다. 상산 하향한 지식청년 중 인민공사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87만여 명으로, 하향 지식 청년 총 인원수의 67.3%를 차지했다. 배치 방향을 조정한 후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산하는 비율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과거엔 하향 청년은 주로 농장에 배치되었고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산하는 비율은 6%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64년엔 61%로 폭증했고 1965년엔 63.1%가 되었으며 1966년에는 70%를 돌파했다. 이렇듯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 동안 수많은 청년들을 배치하면서 소요된 재정 지출은 약 9억 8700만 위안에 달했다.
이 시기 상산하향 운동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후난 성의 하향인원은 1964년에 98%이상이 되었으며 신강 생산과 건설 병단도 98%를 넘었으며 다른 지역도 대체로 하향 청년들이 농촌에서 살림을 꾸리고 사업을 일으켰다. 많은 청년들은 농촌에서 농민을 스승으로 모시고, 원래 농촌에 있던 청년들과 결합했으며, 농촌에 있는 당과 당 조직의 지도하에 많은 농민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 기존 간부와 대중은 그들을 "정치 문화 업무의 돌격대원, 생산의 일인자, 지도자의 조수"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산시 성 58개 대대 1951명의 하향 청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술자, 회계원, 보관원, 부녀 주임, 당 지부 서기, 민병련 소대장과 중대장, 생산 대 부대장, 당 지부 부서기로 선발된 인원은 29%를 차지했으며 100여 명이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3명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가족 전체가 하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배치할 수 있었으며, 온 가족의 남녀노소가 모두 계획적으로 노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조건하에 채소를 심고 돼지를 기르고 닭 모이를 주는 등 부업 생산이 허용되었으며 생활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또한 변방의 건설에 참가한 지식 청년과 퇴역 군인은 농지 개간 전선 상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신강 생산과 건설 병단 농업 일사(一师)의 통계에 따르면, 상해에서 하향한 청년들 중 "모범"으로 선정된 공인이 8천여 명에 달했고 각종 일인자 칭호를 얻은 이는 2만 명이었고 민병련에서 간부로 된 사람이 490여 명, 각종 기술자 210명, 관리 인원이 520명이었다. 내지 국영 농장에도 하향 청년들이 업무를 잘하기로 유명해진 기관이 많이 있었는데, 광동 주장 농장과 강서 동고산 개간장, 그리고 강소 운대 농장과 절강 섬문 농장 등이 이에 해당했다.
이렇듯 1966년 8월까지의 상산하향 운동은 도시의 부담을 덜고 농촌의 노동력을 증진시키고 경제를 진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0년엔 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식량 생산량이 밑바닥에 이르렀다가 상산하향 운동 전개 후 해마다 다시 상승하여 1966년에 4280억 근을 생산해 1960년의 생산량보다 1410억 근을 더 생산했다. 그리고 1960년의 식량 수매량은 1021억 근으로 생산량의 35.6%를 차지했으나 1965년의 식량 수매량은 973억 근으로 83억 근 감소했으며 총 생산량의 25.3%를 차지했다. 이로서 중국인들은 기근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다만 상산하향 운동이 마냥 좋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중앙 배치그룹은 1965년 무렵 여론을 수렴해 상산하향 운동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파악했다.

(1)일부 하향 인원의 사상이 불안하다. 그들은 몸은 농촌에 있으나 마음은 아직 도시에 있다. 어떤 농촌의 간부는 “오래 가지 못한다(兔子尾巴长不了).”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내버려 두고 간섭하지 않았다. 일부 청년들은 노동을 하고 싶지 않고, 사상도 사그라졌다.

(2)상당수 사람들의 생활이 아직 자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택도 없고, 병이 생기면 돈이 부족해서 치료하지 못했다. 후북성(湖北省)의 조사에 의하면, 하향 청년 중에 자급하지 않은 사람 수는 4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주택을 만들지 않은 사람 수가 64% 이상 차지했다. 가족으로 하향하여 방치한 노동력 중에 자급하지 않은 사람 수는 63%를 차지하였다. 안휘(安徽) 비동현(肥东县)은 상해에서 하향한 사회 노동력 600여 호(户)모두 2400여 명을 배치했으며, 어려운 생활 등의 원인으로 다시 도시로 돌아가거나 외지로 나가던 사람 77호가 있고, 모두 256명 있었는데, 또한 어떤 사람이 결국 파산하게 되었다. 개별 생산대의 하향 청년들이 국가 보조금의 기한이 끝난 후, 생활이 몹시 어려워졌으며, 대량으로 도시로 돌아갔다.

(3)하향 청년들을 차별하거나, 타격을 주거나 또는 인격을 모욕하던 법을 어기고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중공중앙부는 이 사건을 거듭 엄격하고 진지하게 처리했지만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이후 문화대혁명 초기 하향 지식청년들이 대거 도시에 돌아간 주요 원인이었으며 일부 지식 청년들은 국가에 불만을 품고 아예 반란을 도모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당시 인민정부는 상산하향 정책을 상당히 진지하고 심도 있게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집행했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아주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비교적 적절한 조치를 내리고 있었다. 농촌으로 내려간 청년들 관리도 과거에 비해 나름 괜찮은 편이었고 상당수 청년들이 농촌에 비교적 잘 적응했으며 농촌 경제 증진에 큰 효과를 거두었다.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습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덩샤오핑이 계속 핵심 권력을 쥐고 있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3.2. 문화대혁명 시기 상산하향 운동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가 통과되었다. <통지>는 학술계, 교육계, 언론계, 문예계와 출판계의 자산 계급 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했으며, 이런 문화 영역의 지도권을 쟁취하자고 호소했다. 이 <통지>의 영향 하에, 5월 29일 밤 청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의 학생 수십 명이 원명원에서 집회를 열고 홍위병을 조직하여 마오쩌둥을 보위하겠다고 선언했다. 6월 1일, 청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는 <홍위병>으로 서명한 대자보를 정식으로 내며 "무산 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단호하게 진행하자."고 선언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은 중공 중앙 제8차 중앙전체 회의에서 일부 고등교육기관의 대표를 특별히 초청했다. 또한 청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의 홍위병에게 특별히 편지를 보내 홍위병의 정신에 지지를 표시했다. 그 동시에, 마오쩌둥은 이 편지와 홍위병이 쓴 대자보 두 편을 회의의 서류로 인쇄, 배포하여 회의에 참가한 중앙 위원에게 내주고 공부하라고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홍위병들은 기뻐 날뛰었으며 각 대학교에 있던 학생 단체들은 순식간에 홍위병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9월 5일, 중공 중앙부와 국무원은 정식으로 통지를 보내 6일부터 고등 교육기관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베이징으로 와서 문화대혁명을 참관하고 경험을 서로 교류하라면서 무료로 기차를 타게 해주고 생활 보조금도 보내준다고 알렸다.
마오쩌둥은 8월 18일과 31일, 그리고 9월 5일, 10월 1일과 8일, 11월 3일, 10일과 25일에 8번이나 천안문 광장에서 전국에서 몰려온 1100만 명의 홍위병들을 접견했고 홍위병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홍위병은 사회나 기관, 기업, 학교 등을 향해 반역자를 찾아내거나 네 가지 구습을 쳐부수거나 주자파와 싸우는 등의 '혁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구 사회에 남아있는 낙후하고 썩어 빠지고 더러운 것을 맑고 깨끗하게 하며 오물을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경찰 당국에게 이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산하향 정책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1966년, 인민정부는 67만 명을 동원해 상산 하향시키려 했다. 이후 상반기에 36만 명이 농촌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홍위병의 등장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없었고 결국 하반기에는 모든 집행이 중단되었다. 또한 이미 하향했던 지식 청년도 대거 도시에 돌아갔다. 상산하향 업무를 맡은 관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뿐 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1966년 하반기에만 6, 7만 명의 하향 청년들이 관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홍위병에 가담해 "연락소"를 창립하고 더 많은 하향 청년들을 선동해 도시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그들은 얌전히 도시에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하향 청년들은 그들을 하향시킨 학교나 동사무소의 간부를 찾아내 마구 폭행했으며 지식청년 업무를 책임진 지도 간부를 붙잡아서 강제로 자아비판하게 했다. 그 지도 간부들은 류사오치의 수정주의 노선을 집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홍위병으로 전향한 청년들에게 온갖 공격을 당했다. 청년들은 서류를 불태우고 캐비닛을 박살내 많은 자료들을 소실시키고 여성 직원들을 강간했다. 중앙 배치 사무실 직원들은 이 끔찍한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도시로 돌아간 홍위병들은 갈수록 악랄해졌고 국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만 가는 사회의 혼란과 불안 앞에서, 정부 조직은 물론 공장과 학교도 문을 닫았으며, 많은 외국인들도 화를 입었다. 1968년 7, 8월이 될 무렵, 홍위병 운동은 마오쩌둥이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각 대학교와 중학교에서 파벌이 무더기로 형성되어 폭력 투쟁을 지속했고 홍위병을 제지할 수 있는 법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홍위병끼리 서로를 반동분자로 몰아가며 파벌 투쟁을 벌였고 일부 지역에선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져 내란의 조짐까지 일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마오쩌둥은 수습에 나섰다. 1968년 7월 28일, 마오쩌둥은 북경에 있는 홍위병 대표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희 소수 대학교들은 폭력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공인과 농민, 그리고 전사와 민중이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학생도 좋아하지 않고 원래 너희들을 옹호하던 사람들까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공인, 농민, 전사, 대다수의 학생과 단절되었다. 무력이나 폭력으로 투쟁하는 것을 하지 말고 말과 글로써만 논쟁해야한다."

