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5월 4일 당일의 학생 시위
3.2. 5.4운동의 발전
5. 여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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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는 국권을 찾아내고 안으로는 국적을 몰아내자!'''

전북경학생선언

한반도의 3.1 운동으로부터 약 2개월 후에 발생한,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중국이 이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을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으로 간주하며[1] 학자에 따라서는 이 사건을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 중 하나로 간주하기도 한다.
좁게 보면 1919년 5월 4일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의 시위(5.4사건)만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몇 달 간의 시위와 신문화운동을 포괄하여서 5.4운동이라고 부른다. 당시 학계의 관심을 받았던 후스는 1938년에 "5.4운동은 아직 진행되고 있다."라고 언급했으니 이 사건의 파급력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배경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위안스카이가 과욕으로 홍헌제제를 단행해서 중화제국의 황제를 하려고 하다가 운남에서 차이어가 호국군을 일으켜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취소한 후 사망했으며 이후 남방 각지에는 군벌들이 할거하게 된다. 북방을 장악한 북양군벌도 구심점인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직계, 환계, 나중에 봉계까지 난입하여 아귀다툼을 벌여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1917년에는 청 왕조의 복벽 시도쑨원의 광동 호법정부의 구성으로 중앙정부마저도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2]
한편 중국에서는 사상적으로 커다란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신해혁명으로 인한 자극,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백화문 사용을 둘러싼 소위 문학혁명 논쟁 등이 있었다. 게다가 신해혁명 이후로 언론계가 크게 확장되었기에 1910년대 말의 베이징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들이 서로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이에 중국의 미래를 둘러싼 논쟁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신세였던 조선에서 3.1 운동이 벌어졌고 이 소식은 중국내 주요언론사를 통해 상세히 보도되었다. 3.1운동의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혁신은 외국 사상의 흡수 또한 가속화되어간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청 말부터 유학생의 숫자가 누적되어가면서 그들이 경험한 서양 사상의 영향이 깊어졌고 1차 세계대전 때 참전한 노동자나 당시의 프랑스 유학생들의 열악한 대우가 알려지면서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들은 귀국하면서 후일 1920년대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의 큰 기반이 되었고 이 또한 5.4운동의 열기를 데운 원인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학생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국가에 봉사하는 게 당연시되어있었고 이 탓에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와 별개로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돤치루이 내각은 일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파벌을 배제하려고 했고 이것은 반제국주의, 반정부적인 갈등을 고조시켜가고 있었다.

3. 전개



3.1. 5월 4일 당일의 학생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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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외국이 아직도 이기적, 군국주의적이며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중략) 우리는 곧 더 큰 세계전쟁이 조만간 도래할 것이며, 이 대 전쟁은 동양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19년 베이징대학 졸업생의 회고

5.4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파리 강화 회의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반도 전역에서 군사적 행동을 벌였고 이어서 1915년 1월 18일에는 위안스카이의 베이징 정부에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제기했다. 이 탓에 중국인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칭다오가 중국에게 반환되기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1918년 11월 11일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정부는 3일간의 휴일을 공포했고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합국이 중국에게 칭다오를 반환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칭다오의 권리에 대해서 중국 정부와 비밀 협상을 마친 상태였고 연합국 역시 이에 따라 일본에게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결국 파리 강화회의는 단 한 부분(언젠가 중국에게 칭다오를 돌려준다.)을 제외하고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협상단이 베이징 정부와 광둥 정부가 연합해서 내보낸 탓에 서로 갈등을 맺기 일쑤였다. 이에 중국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무려 5천 통에 달하는 전보가 중국 대표에게 날아들었다.
이에 5월 초에 학생들은 21개조 조약을 수락한 5월 7일에 학생 2만 5천 명의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정부는 시위를 단속하려고 했지만 이는 오히려 분노를 야기하여 시위 날짜를 5월 4일로 사흘 앞당기는 결과만 낳았다. 마침내 오전 10시에 학생 대표가 모여서 시위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11시에 교육부 대표가 베이징대학에서 담판을 벌였지만 참여를 잠시 미루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오후 1시에 학생 3천여 명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하였다. 이때 다시 교육부 대표와 육군, 경찰 총감이 학생들을 달랬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대회와 데모를 치른 뒤 전북경학생선언이 배포되었다.

(전략)...산동의 상실은 중국의 영토 보전의 파괴다. 중국의 영토가 일단 파괴되면 중국은 곧 멸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은 오늘 대오를 갖춰서 각국 공사관으로 가서 각국이 정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전국의 농공상 각계각층이 모두 일어나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외적으로 국권을 찾고 대내적으로 국적을 제거하기를 바란다.... (중략)

'''중국은 망하려 한다. 동포여, 일어나라!'''

또한 이와 별도로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아, 국민이여! 경애하는 애국 동포여! 5대국은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비밀 조약과 오랫동안 희구하던 칭다오와 산둥의 독일 이권의 반환에 관한 그들의 결정에 대해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문제들을 중일 간의 직접 협상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이 흉보에 하늘도 빛을 잃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정의 인도 공정이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행복한 기대가 아니었던가?...(중략)... 우리를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와 대접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정하다.

