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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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출생'''
1527년 7월 31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사망'''
1576년 10월 12일 (49세)
레겐스부르크
'''재위'''
보헤미아 왕국의 왕
1562년 9월 20일 ~ 1576년 10월 12일
로마왕
1562년 11월 28일 ~ 1576년 10월 12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의 왕
1563년 9월 8일 ~ 1576년 10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
1564년 7월 25일 ~ 1576년 10월 12일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아 (1548년 결혼)
'''자녀'''
안나, 루돌프 2세, 에른스트, 엘리자베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알브레히트, 벤체슬라우스, 마르가레테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
'''어머니'''
보헤미아헝가리의 안나
'''형제'''
엘리자베트, 안나, 페르디난트 2세, 마리아, 카타리나, 엘레오노라, 바르바라, 카를 2세, 요하나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가족 관계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며 개신교에 호의적이었다.

2. 생애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로 스페인에서 교육을 받다가 1548년 스페인 공주 마리아와 결혼했다. 카를 5세는 자기 아들 펠리페에게 모든 합스부르크 영토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가 이에 반대하였다. 오래 전에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카를 5세 세력과 페르디난트 세력이 크게 대립하였다. 1552년에 막시밀리안 2세는 갑자기 아픔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웠다. 이 일은 결정타가 되어 합스부르크의 분열을 촉진한다. 결국 펠리페 2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고 막시밀리안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친해졌다. 모리츠는 비록 개신교도였지만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개신교파 제후의 대표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1세를 공격했다. 모리츠 군영에서 신교도 제후들과 친해진 막시밀리안은 전쟁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자신도 신교도로 개종하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상속권 박탈로 협박을 받자 개종을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로 맹세했고 이를 인정받아 교황과 아버지에게 여러번의 약속끝에 결국 1562년 선제후 회의에서 로마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했다. 그리고 1564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앞서 모리츠를 비롯한 신교도 제후와 친했고, 자신도 신교도 신학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다가 빈에 있을 때도 루터교의 전도사인 세바스티안 파우저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파우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도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런 막시밀리안의 행동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얼마 되지 않아 파우저를 해임하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등 겉으로는 가톨릭을 다시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제국내에서도 개신교는 루터파 신앙만이 공인되었음에도 자신의 영지 오스트리아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서 당시 이단 취급을 받던 재세례파들은 자유로히 신앙생활을 할수 있었다., 30년 전쟁 전후 완전히 박멸되어 루마니아나 트란실바니아로 탈출했고 나중엔 신대륙으로 이주한다. 이처럼 막시밀리안 2세는 종교적 중립을 유지했다. 막시밀리안은 임종직전 다시 루터파 신앙으로 개종하려고 시도 했으나 선입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유언에서 절대로 개종치 않는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결국 개종하진 못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은 성체성사 등 성사를 일반 신도들도 주관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교황이 반대했다. 156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루터파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566년 막시밀리안 2세는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이에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헝가리에 왔다. 하지만 71세였던 쉴레이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게 된다. 쉴레이만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었고 1568년 오스만 제국과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조건은 헝가리의 서부 영토의 관할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부 헝가리는 이미 합스부르크 가가 다스리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샀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3만 더커트의 연공을 바치기로 했다.
1570년 동헝가리 왕국의 야노시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양도받아 헝가리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헝가리 왕위를 양도해준 대가로 야노시 2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성립되었다.
1575년에는 폴란드 왕,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라는 것 때문에 폴란드 개신교도 귀족들의 반발을 사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1] 폴란드를 침공하던 준비를 하던 중 1576년 10월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 제위는 루돌프 2세가 승계하게 된다.

3. 여담


오스만과의 굴욕적인 조약으로 왕의 권위가 떨어졌는데, 막시밀리안 2세가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주세페 아르침볼도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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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연작(,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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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원소 연작(, 공기, , )
당연히 기괴한 모습을 본 신하들은 크게 놀랐으나, 막시밀리안 2세는 오히려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했다. 그리고 궁정 연회에서 초상화처럼 꾸미고 나왔다고 한다. 링크 이 부분은 2015년 7월 5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다뤘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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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9월 13일, 사촌이기도 한 스페인의 마리아(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와 결혼했다.[2]

[1] 현재 폴란드 국민은 2011년 기준으로 87.5%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현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2]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손아래동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