그해 8월 마오쩌둥은 화북, 중남, 화동 등 각 지역을 시찰하면서 "홍위병에게 교육을 진행하여 학습을 강화해야 한다."며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또한 7월 27일 수도 공인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는 홍위병 사상을 처음 퍼트렸던 청화대학교에 투입되어 마오쩌둥의 최신 지시를 공표했다.

"무산 계급교육혁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며, 공인 대중들이 참가해 해방군 전사와 서로 협동하고 학교의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노동자 가운데 무산 계급 교육 혁명을 끝까지 전개하던 열성분자 같이 혁명의 단결을 실행해야 한다. 공인 선전대는 반드시 장기간 학교에 있어야 하며, 학교에서 모든 투쟁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학교를 지도해야 한다. 농촌에선 오히려 노동자 계급의 가장 미더운 동맹자인 빈하중농이 학교를 관리해야 한다."

같은 날, 중공중앙부, 국무원은 <공인 선전대를 보내며 학교에 투입하는 것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고 8월 말까지 수도 59개 대학교와 전문대학에 공인선전대가 투입되었다. 이어서 전국 각 도시의 대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그리고 상부 구조 중의 각 영역도 보편적으로 공인 선전대나 군인 선전대가 투입되었다. 10월 14일, 정식으로 <대학교, 중학교, 초등학교가 수업을 재개하고 혁명을 하는 것에 관한 통지>를 보내 보냈으며, “전국 각지의 대학교,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즉시 개학해야한다”며 “한편에서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한편에서는 개혁을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홍위병이 이미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고 간주했음을 의미했다. 이후 홍위병의 열기는 점차 사그라졌다.
그런데 막상 교육 시스템을 재가동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과거의 관례에 따르면, 당해 졸업생은 즉시 진학하거나 취업할 곳을 알아봐야 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을 전개하면서 학교에서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을 진학시키거나 취업시켜주지도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학교에 체류하면서 혁명을 지속했다. 그 결과 1966년, 1967년, 1968년 3년 동안의 졸업생들이 학교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는데 그 숫자는 1100만 명에 달했고 그 중 도시에 거주하는 중, 고등학생은 약 400만 명이었다. 이러니 아직 초등학교에 체류해서 급히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 69년과 70년 졸업생의 부담이 매우 커졌는데, 하필이면 이때 교육 시스템이 재가동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 학교에 체류하는 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이 막장 상황을 기가 막히게(?) 해결한다. 1968년 4월 21일, 베이징 시 혁명 위원회는 <중학교졸업생을 배치하는 것에 관한 통지>를 보냈다. 통지는 마오쩌둥이 집필한 <사회주의 고조>라는 책의 부연 설명을 인용하여, "농촌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은 반드시 거기에 즐겁게 가야 한다. 농촌은 광활한 천지이며, 거기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했으며, 지식 청년들에게 자발적으로 상산하향을 신청하며 국가의 배치에 따라서 가장 어려운 곳에 가야한다고 요구했다. 이어서 산둥 성의 제남 시와 청도 시, 그리고 상하이와 귀주 등 성과 시의 혁명 위원회도 잇따라 지식 청년들을 동원하여 농촌으로 가는 것을 결정했다.
이는 지식청년들에게 상산하향에 참여를 강요하게 된 중요한 근거가 되어 상산하향에 참가하는 지식청년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8년 10월 중순까지 16개의 성과 시, 그리고 자치구에서 70만여 명의 도시에 거주하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이 상산 하향했다. 상황이 이토록 갑작스럽게 바뀌자, 이미 주관 상산하향 업무의 부문과 배치 업무를 완료한 지역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1968년 10월 15일, 21개의 성과 시, 그리고 자치구의 혁명 위원회들은 연내와 다음해 봄 전에 20830명을 내려 보내고 당시 보조금의 표준에 따라 배치 경비에 5520만 위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중 연내에 16650명을 내려 보냈기에 경비가 4420만 위안이 필요했는데, 이는 원래 있었던 1900만 위안의 예산을 넘는 액수였다.
그리고 1968년 12월, 마오쩌둥은 지식청년들을 상대로 한 상산하향운동을 전국적 범위로 확대, 전개했다. 그는 12월 22일 인민일보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게재했다.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빈하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도시에 거주하는 간부 등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한 그들의 자녀들이 시골로 내려가도록 설득해야 한다. 도시에서 생활하며 오랜 시간동안 노동과 단절된 거주민들은 생산노동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국가에 부담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과 도시와 시골의 차별을 줄이는 데에 도 불리할 뿐더러 자신과 자녀의 사상개조에도 불리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전국 각 대도시는 마오쩌둥의 새로운 지시에 즉시 들끓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수십만 명이 그날 밤으로 행진하며 마오쩌둥의 새 지시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들은 "마오쩌둥 주석이 지도하여 발전하며, 농촌 생산 대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해서 혁명을 하고, 상산하향하며 용감하게 혁명을 하며 새로운 공적을 세우자."라는 구호를 큰 소리로 외쳤다. 각 학교의 공인 선전대들도 즉시 행동해 "밤새로 마오쩌둥 주석의 지시를 실현해야 한다."고 외쳤다. 각급 혁명 위원회는 마오쩌둥 주석이 "하나의 동원이 필요하다."라는 것에 관한 지시를 따라서 대대적으로 상산하향의 혁명적 여론을 전개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선전 동원 업무를 전개했다.
1969년 1, 2월 사이, 155.600명이 단 2개월 만에 하향해서 가정을 꾸렸다. 그 중 하남에 32,900명, 호남에 20,100명, 사천에 16만 명, 호북에 13만 5천명이 있었다. 연말까지 전국 범위에서 267만 3800명이 하향했는데 1967년과 1968년에 하향한 사람을 합치면 총수는 467만여 명에 달했다. 그중 국영 농장으로 들어간 이는 80만여 명이었고 인민공사에 들어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이는 387만여 명이었다. 66년, 67년, 68년 졸업생 대다수는 하향했고 69년 졸업생 중 일부도 하향했다.
당시 하향 지역을 배치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베이징과, 천진, 상하이 세 대도시와 장쑤 성, 저장 성으로, 이 주변 농촌에는 사람이 많고 땅이 적은 곳이었다. 정부는 1969년 1월 이곳에 거주하는 지식청년들을 하향 배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헤이룽 강이 26만 명을 받아들인다. (베이징, 상하이 각 9만 명, 천진 5만 명, 절강 3만 명)

2) 허베이 성이 6만 명을 받아들인다. (천진 10만 명, 베이징 5만 명)

3) 길림성이 5만 5천명을 받아들인다. (베이징 2만 5천명, 상하이 3만 명)

4) 산시 성이 베이징의 3만 명을 받아들인다.

5) 구이저우 성이 상하이의 3만 명을 받아들인다.

6) 장시 성이 상하이의 2만 명을 받아들인다.

7) 안휘성이 상하이의 1만 6천명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수의 지식청년을 동원해 머나먼 곳으로 하향시키다 보니 여러 문제가 터졌다. 먼저 교통 문제가 발생했다. 1969년 3만 1500명을 처음 조직해 헤이룽 강과 길림성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기차 운송만으로는 날마다 두 개의 전용 열차를 안배하면 5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고 3대의 전용 열차를 안배해도 3개월 반 쯤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적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하이 시는 해군 함선을 동원해 먼저 상하이 시의 지식 청년을 대련으로 보내고 다시 열차를 태워 헤이룽 강과 길림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로와 육로 연대운송으로 진행했지만, 3월 말까지 겨우 16300명만 운송해 원래 계획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두 번째 문제는 그들이 가야 하는 곳은 매우 춥기 때문에 겨울옷이 반드시 필요하고 받아들이는 지역의 숙소도 마련해야 했지만 그곳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는 사상의 문제였다. 마오쩌둥에게 세뇌된 졸업생들이야 자원해서 참가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따라가야 하는 학부모들을 설득해야 하고 그들과 함께 가야하는 간부들도 설득해야 했다. 당국은 이러한 문제를 무릅쓰고 계획을 예정대로 진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많은 이들이 도중에 달아났다. 베이징과 천진, 그리고 상하이 시에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3년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134만 명이었는데, 그 중 상산 하향한 숫자는 80만 명으로 전체의 70%를 차지했고 재교육을 이수한 이는 33만 명으로 30%를 차지했다. 즉, 상당히 많은 이들은 마오쩌둥의 의도대로 순순히 상산하향하지 않았고 재교육 이수도 받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상산하향 운동을 지도하는 간부들은 앞장서서 자신의 자녀들을 하향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각 지역의 당 위원회와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강조했다. 또한 지도 간부들은 우선 공부하고 일을 잘하고 자신의 자녀를 먼저 농촌으로 보내며 마오쩌둥의 새로운 지시를 잘 집행하는 모범을 담당해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조카딸을 내몽골로 보냈고 둥비우는 막내아들을 광둥 성 두문 현으로 보냈으며, 화궈펑은 학생 학부모회에 참가해 자신의 딸이 농촌에 들어가는 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상산하향 운동으로 도시지역의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1967년과 1968년에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세를 찍은 중국 경제가 생산의 정상화에 따라 1969년과 1970년에 걸쳐 경제성장률이 일시적으로 성장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홍위병들도 도시지역에서 사회혼란을 불러일으킨것과는 다르게 농촌지역에서는 문맹퇴치와 농업생산량 향상등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즉, 홍위병 개인에게는 도시에서 명망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고관대작들까지 감옥에 내보내거나 폭행을 가해서 죽이거나 자살시킬정도로 위세를 떵떵부리다가 시골에서 잡엽부가 되는 사회적 지위의 추락을 겪었으니 마냥 좋은일이 아니었지만 중국 국가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나쁜일은 아니었던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부터는 상산하향 운동이 쇠퇴하는 기미를 보였다. 1970년에 하향한 사람의 수는 1969년에 하향한 사람 수의 39.8%에 불과했고 1971년엔 1969년에 하향한 사람 수의 28%으로 떨어졌으며 1972년엔 1969년에의 25.1%에 불과했다. 하향한 사람 수가 감소하게 된 주요 원인은 첫째, 66년, 67년 68년 3년 동안 졸업한 학생들이 이미 대부분 하향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일부 고등학교와 중급 전문학교들이 1970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기 시작해 중학교의 졸업생들이 더 많은 진학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 하향의 필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이며, 셋째로 국민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촌으로 하향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고 도시에 남아있게 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1976년 1월 19일, 산시 성 함양 시 북두 공사 양가락 대대 주영광과 왕원성이 마오쩌둥과 중공당중앙부에 편지를 보내 농민들이 일꾼을 모집하는 정책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이 편지에서, 두 사람은 당국의 상산하향 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중국의 공업은 이제 대대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직공을 모집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업을 활기차게 발전하는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왜 도시에 온 사람들 중에서만 직공을 모집했고, 농민은 "세습"으로 이어지는가? 왜 도시에서의 학생들만 공인을 담당할 수 있고 농촌의 학생들은 농민만 해야 하느냐? 심지어 일부 지식청년들은 명목상으로만 하향하고 본인은 아직 도시에 남아 있었는데, 단지 2년의 시기가 만료되었다고 빈하종농의 추천을 통과하지 않았고, 바로 공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공인 계급 대대를 순수하고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렇게 하면 노농동맹이 어떻게 서로 공고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세 가지 차별을 어떻게 단축하는가?