이제 정의와 공정은 더욱 침해 당했다...(중략)... 산둥의 상실은 중국의 상실이다. 이 땅의 소유자로서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는 어떻게 모욕과 억압, 우리를 노예화시키는 시도를 방관하면서 최후의 구원을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알자스-로렌을 위한 투쟁에서 프랑스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다. 아드리아 해협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리아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다. 조선인독립투쟁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를 외쳤다.

우리는 이제 나라가 복속의 위협을 당하고, 영토가 할양되려는 위기에 임박해있다. 만일 국민이 아직도 나라를 구하려는 최후의 노력으로 분연이 단합될 수 없다면 그들은 정말 20세기의 가치 없는 종족이며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다. 노예와 소나 말 같은 고통을 참을 수 없기에 구국을 바라는 동포는 없는가?

(중략) 우리나라는 절박한 위험에 빠져있다. 그 운명은 실낱 같다!


대회 후 2시에 학생들은 천안문에서 5색기(당시 중국의 국기)를 들고 그 뒤에는 전통적 중국의 장의용 두루마리가 뒤따랐는데 거기에는 "루쭝위(陸宗輿), 장쭝샹(章宗祥), 차오루린(曹汝霖)[3]의 이름은 천년간 악취가 나리라. 베이징 학생들은 눈물로 그들을 애도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에 이 행렬은 매우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기율이 다소 무너졌다. 행렬이 공사관 구역의 입구에 들어서자 경찰들이 치외법권이었던 공사관 구역의 입장을 막아섰다. 결국 학생 대표들이 부재중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공사들에게 진정서를 남겼다. 이후 2시간 동안 입장을 거부 당하자 점차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 "외교부로 가자!", "매국노집으로 가자!"를 외치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변화에 데모 지도자로 뽑힌 학생도 그걸 말리지 못했다. 그들은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서 단기서를 위시로 하는 군벌들과 외교관들의 이름을 불렀다. 4시 30분경 외교부 관사 근처의 차오루린의 집에 도착했다. 문은 당연히 굳게 닫혀있었고 자택은 경찰과 헌병들에게 방어되고 있었다. 군중들은 차오루린에게 이 사태에 대해서 직접 해명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헌병들은 학생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돌과 백기를 창 안으로 던지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간신히 군중들이 진정할 무렵 학생 5명이 벽을 기어올라 창문을 깨고 들어가 정문(혹은 후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집에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전등 파손으로 인한 실화는 설도 있다.) 이때 거실 안에 장쭝샹이 발견되자 학생들을 그를 구타하였으나 경찰이 개입해 곧바로 흩어져버렸다. 한편 톈진에 있는 그의 집 역시 그곳의 시위로 파괴되었다.
5시 45분쯤 불 때문에 겁먹은 학생들이 대부분 해산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등장해 32명을 체포했다. 이후 공사관구 주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8시쯤 차오루린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도 진화되었다.

3.2. 5.4운동의 발전


학생 시위대들은 7시경 인원 확인을 한 결과, 몇 명이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엄령 아래에서 그들이 재판 없이 즉결처분될 수 있다는 소문에 크게 분노하여 베이징 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를 포함한 회의를 열어 곧바로 학생들을 석방시키자고 결의했으나 차이위안페이가 자신이 석방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한편 학생들의 시위에 북양정부는 크게 당황해 했다. 그러나 단촤루이는 자신을 공격한 대학들을 혐오하여 그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결국 5월 5일 교육부에서 학생운동을 자제하는 명령이 내리고 군경을 증강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5.4운동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실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 민중의 대다수는 학생들을 옹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베이징에서는 3천 명의 학생들이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조치들과 별개로 정부는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언론을 검열하고 해저전신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무선통신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조계를 통해 전보를 보냄으로서 정부의 감시를 빠져나갔다. 톈진 조계를 통해 다음날 5.4운동은 상하이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곧바로 항의 전보가 쇄도했다. 5월 6일 상공회의소는 일본과의 일체의 상업 관계를 단절시키고 매국노와 압제적 관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광동 정부의 대표로서 협상을 담당하던 탕사오이 역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였다. 또한 당시 상하이에 체류하던 쑨원 역시 학생들을 지지하고 베이징에 항의 전보를 보냈다. 광둥 정부 역시 학생들을 지지하는 회의 결과를 각 성에 통보하였다. (이것이 원인중 하나가 되어 5월 15일 양측간의 협상은 결렬된다.)
결국 전국에서 밀려오는 항의에 굴복하여 5월 7일 정부는 학생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5.4운동의 영향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2주 만에 톈진, 상하이, 난징, 우한과 같은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었으며 그 밖에도 장쑤, 저장, 산둥, 후난, 산서, 섬서, 허난, 안후이, 강서, 푸젠, 광둥, 광시성에도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또한 도쿄에서도 5월 6일 4천 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에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70여명 안팎의 경상자와 29명의 중상자를 내었고 32명이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시위 확대와는 별개로 북양정부는 사회의 단속을 강화하였다. '매국노'로 지명된 외교관들의 사표를 거부하고 차이원페이를 해임하였으며 학생들에게 강경한 진압을 명령했다. 이에 육군총장은 베이징을 떠났고 후임 총장으로 친군벌적인 인물이 임명되었다. 이에 분노한 베이징 학생들은 5월 19일에 총동맹휴학을 결의하면서 대총통 쉬스창에게 6가지 요구를 했다.

