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타

 

严打/(엄하게 처벌한다)
1. 개요
2. 현황
2.1. 1983년 엄타
2.2. 1996년 엄타
2.3. 2001년 엄타
2.4. 2010년 엄타
2.5. 2018년 엄타


1. 개요


중국판 엄벌주의범죄와의 전쟁이다.[1]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개방이 이뤄지고, 이때부터 빈부격차가 심해졌는데, 이미 문화대혁명 시절 공권력이 약화된 마당에 갑자기 사회기강이 풀어지자 치안이 상당히 악화되고 마약사범, 흑사회 등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2]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4인방의 사병 비슷하게 움직인 홍위병이 주동이 되어 공권력을 공공연히 무시했기 때문에[3] 이 기간 동안 공안기관이나 사법기관은 상당히 약화되었고, 범죄 방지 능력도 떨어졌다. 이 때문에 범죄자들이 사법기관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초기 홍위병들은 대학생-고등학생으로 그당시 기준으로는 고학력자들이었으나 이후 부화뇌동해 참가한 홍위병들 상당수는 아예 초등 수준에서 학교를 팽개치고 마오쩌둥 어록만 읽으며 반동세력을 때려잡으라는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자 무학력 무재산 무직업인 이들은 범죄자가 되기도 쉬웠다. [4]
이렇게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1983년 덩샤오핑은 치안 유지, 정국 수습, 공권력의 무서움을 인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극약처방을 꺼내들었다. 실제 한국에서 비춰지는 중국 공안의 살벌한 이미지는 마오쩌둥 시절이 아니라 바로 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엄타"는 사실 좁게 말하면 이 1983년 엄타만을 지칭한다.
허나 이 과정에서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은 솜방망이로 보일 정도로 수많은 공권력 남용(속성 재판, 자백 강요, 고문)과 사형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공개처형도 이루어졌다. 즉결처형은 없었지만, 체포로부터 재판확정-사형집행까지 이뤄지는 기간이 심하면 1주일로 단축될 정도로 사법과정을 최대한 간략화했다. 그리고 서방국가에서는 징역형으로 대신할 마약사범, 단순강간범, 횡령범, 상습절도범도 사형에 처해졌다.[5] 누명을 쓰고 징역형이나 사형을 당했는데 나중에 진상이 밝혀지는 일도 있었다.
처벌만 강해진 게 아니고, 법 자체도 굉장히 엄해졌는데,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죄목이 이른바 건달죄라는 것으로, 요즘에는 단순히 성적 문란 정도로만 볼 문제도 범죄로 규정하고 엄하게 처벌했다. 심지어 혼전성관계나 댄스파티 같은 행위조차도 건달죄로 고발당해서 징역살이를 했던 연예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엄타는 중국에서 국가의 엄벌 주도 정책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1983년 이후로는 인권 문제로 서방의 눈치를 보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상대적일 뿐 여전히 엄격한 편으로, 주로 정권교체기에 민심 다잡기용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2. 현황



2.1. 1983년 엄타


[image]
재판이 끝난 범죄자들은 죄명과 자기이름이 적힌 간판을 목에 걸고 거리를 돌며 조리돌림 후 광장이나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죄목을 보면 대체로 강간죄, 혹은 건달죄의 풍기사범이다.
덩샤오핑이 주도해서 1986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이 엄타가 개시된 이유는 1983년 양더즈(杨得志) 총참모장의 사위(현역군인)가 휴가중 정저우시에서 삼합회에게 피살되었는데, 양더즈가 덩샤오핑에게 "요즘 범죄자들은 현역 군인도 안 무서워합니다. 이게 뭡니까"라고 따졌기 때문이라고 한다.[6]
여러 죄목으로 100만 명 정도가 체포되었다고 하며, 여러 강력범죄자들뿐만 아니라 아래 설명할 건달죄(流氓罪)와 같은 풍기문란 사범들도 체포되었다. 이들 중 2만 4천 명 정도 사형당했다.
이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로서 인민공사(집단농장)에 사실상 예속되어 있던 농업이 자유화되면서 생산성은 늘었지만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이농인구가 폭증했고, 또한 문화대혁명 당시 강제적으로 농촌에 하방되었던 이들도 도시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도시실업자 또는 노숙자가 되었기 때문에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사라졌던[7] 조직폭력배들이 되살아나면서 도시에는 치안불안이 심해졌다.
단순 범죄단속이라기보다는 인민에게 공권력의 무서움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단순폭행치사나 강간초범, 또는 단순 절도범도 엄벌에 처해졌고 상당수가 운동장이나 광장 같은 곳에서 공개처형되었다. 재판도 인민재판식으로 대중이 참관하게 하여 판결을 내리는 단심제였다. 다만 문화대혁명 때와는 달리 대중들이 판사를 제치고 직접 판결을 내리거나 집단폭행(...)으로 처형하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 건달죄는 더 황당한데, 지금으로 치면 기껏해야 경범죄로 처리할 문제를 매우 엄하게 처리해서 음란물(포르노)을 팔거나 홍콩-대만의 음반이나 비디오를 보거나 혹은 심지어는 성관계 파트너가 많다는 이유로[8]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와중에서 하급공무원들은 부패사범으로 걸려서 처형되기는 했지만, 정작 고위공무원 중에는 당시 외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정부패로 떼돈을 축재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거의 처단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본 대학생들이 분노하여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주더 원수의 손자 주궈화도 강간죄로 처형당했다.
현재 중국 정부 공식 입장도 범죄 증가를 막는 효과는 있었으나,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2.2. 1996년 엄타