직공을 모집하는 것은 지식청년 중에도 일부 사람들을 모집하고, 농촌의 청년 중에도 일부 사람들을 모집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도시 지식청년들이 농민으로 담당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무산계급은 자산 계급을 이기고 새로운 성과가 될 뿐만 아니라, 무산 계급 문화대혁명이 발전하여 나타난 새로운 사물도 될 수 있다. (...) 우리는 반드시 상산하향의 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잘못 된 노선을 철저히 바로잡겠다.

이 편지는 당시 국무원 부총리였던 오계현(吴桂贤)에게 전해졌다. 오계현은 두 농촌 청년의 주장이 이치에 맞다고 판단하고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주석, 춘절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지난번에 산시 성 함양 시 북두 공사의 두 지식청년들이 주석과 당 중앙에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성 계획 위원회는 하달한 267호 문헌에 관하여, 온 성범위에서 대대적으로 직공을 모집했으며, 하향한 2년 이상의 지식청년들을 대상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청년들을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영했습니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국가계획위원회가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함양 지역에서 1968년에 하향한 지식청년들이 이미 70년, 71년, 72년 3년 동안의 직공을 모집하는 중에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작년의 직공을 모집해 하향 2년째의 지식청년들도 대부분 다시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부 청년들은 농장을 갈라놓았습니다. 일부 생산대도 지식청년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배치나 배양 등 업무를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식 청년의 교육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규칙은 지식청년 상산하향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두 지식청년들이 보내온 편지를 같이 올리겠으니 만일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석께서 고쳐주시길 바랍니다.

오계현

1976년 2월 1일

마오쩌둥은 오계현의 편지를 읽은 뒤 중공중앙 정치국에 보내 이를 연구하게 하면서 "정치국에 인쇄 배포하고 지식청년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고 회의를 열어서 2월 12일까지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주석의 지시를 실현하기 위해,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 지도그룹 사무실은 4월 15일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안을 제출했다.
1) 되도록 빨리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 지도그룹을 창립한다.
2)1973년 전국 상산하향 지식청년 업무회의 준비 업무의 방법에 따라, 회의 준비 그룹을 창립하며 각 부문의 책임자들을 구성원으로 조직한다. 또한 조사팀을 보내 실태를 조사한다.
3) 그해 하반기 내에 적당한 시간을 선택하여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회의를 열어 마오쩌둥 주석의 지시를 연구하고 실현한다.
4월 23일 저녁, 정치국은 회의를 열어 지식청년 사무실이 제출한 제안을 토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그룹을 창립하며, 진영귀와 오계현이 앞장선다. 지도그룹의 구성원 문제는 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의논한다.
2) 관련 부문을 조직하여 조사팀을 보내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을 동의하고, 또한 인민일보사와 신화통신사를 청해 참가시킨다. 조사팀의 인원들이 먼저 집중적으로 공부해 인식 문제를 해결한다.
3) 하반기에 회의를 열며 주석의 지시에 따라서 지식청년의 문제를 해결한다.
5월 7일, 국무원이 각 성, 시, 자치구의 혁명 위원회와 국무원 각 부문, 위원회에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 지도그룹을 창립하는 것에 관한 통지>를 보냈다. <통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의 지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의 허가를 받고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 지도그룹을 창립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지도그룹은 이하 23명이 구성한다.

진영귀(陈永贵), 추준[侯俊](여), 구수련[顾秀莲](여), 사풍(沙风), 유빙청[刘冰清](여), 동가경(董加耕), 요력(姚力), 양귀(杨贵), 왕병건(王丙乾), 황수척(黄树则), 조발생(赵发生), 강영화(康永和), 서광소(徐光宵), 왕장백(王常柏), 소척요(肖泽曜), 해력무(解力夫), 전위신(田维新), 장세종(张世忠), 양부진[杨富珍](여), 우치전(于驰前), 돌벽(石磊), 설희매(薛喜梅)(여), 이경임(李庆霖) 등.

진영귀는 팀장에 임명되었고 후준, 수련과 사풍은 부팀장을 담당했으며 우치전은 지도그룹 사무실 주임에 임명되었다. 새롭게 창립한 지도그룹은 3명의 지식 청년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천진의 후준(여), 강소의 동가경(남), 하남의 설희매(여)였다. 그해 8월 11일, 국무원은 후준을 국무원 지식청년 지도그룹의 상무부팀장으로 임명해 베이징으로 전근 보내 지도그룹에서 매일 진행하는 작업을 감독하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 지식청년이 상산 하향하는 것은 농촌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 아니면 농촌에서 단련한 후 다시 도시에 돌아와 취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가 애매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이전엔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될 이유가 없었다. 도시와 농촌에서 진학하지 못하고 취업도 못하는 청년들을 하향시켜서 바로 농민이 되어서 농촌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권장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소환되어 관료가 되긴 했지만 대다수 청년들은 농민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으로 이 청년들이 죄다 도시로 올라가 한바탕 깽판을 친 후 마오쩌둥이 1968년 12월에 "지식 청년들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여기서 하향의 목적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식청년이 상산 하향하는 것은 교육받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농촌으로 깊이 파고드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도시에서 대량의 직공을 모집하는 와중에 하향하지 않은 기존의 졸업생들만 모집했으니 이미 하향했던 이들은 강한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 지도그룹 내에서는 세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농촌에 깊이 파고들어 농민으로서 살아가는 게 맞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농촌에서 재교육 받은 뒤 도시로 돌아와 직업을 얻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론은 '평등론(平等論)'으로, 도시와 농촌 양 측의 청년들을 일률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급기야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사인방은 <"깊이 파고들다"라는 이론으로 재난을 일으킨 주모자 덩샤오핑에게 맹렬히 논박한다.>라는 편지를 전국에 발표해 농촌에 깊이 파고든다는 이론을 옹호하는 덩샤오핑을 맹렬하게 비난하며 그를 "재난을 일으킨 주모자"라고 헐뜯었다. 이후 정계는 세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지지하는 자들끼리의 대립으로 시끄러워졌고 자연히 상산하향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1976년 7월 28일, 탕산 시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상산하향 조사팀은 국무원 제2 접대소에서 농업 전람관에 임시로 만들었던 지진 대피용 천막으로 이동해 사무를 보았다. 그들은 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 회의가 열린 것에 관한 지시 요청서>와 <지식청년의 문제에 관한 조사보고>, 그리고 7개의 첨부 서류를 제출했다. 이 서류들은 8월 27일에 마오쩌둥과 당 중앙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 4일 사인방이 긴급 체포되는 등 중대한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지식청년의 문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결국 1976년 11월에 예정되었던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 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문화대혁명에 수반되어 진행되었던 상산하향운동은 1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로 인해 파생된 부작용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선 지식청년들을 농촌 생산 대에 배치시키는 정책이 한계에 부딪쳤다. 사람들은 지식청년의 농촌 생산 대 투입에 대해 “인민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으며 실제로 “4개의 불만(四个不满)"이 생겨났다. 첫째, 농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수많은 중소도시 지식청년의 상산하향은 농촌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농촌 인구는 매년 1,600만 여 명 증가한 반면, 토지는 매년 582만 묘 가량이 감소하고 있어서 1인당 경지면적은 2.61묘에서 1.96묘로 감소했다. 장시 성과 저장 성 일대 같은 일부 농촌에서는 인구 대비 평균 1인당 0.5묘에도 미치지 못했고 일부 지방에서는 고작 1인당 1/3 정도였다. 이렇듯 농촌의 노동력이 포화상태인 마당에 중소도시의 청년들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농촌의 부담을 가중시켜 지식청년과 농민이 밥그릇 쟁탈을 벌이는 국면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농민과 하향 청년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청년들이 개, 닭, 소 등을 훔치는 건 예사였고 농민과 하향 청년 간의 폭력이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심지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져 수백 명이 사망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둘째, 하향 청년들과 가장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청년들이 하향하여 생산 대에서 생활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에 거주하는 가장들로부터 장기간 경제적 원조를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청년들은 면목이 없었고 가장들로서는 부담이 컸다. 세간에는 "자녀 한 명이 하향하면 호봉이 한 등급 떨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다음은 국무원의 지식청년 부서가 1977년 생산 대에 배속된 지식청년의 생활정착상황에 대해 조사한 자료이다.