1. 파리강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할 것

1. 매국노 외교관들을 처벌할 것

1. 교육총장과 베이징대 총장을 복직시킬 것

1. 인권옹호를 위해 정부가 학생에게 가한 억압조치를 철회할 것

1. 5월 7일 일본정부의 중국학생 공격, 체포에 항의하고 그들의 석방과 경찰의 처벌을 얻어낼 것

1. 5월 15일 정지된 상하이 평화협상을 재개할 것

이 동맹 휴학 역시 전국 각지로 파급되면서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도시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5월 21일 정부는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게다가 일본이 항의를 하면서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자 초조해진 정부는 무력으로 학생 운동을 진압하면서 학생들이 발행한 언론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물론 온건책이나 운동 자체를 흐지부지하게 만드는(방학을 빠르게 하거나, 아예 학생들의 일부를 정부 공무원으로 흡수하는 식으로) 방법이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정부는 강경책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정부는 경찰들을 동원해 1,150명의 학생을 구속하였다.[4]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더욱 강경하게 나서, 시가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에 더 이상 학생들을 체포해 수용할 공간이 없어진 정부는 군중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베이징의 여론은 정부에게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 정부에게 불리해져갔다.
6월 5일에는 상하이에서 동맹 휴업이 시작되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상점 문에는 '상인과 학생들은 구국을 위해 결속해야 한다.', '우리에게 자치를 주고 학생들을 석방하라.', '매국노를 처벌할 때까지 영업을 하지 말자.', '최후까지 감옥에서 버텨라. 우리가 합류하리라.'라 같은 표어가 붙어있었다. 또한 같은 날부터 공장도 문을 닫기 시작하여 6월 11일까지 6~7만 명 혹은 9만 명의 공장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공(罷工), 상인들의 철시를 파시(罷市),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파과(罷课)라 하여 이를 3파 운동이라 부른다. 이때를 계기로 5.4운동은 학생들만의 운동에서 전 중국 민중의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같은 날 정부는 강경책으로 나가는 걸 포기하였다. 오후에 군경들이 모두 철수하였고 학생들에게 구류소를 나갈 것을 요청했으나 학생들은 매국노 처벌, 언론의 자유 보장, 학생 행진 허용, 체포에 대한 공개 사과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 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6월 8일 구류된 학생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대회 속에서 행렬을 지어 구류소를 나갔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정부의 입장이 바뀐 건 베이징 근방의 파업으로 정부, 금융 기능이 마비된 데다가 혼란으로 경제가 마비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나간 중국 대표단들은 조약 체결일에 '산둥 문제에 대한 재고가 허용된다면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겠다.'는 독자적인 목표를 가졌지만 현지 중국인들의 포위로 조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결국 산둥 문제의 재고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가진 채로 베이징에 조약 체결을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5] 이후 칭다오는 1922년에 워싱턴 조약으로 인해 중국에게 반환된다.

4. 신문화운동


신문화운동 문서 참조

5. 여파


  •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두 정당인 중국 국민당(1번째)과 중국 공산당(3번째)이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인해 창설되었다. 이후 중국 각지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시작으로 노동운동 고조기를 맞이하지만 1923년 2.7 사건으로 경한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잔혹하게 진압되고 노동운동 조직들이 해산되면서 고조기가 끝났다.
  • 파리강화회의 조인을 거부하게 된다.
  • 중국 문학은 5.4 운동을 현대문학의 시작으로 본다. 중국 문학은 근대와 현대로만 구분하는 한국과 달리 청대까진 그냥 고대문학, 1840년 아편전쟁부터 5.4 운동까지를 근대문학, 1919년 5.4운동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를 현대문학으로 정의한다. 1949년 이후부턴 당대문학으로 분류한다.

[1] 구 민주주의 혁명은 신해혁명.[2] 광둥 호법정부는 복벽파가 해산시킨 국회의원을 그대로 계승했기에 명분적으로 어느 정도의 우위가 있었다.[3] 차오루린은 5.4운동 당시 교통총장으로 산둥 21개조 체결 당시 외무총장이었고 장쭝샹은 5.4운동 당시 주일공사이며 루쭝위는 산둥 21개조 조인 당시 주일공사다. 이 셋은 대표적인 매국노로 악명을 떨쳤다.[4] 체포된 학생들의 대부분은 침구류를 등에 메고 있었는데 그것은 감옥에서 쓸 용도였다.[5]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외교관들이 스스로 회의장을 나가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아무래도 극적 요소를 위해 변형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