1996년 봄부터 1997년 봄까지 실시되었다. 덩샤오핑에 이은 장쩌민이 개혁개방정책을 계속 밀어붙였지만, 자본주의화에 따르는 배금주의가 사회 곳곳에 침투함에 따라 민심이 흉흉해지고 범죄가 계속 늘어났다. 1983년에 엄타가 실시된 계기는 양더즈 사위 피살사건이었는데, 1996년 엄타도 몇몇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중에는 유명배우 부부인 저우리징[9]의 아내이자 역시 배우인 푸춘잉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저우리징 부부는 자택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는데, 리모델링이 얼마 지나서 인부 두명이 하자없냐며 방문했다. 푸춘잉은 이들을 집에 들여 차를 대접하다가 돈을 노린 이들에게 가사도우미와 딸과 함께 잔인하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또한 1996년 2월 2일 위성정당의 하나인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간부이자 제8차 전인대(국회) 부위원장이던 리페이야오가 강도로 돌변한 경호원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며칠 후인 2월 8일 중국 건국이래 최초로 수도 베이징에서 총기무장강도가 발생, 은행 직원 두 명이 피살되고 수백만위안이 털리는 사건이 벌어졌다.[10] 3월에는 한 전과자가 대담하게 베이징의 군부대 정문 앞의 초병을 살해하고 총과 실탄을 탈취해가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자는 이 훔친 총으로 경찰에게 보복을 다짐, 베이징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까지 도피하면서 5명의 경관을 살해하는 등 여러 강력사건을 벌였다.
이런 사건이 계속 발생하자 중국인민은 불안에 떨게 되었고, 1996년 3월 양회기간중에 중국 정부는 엄타를 선포했다. 이 당시는 특히 사제 총기 단속에 힘을 기울였으며 각 성마다 수천 정의 사제 총기가 압수되었다. 또한 민심을 악화시키는 납치, 죄질이 나쁜 사기, 뺑소니 등의 범죄자들에게 관용없이 대체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당시도 공개처형[11]이 실시되었다.(1990년대 말 공개처형은 중국에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1983년에 사형까지 갈 수 있었던 건달죄는 1997년 폐지되었다. 법률로서 명료성이 결여된 건달죄는 폐지되었고, 이것이 포괄하고 있던 성희롱이나 아동강간, 아동포르노, 집단음란행위 등의 죄목은 좀 더 명료화되어 신설되었다.

2.3. 2001년 엄타


주룽지 총리의 주도로 실시되었다.

2.4. 2010년 엄타


보시라이가 창홍타흑이라는 슬로건으로 충칭시에서 진행하였다. 붉을 홍은 애국주의, 혁명주의 등 공산주의적인 요소들, 흑이란 흑사회를 지칭한다. 훗날 보시라이가 야심가로 밝혀지고 실각되면서 창홍타흑도 사실은 사회의 빈부갈등을 이용하여 정치적 업적을 쌓고 기업인, 관원들을 수탈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고 지적당한다.

2.5. 2018년 엄타


시진핑 정권 아래 소흑제악이라는 슬로건으로 진행, 3년을 기한으로 잡고 있으므로 2020년 현재 시점에서도 진행 중이다.
시진핑이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많다. 다만 그러한 목적이라면 시진핑 집권 초기에 단행했던 부정부패 척결이나, 문화대혁명 때처럼 정치 거물들이 걸려서 낙마하는 사태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러한 사례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반체제 인사 등의 정치범들에게도 이러한 죄목이 적용되었다는 사례가 알려져 있지 않다.[12]
2018년 1월~8월 동안 공안부는 무려 2,500개의 범죄조직을 해체시키고 조직원 34,000명을 기소했다.# 때문에 삼합회는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처럼 권력과 유착해서 살아남거나 점차 해외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1] 사실 노태우 정권 시절의 범죄와의 전쟁이 엄타보다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판 엄타라고 해야 할듯.[2] 1979년 광둥성 3곳(선전시, 주하이, 산터우)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는데, 개방정책으로 자본주의 퇴폐문화가 들어온다고 덩샤오핑에게 보고하자, 덩은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도 들어오지만 파리도 들어온다.'라고 했다고 한다.[3] 인민법원의 법관들이나 검찰들이 반동으로 몰려 홍위병의 구타를 당했고, 홍위병이 사설 감옥을 만들어 '반동'들을 체포해서 린치해 치사까지 이르게 하는데도 공안기관원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4] 초기 홍콩 느와르 명작인 성항기병은 홍위병 출신 범죄자들이 주인공이다.[5] 지금도 단순 마약 복용이 아닌 마약 매매나 밀수 등을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한다.[6] 이렇게 허난성 사람들이 사고를 쳐서 엄타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허난성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카더라가 있다.[7] 국민당 지배하의 상하이는 범죄소굴이었으나, 공산화 된 후 공산정부는 삼합회들을 무조건 체포해 처단했다.[8] 83年“严打”中这名王姓女子因与10多名男性发生性关系及裸泳而以流氓罪被判处死刑(1983년 왕모라는 여성은 10여명의 남성과 성관계를 한 후 나체로 수영을 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져 건달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출처 중국 인민망[9] 한국식 독음으로는 주리경. 바로 현재 중국의 대배우인 진도명과 쌍벽을 이루던 배우였다. 그 당시에는 진도명보다 더 유명한 배우였고 중국의 타카쿠라 켄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으나,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작품활동이 거의 줄어들어서 어지간한 중드팬도 잘 모른다.[10] 이 사건의 범인인 루셴저우는 추격해 온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고 공범은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11] 어떤 한국인이 이 당시 연변을 방문했다가 조리돌림 후 공개처형하는 현장을 목격한 일도 있다.[12] 사실 중국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처벌할 때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긴 하지만 어쨌든 정치범이라는 사실 자체는 숨기지 않는 편이다. 대외적으로 욕먹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도전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