생산 대에 배속된 청년들을 정착시키는 과정 중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불거졌다.

1) 생활자급 불가

27개 성(시, 자치구)에서 나온 통계에 의하면, 생산 대에 배속된 청년들의 생활자급표준소득은 연간 120~150위안이었다. 헤이룽 강, 산둥, 상하이의 농촌 지역의 생산 대에 투입된 기본적으로 자급생활이 가능했지만 그 외 여타 지방에서의 자급불능 정도는 다음과 같았다.

70% 이상이 자급할 수 없는 곳으로는 윈난 성, 구이저우 성, 쓰촨 성, 서장, 간쑤 성, 푸젠 성 등지가 있었으며, 50~70%가 자급할 수 없는 곳으로는 산시 성, 신강, 후베이 성, 장쑤 성, 절강성, 안휘 성, 베이징, 내몽고 등지였다. 30~50%가 자급할 수 없는 곳으로는 요령성, 길림성, 산시 성, 천진, 허베이 성, 칭하이 성, 장시 성, 후난 성, 허난 성 등지였다.

상하이에서 다른 성의 농촌지역으로 배속된 22만 명의 청년 중에서 13만 명이 자급생활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가장들은 큰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하이 제12 모방적공장 직공들의 하향 자녀가 결혼해 154명의 아이들을 낳았으며 그 중 130명은 상하이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져 양육되었다. 가장들은 "과거에는 자식을 길러 노후를 보장받았는데 지금은 자식이 늙어 죽을 때까지 돌봐야 하고, 길러 놓은 자식을 생산 대에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식의 어린 자식까지 길러서 생산 대에 보내는 실정"이라고 했다.

2) 주거곤란

1976년 말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95만 명의 하향청년들이 살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기혼자들의 주거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장쑤 성, 안휘 성, 길림성, 쓰촨 성의 4개성의 기혼청년은 22만 명이었으며, 그 중 10만 명은 주거할 집이 없었다. 1973년 이전에 짓기 시작한 주택은 국가보조 표준이 낮아 부실 공사한 탓에 보수 공사를 해야 하거나 보수공사조차 할 수 없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3) 혼인상황

하향 청년의 연령이 만혼 기에 접어들어 결혼을 못하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헤이룽 강은 30만 명, 장쑤 성은 20만 명에 달했고 상하이에서 다른 성으로 하향한 청년의 90%가 미혼이었다. 또한 7개성의 통계에 따르면 26~27세 이상의 미혼자는 59만 명에 달했다. 하향 청년들은 결혼 후에는 도시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생활과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혼조건을 갖추지 못해 결혼을 미루고 있다. 또한 채용, 징병, 진학에서 남성의 비율이 높아 남녀 비율의 불균형이 초래되어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38점(三八點,전부 여성 청년이다)"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셋째, 중소도시의 기업, 사업 단위들이 불만을 품었다. 지식청년들을 하향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각 방면의 협력이 필요했다. 정부는 각 기업과 사업 단위에게 소속 직공들의 사상교육을 철저히 시켜 자녀들의 하향을 지지할 수 있게 만들라고 요구했고 유능한 간부를 차출해 인솔자로 파견하여 지식청년들을 인솔하게 했다. 그리고 자금과 물자 혹은 기술력을 차출하여 기, 사업 단위가 소재하고 있는 지역을 무상 지원하게 했다. 이로 인한 기, 사업 단위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5년에는 전국 중소도시에서 파견한 인솔간부가 9만 여명에 달했는데, 그 중 요녕성 한 개 성에서 파견한 간부만 1만 5천명이었다. 중소도시의 기, 사업단위에서 지원한 물자에 대한 전국적인 통계치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하이만 국한해도 매년 200만여 위안의 지원금이 지불되었다. 상하이의 기업노동조합에서는 직공의 자녀가 하향하면서 가중된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하향한 자녀가 있는 직공에게 매월 10~15위안의 보조금을 지원해야 했다. 이로 인한 부담이 갈수록 커지면서 기업, 사업 단위 운영가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팽배해졌다.
넷째, 정부도 불만을 품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정부의 재정은 매우 빠듯해졌지만 상산하향 작업을 차질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매년 막대한 재정을 짜내야 했다. 특히 1973년부터 처리경비표준이 향상되면서 국가 재정에서 매년 평균 8억 2천만 위안이 지급되었다. 이는 동기간의 국가재정 수입의 1%를 차지했다. 지식청년의 상산하향을 계획한 1962년부터 상산하향 활동이 기본적으로종결되는 1979년까지 지급금 누계액은 75억 4297만 위안에 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향 청년들이 농촌에 제대로 정착했다고 할 수 없었고 각 방면에서 불만이 팽배하고 온갖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이러니 정부로서는 어마어마한 재정을 들여가며 벌인 정책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초 상산하향 정책의 목표였던 농촌에서의 식량 생산률 향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역효과를 봤다. 문화대혁명 전에 국영농장은 중소도시의 지식청년 42만 명을 받아들였으나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에는 무려 230만여 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농장은 소속 직공의 자녀를 자체 해결하라는 국가의 요구에 따라 매년 30만 명의 직공 자녀를 취업시켜야 했다. 그 결과 농지개간 분야에서 종사하는 직공의 수는 1965년의 260만 명에서 1978년에는 514만 명으로 증가했으나 1인당 평균 경지 면적은 19.2묘에서 12.5묘로 감소했다. 노동 생산률은 해마다 곤두박질쳤고 농지 개간 분야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에 농지관리 부분에서는 중소도시의 지식청년들을 더이상 농장에 배치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렇듯 상산하향 정책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긴 커녕 역효과만 보고 있어서 사람들은 차츰 이 정책에 환멸을 느꼈다.

3.3. 마오쩌둥 사후 상산하향 운동


1977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는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정식 공표했다. 그 후 1977년 12월 12일에서 이듬해 1월 13일까지, 국무원은 성, 시, 자치구의 지식청년 책임자 좌담회를 열었다. 회의는 국가계획위원회의 부주임이자 국무원 지청지도소조의 부조장인 고수련(顧秀蓮)이 진행했다. 또한 회의는 제목만 출제하고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면서 주로 지방의 의견을 청취했다. 당과 국가 지도자인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덩샤오핑(鄧小平), 이선념(李先念), 진영귀(陳永貴) 등은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을 접견했으며, 이선념과 진영귀는 대표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다. 그러나 지식청년 문제는 매우 민감했기 때문에 다들 의사표명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맡고 있던 진영귀 부총리조차도 "지식청년 작업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우리 부총리들은 이 일이 거론되기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좌담회는 몇 가지 문제를 거론했다.
첫째, 지금까지 상산하향의 방향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청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일부 하향 청년들은 자신들이 사인방의 희생물이며 사인방을 타도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영향력 있는 일부 선진청년들도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길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산하향을 계속 이어가는 건 여러모로 무리였다. 둘째, 하향 청년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했다. 어떤 청년거점에서는 이 소문을 들은 청년들이 밥솥이나 문과 창을 부수고 인민공사나 생산대의 간부를 찾아가 따지기도 했으며 도시로 돌아가 상급기관에 집단으로 문제해결을 요구하기도 했다.
셋째, 일부 지방에서는 하향청년들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하향청년이라고 하면 모두 “머리에는 뿔이 돋아 있고 몸에는 가시가 돋쳐있다”라고 표현되는 반 조류,반혁명주의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청년거점의 숙정(肅正)이라고 하면 청년들을 축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내몽고자치구의 한 기(旗,내몽고의 행정단위로서 현(縣)에 해당)에서는 기층 간부를 맡고 있던 100여명의 하향청년들을 모두 해직시켰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들의 짐 꾸러미를 내다 버리거나 모조리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 넷째, 지식청년들의 관리를 맡고 있던 관부들의 압박감과 초조감이 극에 달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고 군중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 사이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어떤 지역의 9개 현과 시의 지청부문의 주임들은 다른 일을 하겠다며 전임을 신청하기도 했다.
좌담회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무원 지식청년지도소조가 주최가 되어 중조부, 중선부, 최고인민법원, 국가계획위원회, 그리고 재정부, 교육부, 농림부, 상업국, 공안국, 위생국, 노동부, 출판부, 물자부 등의 부문과 중국 인민해방군, 총 정치부 및 노동조합, 공산주의 청년단, 중화 전국여성 연합회와 회동해 방안을 마련하기로 확정했다. 또한 각 성, 시, 자치구의 당위원회에서는 중공 중앙부와 국무원의 방법을 참조하여 모든 역량을 모아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여기에 경험을 활용하여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해결안을 제출하고 국무원에 보고하도록 건의했다. 또한 좌담회는 조사연구가 필요한 문제 11항목을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4인방”의 해독을 어떻게 숙청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

(2)중소도시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분배방향에 관한 문제

(3)하향청년을 안착시키기 위한 합리적 안배에 관한 문제

(4)하향청년의 안착형식에 관한 문제

(5)주주시(株洲市)의 공장과 인민공사가 연계하여 하향한 지청을 집단 안착시킨 경험을 보급 확산하는 문제

(6)청년거검의 건설에 관한 문제

(7)하향청년의 양성과 교육에 관한 문제

(8)하향지청의 역할을 어떻게 발휘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

(9)하향청년의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통합적 해결에 관한 문제

(10)경비와 물자관리의 정비와 정착에 관한 문제

(11)지청공작에 대한 지도강화문제

1978년 3월 28일, 덩샤오핑은 호교목(胡喬木)과 등력군(鄧力群)과의 담화에서 중소도시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노동력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상산하향 방법은 장기적인 것이 못되며 농민들도 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쓰촨 성의 1억 사람들은 1인당 평균 1묘의 땅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도시인들의 하향은 농민들과 밥그릇 싸움을 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며, 우리의 첫 걸음은 마땅히 도시 청년을 하향시키지 않는 일을 완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농촌으로부터 인력을 흡수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덩샤오핑의 이 같은 뜻을 받든 중공 중앙부는 1978년 4월 13일 농림부의 <국무원 지식청년 상산하향지도소조와 사무실관리체제 조정에 관한 보고>를 비준했다. 지도소조의 인원을 조정했으며 농림부에서 대신 관리하고 있던 국무원 지청부문을 국가노동총국 당 그룹에서 지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당 중앙의 비준을 거쳐 허셔평을 국무원 지청부문의 주임으로 임명하고 국가 노동총국 부국장과 당 그룹 부서기를 겸임하게 했다. 이후 국무원 지청부문은 1978년 7월 20일 당 중앙과 국무원에 <중소도시 지식청년의 상산하향 방침 문제에 관한 지시요청 보고>를 전달했다. 이 보고는 실상 곧 개최될 전국지식청년 공작회의를 대비해 기조를 확립한 것이었다.
1978년 10월 7일, 중공 중앙부는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 업무회의 개최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통지>는 지식청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마오쩌둥 주석의 생전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회의를 통해 다음 7가지 문제를 연구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지청의 상산하향운동을 방해하고 파괴한 “4인방”의 죄행을 깊이 파헤치고 비판해야하며 그 해독과 영향을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지청의 상산하향에 관한 모 주석의 일련의 지시를 완정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여 집행에 관철시켜야 하며 사상적 인식을 통일시켜야 한다.

2)어떻게 취업문을 넓힐 것인가, 또 지청을 안착시키기 위해 어떤 다양한 형식을 채용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야한다.

3)도시수용정책의 조정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즉 적은 수를 하향시키거나 아예 하향시키지 않는 방안을 점진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하고 현재 어떤 도시들에서 이미 상산하향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안배하고 있는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4)농촌에 있는 800만의 지청, 특히 1972년 말 이전에 하향한 지청 문제를 어떻게 “통합적인 계획을 세워 해결”할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5)지청작업의 전형적인 경험을 총결하여 보급 확산시켜야 한다.

6)하향한 지청을 대상으로 한 근로 외 여가시간을 이용한 교육과 훈련을 어떤 식으로 전개하여 그들이 농촌에 과학 및 문화지식과 과학실험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그리고 지청을 박해하는 범죄행위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아서 지청의 건강한 성장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해야한다.

7)지청작업의 지도체제를 연구해야한다. 즉 사무기구 강화와 생산 대 인솔 간부의 관리 문제가 있으며, 사상정풍의 문제와 조직기구와 경비관리 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통지>는 각 성,시,자치구의 당위원회가 조직의 역량을 최대한 모아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덧붙여 경험을 총결할 것과 회의에서는 당면 작업의 추진에 관해 논의가 되어야하며 이를 통해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그 문제들을 착실히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또한 선전보도를 강화하고 모범이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표창하여 상산하향은 영예로운 일이라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형성하는 것은 물론 조사결과 및 전형적인 경험을 국무원에 보고하도록 했다. <통지>가 하달된 후에 각지에서는 즉각적으로 행동에 돌입했고 지도간부의 지시에 따라 착실하게 준비해나갔으며 대량의 문서자료를 갖추게 되었다.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은 매우 빠르게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도시와 농촌의 각계에서는 중앙이 민심에 순응하는 정책결정을 해줄 것을 간절히 고대했다.
이 시기 덩샤오핑을 위시로 한 중국 지도부는 상산하향 운동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앞으로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진행해야 하는 가였다. 만일 상산하향의 중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한다면, 본디 취업난을 겪고 있는 중소도시에 막대한 수의 하향한 지청들이 몰리면서 취업난은 사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문제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하향과 도시수용을 번갈아 진행하는 방법을 취한다면, 인력과 재산이 낭비될 것이며 취업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국가는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상산하향 운동을 점진적으로 축소시키고 하향 청년들을 조금씩 고향으로 돌려보내 점차 상산하향 운동을 종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1978년 10월 31일에서 12월 10일까지 전국 지청 상산하향 작업회의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국무원 지식청년 지도소조의 임원과 각 성, 시, 자치구의 지청작업을 주관하는 당서기 또는 당 위원, 혁명위원회 부주임, 지청사무소 주임, 일부 성, 시, 자치구의 계획, 노동, 농림, 농지개간, 재정, 문확육 부문의 책임자, 일부 지역 및 현, 기업의 대표와 중앙 관련 부문, 중앙군사위원회의 각각의 총사령부 및 대규모 군사지역들의 346명이 회의에 출석했다. 정부는 이 회의를 통해 상산하향 운동의 폐지를 확정지으면서도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상산하향 정책을 축소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11월 23일, '중국청년보'가 <지청의 상산하향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자>라는 제목의 논평원의 글을 발표하여 회의장 안팎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글은 린뱌오와 사인방은 무수한 지식청년들의 혁명적 열정과 그들이 세운 중대한 공헌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기는 한편, 이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장철생과 같은 깡패들을 긁어모아 길러낸 후 각 급의 당과 정부 및 군의 지도급 간부들을 공격하도록 교사하고 선동하는 등 당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죄악을 일삼았다고 했다. 또 린뱌오와 사인방은 상산하향을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만들어놓고 피해갈 수 있었던 수많은 갈등들을 인위적으로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 계획을 통해 지청문제를 해결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사력을 다해 반대하고 관련 정책과 조치의 실현을 막아버림으로서 본래 해결할 수 있었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은 회의 기간에 이런 기조의 글을 발표한 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이것이 정국의 안정화에도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상하이 대표는 이 글을 본 즉시 시위원회의 지도자에게 전화를 걸어 혹여 상급 기관에 상황을 알리고 해결을 요구하러 온 청년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시 지청사무소의 사상교육을 단단히 시켜놓으라고 지시했다. 운남 대표는 운남 국영농장의 지청들이 지금 도시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들인 마당에 이 글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거라고 우려했으며 헤이룽 강 대표는 가뜩이나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이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 쓰러질 지경이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알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글은 지식청년들에게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장쑤 성 의홍현의 장주 공사에서 일하던 18명의 지식청년들은 이 글을 본 후 바로 현 정부 소재지의 거리로 나와 대자보를 내붙이고 "상산하향은 잘못된 것이다. 정책을 폐지하고 도시로 보내 달라."고 외쳤다. 상하이에서는 하향청년들이 시의 인민광장과 중산공원, 기차역으로 몰려들어 "논평원의 글을 옹호하자."라는 표어를 내붙이고 "글은 지청과 가장의 속내를 대변한 것이다."라고 외쳤다. 현에서 파견한 지청의 안착을 담당했던 몇몇 관료들은 지청 명단을 가지고 상하이 시 정부를 찾아가 하향청년들을 모두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들은 더 이상 4인방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시와 구로 해결을 요청하러 온 청년들이 급증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상호연합이 이뤄지면서 거리 시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이에 정부는 수습에 나섰다. 11월 29일, 지청지도소조는 회의에 참석한 각 성, 시, 자치구의 책임자들과 지청사무소 주임을 소집한 후 논평원의 글은 결코 회의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글의 발표에 대해 사전에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후야오방은 중국청년보를 찾아가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는 짓은 다시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 후 12월 10일 장장 41일간의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업무회의가 막을 내렸고, 12일 중공중앙부는 회의에서 결정된 <전국 지식청년 상산하향업무회의 요록>을 각지에 배포하고 이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하향청년들은 회의 결과가 통보된 뒤에 오히려 불안을 느꼈다. 그들은 애초에 농장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고 정부는 바램과는 달리 자신들을 당장 보내줄 의향이 없어보이니 도시로 귀향할 희망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이에 절망한 청년들은 각지에서 파업과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0월 하순, 경홍시 제10농장의 학교 교사이자 하향한 상해지청인 정혜민(丁惠民)은 “등 부총리에게 전하는 공개 연명서한”을 기초하고 이 농장의 974명에게서 공동서명을 받았다. 서한의 주요 내용은 농장의 지청들이 처해있는 곤경과 도시로의 귀향 요청이 반영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정혜민 등은 11월 28일에서 29일까지 경흥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각 농장에서는 회의에 참가할 지청대표를 보냈다. 회의에서는 지청들을 조직하여 도보로 곤명시까지 가고 그 후에 북상해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경흥시, 맹해시, 소맹창읍, 맹차읍, 맹만읍, 맹방읍,맹랍현 등의 7개 농장에서 3만여 명의 지청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개간 작업은 마비 상태가 되어버렸고 식량 생산은 중단되었다.
12월 27일, 정혜민을 대표로 하는 청원단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들은 천안문과 서단에 대자보를 내붙이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12월 30일 국가농지개간총국, 국무원 지청부서 및 국가노동총국의 책임자들은 정헤민 등의 발언을 청취한 후 지청들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듬해 1월 2일, 민정부 부장 정자화는 국가농지개간총국,국가노동총국,국무원지청부서 등 관련부문의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정혜민 등 지청들이 베이징에 와서 청원하고 있는 이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1월 4일, 국무원 부총리 왕진과 정자화는 정혜민 등 10명의 청원단 대표를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왕진은 농장의 지청들이 국가인민의 이익을 중시하여 좀더 원대한 안목으로 변경 발전에 대한 포부를 갖고 변경을 개발하고 수호해주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아래는 부총리 왕진과 정혜민 등 청원단의 대화 기록이다.

왕진: 최근 며칠동안 외국 손님을 접견했는데 오늘은 자네들같은 내빈을 회견하는군. (청년들의 이름을 물어보다 이장수(李長壽)의 이름을 들은 뒤) 이름이 참 좋군. 장수라! 내 나이 올해 70이 넘었으니 3~5년 더 있다가 마오 주석을 뵈러 갈 것이네. 자네가 내 나이가 되려면 반세기는 더 있어야겠군.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다니면 되겠는가? 이리한다면 우리의 국가가 어찌 부강해질 수 있겠는가? 나와 민정부장 정자화 동지가 자네들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네. 자네들은 장수죽 동지와 만난 적이 있겠지?

정혜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왕진: 동지, 우리 오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눠보세. 화주석을 대표로 하는 당 중앙이 사인방을 척결한 것에 대해 자네들은 찬성했겠지?

정혜민: 찬성합니다.

왕진: 사인방을 척결한 후 전국은 태평한 형세를 보이고 있네. 국제형세 또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 중, 일간에 평화우호조약을 맺었고 중미는 국교 수립을 했어. 작년처럼 그렇게 심각한 가뭄이 반세기 전에 불어닥쳤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을 지 알 수 없을 걸세. 문화대혁명 동안 린뱌오와 사인방들이 홍위병을 선동하여 마오 주석을 따라 여러 해를 남정북벌했던 우리들 교사와 원로 동지들, 또 각급의 지도간부들을 무참히 짓밟았지. 많은 늙은 노동자들이 맞아죽거나 다쳤고 나 또한 가두행진을 당했네. 정자화 동지도 여러 해 동안 파면당한 채 지냈어. 우리 당정군(党政軍)의 원로인 무산계급혁명가 등소평 동지도 그들에게 모함을 당했어. '2월 역류'라느니,“비림비공비주공(批林批孔批周公)”이란 말로 우리 전인민이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판한단 말인가. 그들이 무정부주의 소요를 일으켰던 것은 원로간부 전체를 타도하려고 했던 거야.무정부소요가 일어난 이 10여 년 동안 본래는 학교도 잘 다니고 있었을 자네들을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나. 잘 생각해보면 자네들도 피해자가 아니던가!

정혜민: 그렇습니다.

왕진: 서쌍판납(西雙板納)의 국영농장의 간부들도 과거에는 청년시절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 낙후된 지역을 선진지구로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자진해서 변경건설에 나섰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응당 먼저 그 동지들의 공로와 노고를 인정해야한다. 물론 농장을 잘 경영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내가 그들을 대표하여 자네들에게 사과하는 바이다.화주석이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포한 것은 정국의 안정과 단결을 꾀하여 이 국면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자네들은 나갈 때 그 천 조각(청년들이 가슴에 단 "북상청원대표"라고 쓰인 붉은 천조각을 가리킨다.)을 떼내어버리는 것이 어떤가?

(청년들은 왕진의 말에 하나둘 씩 붉은 천조각을 떼내었다.)

왕진: 분명하게 말하지만, 자네들의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니네. 그러나 자네들에게 앙갚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보장하겠네. 책임지고 고치면 되는 것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네. 우리 두 늙은이가 자네들에게 분명히 말하겠네. 반드시 국가대사를 먼저 생각해서 정국의 안정과 단결을 꾀하고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여 경제건설을 이룩해주길 바라네. 또 하나, 생산은 증가시키고 절약은 엄격하게 지켜주기 바라네. 단결은 자네들 젊은이에게 달려있네. 금세기 내에 우리나라를 4대 현대화를 이룬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하려면 고군분투해야 한다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없을 수 가 없네. 지금 현상에 대해 나 또한 매우 불만이라 잠도 이루지 못한다네.지금도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으니 이 늙은이들 스스로도 전 인민들에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네.

왕진: 요 며칠 나는 외국인을 접견했었네.그들은 우리나라의 내란을 두려워하고 있었네. 그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우리는 당신들 나라가 강대해지기를 바랍니다.투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돈은 있지만 당신들 나라에 홍위병이 나타난 이후로 우리들이 투자한 것이 깨끗이 날아가버렸습니다.당신들의 원로원수가 위원장으로 있는 인민대표대회에서 법률을 제정하여 우리의 투자금의 원금상환 및 이자지급을 보장해주시기 바랍니다.”지금 우리 농민 한 사람의 1년 수입은 겨우 60여 위안...인가?

정자화: 40위안이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왕진: 그래, 그 정도밖에 되지 않네. 덩샤오핑 동지는 늘 어떻게하면 인민의 삶이 좀더 빨리 개선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시네. 마오 주석은 덩샤오핑 동지에 대해 그를 싸움에 능하고 반수정주의 노선을 결연하고 굳건히 지켜나가며 변증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보기드문 인재라고 말한 바 있네. 마오 주석은 엽겸영 동지에 대해서도 “제갈량은 일생 신중하기만 했고,여단(呂端)은 큰 일에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았다.”란 비유를 쓴 적이 있었는데,바로 엽 부주석을 칭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마오주석이 연로하여 중병까지 겹치자 그의 주위에는 온통 나쁜 사람들만 들끓었고 옛 동지들조차도 만나지 못하게 했네. 병세가 좀 나아지자 우리의 옛 수장, 바로 덩샤오핑 동지를 모셔왔지. 우리 모두는 참 기뻤어. 후에도 전쟁이 있었는데 우리군은 흐트러지지 않았어. 그것은 바로 선생님들이 계셔주셨기 때문이야. 사인방은 지휘라고는 하지 못했어. 그들은 한 개 군영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어.

정자화: 만일 군대에 문제가생겼다면 우리에게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왕진: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자네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네. 덩샤오핑 동지가 얼마 후면 담판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텐데 국내가 불안정하고 단결되지 않는 상태라면 어떻게 이를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자네들, 소요를 일으켜서는 안되네. 자네들 생각을 바꿔서 자아비판을 해보면 어떻겠는가?우리는 결코 자네들에게 보복 같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네.그러나 돌아가서 자아비판은 하도록 하게. 올해는 3년간의 대 변혁이 그 효과를 나타낸 한 해이기 때문에 전당과 전국의 업무 중점을 모두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위에 올려놓았네.만일 자네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뀔 것이네.다시는 이 짓을 하지 말도록.

왕진: 우리의 국가는 단결이 필요하네. 자네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라네.우리 국가는 단결해야만,지도를 받아야만,민주집중제가 이루어져야만 건설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나와 정자화도 자네들에게 고참 티를 좀 냈구먼. 정자화 동지의 양손은 모두 장애를 입었다네. 우리들은 구새일생의 삶을 살아왔어. 무엇을 위해서였겠는가? 착한 청년들아!

(중략)

정혜민: 왕부총리와 정부장께서 저희들에게 내리신 지시에 대해 제가 지청을 대표하여 태도를 밝히겠습니다. 저희들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앞날에 대해 저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마도 저희들 자신에 대한 생각이 좀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정혜민은 수많은 정책들이 농장에서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간부의 작풍문제도 심각하다는 보고를 하면서 중앙에서는 이를 조사해 상응하는 규정을 만들어 농장의 문제들이 중앙의 정책에 따라 해결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희망했다.)

왕진: 국가농지개간총국, 공청단 중앙위원회, 부련의 동지들도 제군의 의견을 청취할 것이다. 어떤 문제들을 고쳐야 할 지 종합해서 민정부에 전달할 것이다. 구체적인 경영관리상의 문제는 농림부와 국가농지개간총국에서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군은 돌아가서 자아비판하고 농장의 일부 간부들의 지도 작풍을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군이 이렇게 소요하도록 내버려둔 것에 미안했기 때문이다. 지금 자네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런 이치들을 설명하는 것은 자네들로 하여금 신중국의 도래는 쉽지 않았으며 지금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집중해야 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전국의 수천, 수만 명의 지청들이 모두 소요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건설을 이루겠나. 농장간부의 작풍이 나쁘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고쳐져야 될 부분이다. 일부 동지들만 고치면 금방 해결될 문제다.

왕진: 제군은 21세기 사람들이다. 안목을 좀 더 넓게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는 숱한 어려움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그러나 앞날은 분명 밝다.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들 해결해 준다면 우리는 기쁠 것이다. 그대들이 올린 청원서는 우리가 화주석과 등부주석께 전할 것이니 제군은 빨리 돌아가 혁명에 동참하고 4대 현대화를 위해 이바지해주기 바란다.

왕진과 정자화가 청원지청 대표 정혜민 등을 접견하고 나눈 담화 내용은 인쇄되어 운남성의 각 개간지에 배포되었고 지청과 간부들 사이로 전파되었다. 이 담화는 파업과 소요를 진정시키고 지청들을 안심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수의 농장 지청들은 다시 생산에 들어갔으며, "청원단", "보고단", "연락소"와 같은 조직들도 해산했다. 또한 1월 23일 운남으로 돌아온 청원단 지청대표는 왕진 부청리에게 전보를 보내 조국의 4대 현대화 실현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지청들의 반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9년 1월 하순 경흥 농장의 부분 지청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그들은 도시로의 귀향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고 공표했다.라오스와 접경지인 맹납농장의 부분지청들은 도시로의 귀향이 수락되지 않자 이미 나무에 칼금을 낸지 2~3년이나 된 백 그루에 가까운 고무나무를 베어버렸다. 파업의 물결은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집단 단식투쟁까지 벌어졌다. 1월 23일, 운남성 정부로부터 급보를 받은 국무원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지난번 전국지청업무회의에서 국영농장의 지청문제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부족했고 어떤 규정은 지나치게 개괄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더하여 장기간 해결되지 못한 농장의 수많은 문제들이 쌓이면서 청년들로 하여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느끼게 했다고 반성했다. 이후 회의 참석자들은 국무원 지청부서가 상부에 보고한 <일부 집아의 지청의 청원 소요문제 처리에 관한 지시 요청 보고> 중에 제시한 6조항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1) 국영농장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여 농공연합기업으로 만들어나가고 국가는 이를 장려하며 직공의 임금을 적절하게 올린다.

(2) 협의를 거쳐 고향 도시로 인사이동을 시켜야 할 경우, 병이나 가정형편의 곤란에 의한 퇴직신청 처리에 관한 종전의 규정을 참조하고, 지청부문에서 변함없이 책임지고 처리한다.

(3) 중소도시의 직공이 퇴직이나 은퇴하고 난 후에는 농장에 있는 그 자녀를 채용할 수 있다.

(4) 국영농장에 있다가 참군한 지청은 1979년부터는 퇴역한 후에 부모가 께신 곳으로 돌아가서 직장을 분배받을 수 있다.

(5) 도시에서 직공을 모집할 때 농장에 가서 그 도시에서 하향한 지청을 모집해 올 수 있도록 허가한다.

(6) 상해근교에서 운남성으로 간 청년의 경우 본인이 원적(原籍)에 있는 사대(社隊)에 가겠다고 희망하면 이를 허가한다.

그날 오후 국무원 비서장은 사천성과 운남성 정부에 전화를 걸어 국무원회의의 요지를 알려줬다. 이에 1979년 2월 상순 운남성에서는 베이징, 상하이, 성도 시, 중경 시, 곤명 시 등의 대표를 소집해 국무원의 "6조"의 요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운남성의 곤명시 대표와 사천성의 성도 및 중경시 대표는 매우 명쾌하게 6개월 내로 농장의 지청을 고향 도시로 돌려보내는 일을 우선적으로 정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임시변통의 방법으로 병이나 가정형편의 곤란에 의한 퇴직신청의 길을 이용하는데 동의했다. 6조의 요지는 운남성의 개간지역에 있는 각 농장으로 전파되었고 지청들은 이 소식에 매우 환호했다. 지청들은 하나같이 6조를 이용해 도시로 귀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여러모로 궁리했다. 이렇게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운동은 운남성의 개간지역의 각 농장에서 갑자기 생겨났다.
운남성의 개간지역에서 일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기 운동'은 매우 빠르게 각지로 퍼져나갔다. 1978년 12월부터 21개 성, 시, 자치구에서 하향지청과 변경지원지청이 도시로의 귀향을 요구하는 집회와 청원활동을 벌였고 1979년 2월에는 전국 단위로 확산되었다. 많은 지방에 있는 농장의 지청들이 도시로 귀향하겠다고 소요를 일으켰고 생산 대에 배속되어 있던 기혼 청년, 이미 현지 지방에서 취업시켰던 지청, 하향 후에 참군했다가 퇴역해서 외지에서 일하고 있는 지청, 그리고 여러 부류의 하방한 사람들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또한 각지에서 청원조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뿌리고 대자보와 표어를 내붙이고 집단상경하여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거나 청원가두시위를 했는데, 나중에는 임의로 파업해 버리고 단식투쟁까지 했다. 더 심하게는 지도부를 공격하고 간부를 구타했으며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상점을 털고 교통시설을 파괴하는 위법행위를 서슴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하지만 운남성과 신강의 아커수 지구를 제외한 대규모 개간 지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변경에 있는 내몽골과 해남성의 개간 지역, 하향해 있는 청년 수가 가장 많은 헤이룽 강 변단에서는 어떠한 소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청의 농장 이탈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어서, 소요가 일어나지 앟은 곳도 피해를 입었다. 헤이룽 강 병단에서는 몇 달 사이에 15만 명의 지청이 도시로 귀향하기 위해 수속을 밟느라 정상적인 생산과 업무 질서가 무너졌다. 건삼강(建三江)농업관리국에 소속되어 있는 농장의 직공 중에서 지청이 8%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 3/4이 한꺼번에 도시로 귀향해버리자 기관차를 운전할 사람도 없고,장부계산을 할 사람도 없었으며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도 없고 환자를 돌볼 사람도 없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심각한 손실을 입은 곳은 운남성의 개간지였다. 1979년 말, 상하이에서 운남성의 각 농장으로 간 4만 7600명 중 3천명만 남았고 사천에서 온 4만 천명 중에는 500명만이 남았다. 등현은 저서 '중국지청몽(中國知靑夢)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학교가 휴강하여 교실문은 꽉 닫혀있었고 병원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중대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떠난 빈집들을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떠나간 그 자리에 까마귀와 뱀이 새집삼아 들어와 살고 있었다. 기계경작부대에는 녹슨 기차들만이 가지런히 집안에 엎드려 있었다. 지난날 거친 목소리로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던 마부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봄갈이를 할 때인데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너른 밭에는 땅을 갈고 파종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수천수만 경(頃)의 칼금자국이 남아 있는 고무나무 숲에는 잡초가 무성했다.어느 농장에는 놀랍게도 수백 명의 늙고 병든 농장의 원 노동자들과 가솔들만이 남아 있었다.한 상급기관의 지도자가 “천하제일단”임을 자부하던 맹납농장을 시찰한 후에 무거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끝내 곁에 있던 직원에게 “우리는 지금까지 뭐하고 있다가 왜 이제서야 겨우 그들을 붙잡아 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지청들의 도시 귀환이 농촌에 끼친 직접적인 경제손실은 천만 위안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운남성의 농지개간관련 분야의 손해는 1,872만 위안에 달했다. 문제는 농업 노동력의 유실만 일어난 게 아니라 농장을 지탱해주었던 각종 전문기술분야의 인재들과 간부집단을 잃었다는 것이다. 교사, 회계사, 출납, 의사, 약제사, 간호사, 수의사, 농업기술자, 공업기술자, 조종사, 노이구기술공, 전기기술공, 차량기술공, 공구기술공, 고무나무에 칼금을 내는 기술공 등 모든 전문기술자들이 사라졌다.
당국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왕진 부총리는 직접 각지를 돌아다니며 타일렀고 상하이, 운남, 청해 등의 성과 도시의 지도부는 소요현장에 깊숙이 들어가 조사, 처리했다. 요녕성은 성 방송대회를 열어 설득과 교육 작업에 들어갔고 헤이룽 강 성은 긴급통지를 발표하고 주요 책임자들로 팀을 꾸려 농장으로 가서 일처리를 했다. 강소, 안휘, 강서, 호남 등의 성에서는 지청 소요의 징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적시에 선도해 사태를 매우 빠르게 수습했다. 이렇듯 각지에서는 보편적으로 하향청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책을 조정하고 조치들을 개선해나갔다. 현실적인 곤란으로 도시로 귀향해야 하는 지청에 대해서는 주동적으로 해결했고 정책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정책에 따라 농촌에 남아야 하는 지청에 대해서는 사상공작을 열심히 하고 안착조건을 개선하여 그들이 생산과 생활에서 겪고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협조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3월 중순이 될 무렵에 '도시로의 귀향 운동'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5, 6월엔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습되었다.
1980년 여름, 국무원 지청부서는 1년여간 각지에서 중앙의 정책을 관철, 집행하여 지청문제를 종합적으로 계획하고 해결한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널리 방법을 찾아 350만여 명의 지청이 취업하도록 안배했는데, 특히 1972년 이전에 하향한 백만 명에 가까운 노(老) 지청을 우선 안배했다. 아직 농촌에 있는 200만 명의 지청은 연내에 대부분 안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상산하향범위를 축소하여 이미 노동력이 충분한 농장에 청년들을 내려보내는 걸 자제했다. 국무원 지청부서는 심도 있는 조사연구와 광범위한 의견청취를 기초로 하여 <지금의 지청상산하향공작에 관한 몇 가지 의견>을 내놓았고 중앙서기처에 보고 된 후 토론을 거쳐 원칙적인 동의를 받아냈다.이어서 당 중앙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취업회의에 상정하여 토론을 거쳐 수정했다. 1980년 9월 6일, 국무원 지청지도소조는 이 문건을 각 성,시,자치구에 발송했다. 문건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앞으로는 도시의 진학을 할 수 없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안배한다. 이때 각 지역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적절한 대책을 세우며 획일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하향시키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하향하지 않는다. 전부, 아니면 대부분을 도시에 안배할 수 없는 경우 도시와 농촌 두 지역에서 모두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안배한다.

둘째, 현지 농촌에서 생산대에 배속된 지청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가가 관심을 갖고 끝까지 책임진다.”는 정신에 입각하여 1,2년 내에 그들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안배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셋째, 교현(郊縣:어떤 도시의 교외에 위치하며,그 도시의 관할에 속하는 현)에 있는 지청농장 및 지청대에 지청을 안착시켜야 하는 곳에서는 정치동원과 경제적 흡입을 결합한 방법을 실행한다.지청농장 및 지청대에 들어간 지청의 주거와 양식관계는 도시에서와 변함없고 농장에 남아 취업하는 경우 근로연한을 계산한다.

넷째, 각지의 지청업무기구는 일률적 처리를 강요하지 말고 조정방법(합병 철회 포함)은 상황에 따라 자체 결정한다.

이 문건이 주목을 끈 한 가지는 “능히 하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은 하향하지 않는다.”라고 명확하게 선포한 점이었다. 즉, 더 이상 도시의 지청을 하향에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상산하향이 곧 종지부를 찍는다는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1979년에는 전국에서 24만 7천명을 하향시켰고 상하이와 서장성에서는 하향 동원이 없었다. 그리고 1980년 귀주, 운남, 서장, 영하, 광동, 상하이, 강소, 절강, 안휘, 산둥 등의 10개 성, 시, 자치구에서는 하향동원의 종결을 선포했으며 기타 19개 성, 시 자치구에서는 15만 5천명만 동원했다. 1981년엔 각지에서 지청을 도시에서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되어서 아직 직업을 구하지 못한 96만명을 안배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그후 중국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에 따라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기업들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 계획을 대대적으로 단행했고, 특히 산업구조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기존에 농업 위주였던 산업이 공업, 상업,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에 그동안 당국을 골치아프게 했던 도시의 취업난이 완전히 해소되었고 오히려 농촌의 노동력을 도시로 끌어내어 산업 단위에 투입시켜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리하여 상산하향 운동은 존재가치를 상실했고 중국 정부는 1980년 이후 더이상 상산하향 정책을 집행하지 않았다.
다만 하방이 꽤나 오랜기간 동안 진행된 정책이다보니 현대에도 하방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는 말이며, 낙후지역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보내는것을 관용적으로 하방이라고 한다. 또한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대학 진학률 또한 급속히 올라가서 왠만한 중산층 가정이라면 자녀를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대졸자 구직수요가 구인수요를 초과해서 대졸실업문제가 심각해졌다. 또한 후커우 제도로 이동을 어느정도 틀어막아서 한국, 일본, 대만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농어촌 지역의 고령화 또한 심각한 문제점인데 중앙정부에서 대졸실업난 해소 및 농어촌 발전의 일환으로 대학생이나, 청년실업자, 예비 공산당원들, 은퇴자들에게 농어촌 지역이나 낙후지역으로 취직, 발령보내서 인센티브를 주거나 공산당 가입에 가산점을 주는 등 혜택을 준다. 그러나 이들 낙후지역의 임금수준이 별로 높지 않아서 젊은층들은 꺼려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2020년 코로나 19로 도시지역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별수없으면 농어촌으로 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


상산하향운동은 중국의 농지개간산업에 크게 이바지했다. 전국 2천여 개의 국영 농장은 농업의 현대화 건설을 추진했고 중국 국민 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특히 헤이룽 강, 신강, 내몽골, 운남, 해남 등의 대규모 개간 지역에서, 지청들은 전역한 병사 및 원로 농지개간 직원과 현지 군중들과 함께 광활한 볼모지를 양전(良田)과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수많은 지청들은 농촌에서 각종 직업의 전문가로 변신했다. 육묘와 조림, 바산의 발 채석, 수로 도로 건설, 그물 고기잡이, 제방 쌓기와 황무지 개발, 방목, 돼지와 닭 사육, 양어와 양을 포함한 일들에 종사했다.
이외에도 민영학교의 교사, 농의무원, 회계, 관리인, 수의사, 트랙터기사 등을 담당했다. 그들은 농촌에서 야간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했고 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혁명가도 만들어 불렀으며,공동 의료 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소형 수력발전소 설립에도 적극 나섰다. 그리고 농기구수리사업을 발전시켰고 양종(良種)을 널리 보급하고 토양을 개량하는 등 선진화된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그들의 노고 덕분에, 상산하향 운동 이전 낙후되고 비위생적이어서 시도 때도 없이 전염병이 창궐하던 중국의 농촌들은 운동 이후 상당히 발전된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위생적인 환경을 갖출 수 있었으며, 지식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워 농민들의 자녀를 가르치면서 문맹률이 크게 줄어들어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60%를 상회했던 문맹률은 1970년대 중후반에는 20%대까지 격감하고 농촌의 소학교 진학률이 크게 상승했다.

4.2. 부정적인 평가


상산하향 운동의 시행 자체는 1950년대 중반의 중국 입장에서는 확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책의 시행 과정이 너무도 무모하고 거칠었다는 것이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농촌에 던져진 하향청년들은 곧 자신의 눈앞에 닥친 현실에 고통받아야 했다. 많은 이들은 너무나 열악한 농촌에서 굶주리다 못해 닭과 개, 소를 잡아먹었고 농민들의 재산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농민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농민들 역시 이들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자 했고 자연히 하향청년과 농민간의 유혈충돌은 상산하향 운동이 진행되는 내내 지속되었다. 게다가 간부들 중 질나쁜 자들은 농촌으로 온 청년들에게서 돈을 뜯어냈고 여성들을 강간하기까지 했다. 특히 1958~1961년 대약진 운동 시기 정부의 실책으로 참혹한 기근이 발생했고, 자연히 하향청년과 토착민 간의 '밥그릇 투쟁'은 극에 달했다.
그나마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기간은 사정이 나아졌다.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나름대로 지각있는 공산 정치가들은 상산하향 정책을 이전보다 체계적이고 현실에 맞춰 추진하며 성산하향 운동으로 인한 부작용을 되짚어보고 이를 개선할 방도를 논의했다. 그 결과 1966년으로 접어들 무렵엔 하향 청년들이 농촌에서 비교적 적응할 수 있었고 농민과 하향청년간의 유혈사태의 빈도 또한 줄어들었으며 식량 생산량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농촌에 적응하지 못한 청년들이 백만 명이 넘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억지로 농촌에 내려보낸 당국을 원망하고 '반란'을 꾀했다.
그러다가 1966년 8월 마오쩌둥의 비호하에 홍위병이 문화대혁명을 단행하자, 가슴 속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하향청년들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향시킨 관료들에게 보복하고 농촌을 짓밟았으며 도시로 올라가 온갖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중국의 법질서는 마비되었고 이들을 제어해야 할 경찰과 군마저 마오쩌둥의 "저들을 막지 마라."는 지령 때문에 감히 막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이용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누구도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자신마저 통제 불가능한 골치거리가 된 청년들, 특히 1966년부터 1968년까지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대로 학교에 남아있으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졸업생들을 처리하기 위해 상산하향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1962~1966년의 그것과는 달리 무계획적이었고 머나먼 변경으로 이동해야 할 지청들에 대한 배려는 형편없었다. 처음에는 생산의 정상화로 경제성장률을 크게 끌여올렸다고는 했지만 오래 못가서 한계를 맞이했으며 이로 인해 농촌, 산간 지역, 변경 일대로 배치된 이들은 당국의 별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생존해야 했고 자연히 중국 각지는 무법 지대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덩샤오핑 집권 이후 엄타 운동의 배경이 된다.
이 모든 참사는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면 국가를 재난에 빠뜨리는 걸 주저하지 않은 마오쩌둥이 초래한 결과였다.

5. 지청문학(知靑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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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문학은 농촌으로 옮겨져 재교육받은 '지청(知靑)'들의 삶과 고통을 묘사하고 문화대혁명을 조명한다. 일부 작가들은 농촌에서 겪은 핍박으로 인한 고통을 절절하게 묘사하며 문화대혁명의 어둠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또다른 작가들은 농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혁명 정신을 되새겼던 젊은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작가는 량사오성, 한소공, 장청지, 사철생을 들 수 있고,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량사오성의 <금야유폭풍설(今夜有暴风雪)>, <저시일편신기적토지(这是一片神奇的土地)>, 사철생의 <나의 머나먼 칭핑완(我的遥远的清平湾)> 등이 있다.

6.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