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질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徐質
(? ~ 254)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가평 초년[1] 에 진태가 옹주자사가 되어 강유가 국산에 두 개의 성을 쌓아 구안과 이흠 등을 보내거나 강족들을 모아 위나라의 여러 군을 침입한 상황에서 곽회와 진태가 적을 막을 방법을 상의했는데, 진태가 국성이 멀리 떨어져 길이 험난하기 때문에 군량미 수송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 성을 포위하자고 제시했다. 그 계책에 따라 토촉호군인 서질은 남안태수 등애와 함께 곽회의 인솔을 받아 병사를 나아가게 하면서 성을 포위해 이흠, 구안 등을 포위해 항복시켰다.
254년에 강유와 장억이 이간의 항복을 받으면서 진격했는데, 이에 맞서 장억군을 공격해 장억을 전사시키지만 장억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큰 타격을 입고, 이 피해로 인해 저하된 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양무에서 포위되어 강유와 싸우다가 전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보국장군이라는 직책으로 개산대부라는 무기를 쓰는 것으로 나온다.[2] 이 무기가 앞서서 서황이 썼다고 나오기 때문에 서질은 서황의 아들이며 서질이 서황이 죽은 후 개산대부를 계승했다는 설이 있지만 서황과는 관계 없다. 강유가 장익과 요화를 앞세워 공격하자 사마소에게 선봉을 자처해 장익과 요화의 군대를 무찔렀으며, 사마소의 명령에 따라 촉의 수송대를 공격할 때 강유의 계책에 빠지는 바람에 하후패에게 사망한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는 왕쌍의 계보를 잇는 무력만 있는 바보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보물로 대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정사에서의 장억을 죽였다는 점이나 연의에서 장익과 요화를 이겼다는 점에서 무력에 많은 보너스를 받은 듯.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무지정매 66/36/47/58. 특기는 혼란, 화계, 수습, 진화, 복병, 고무로 지력이 36의 돌대가리라서 계략의 성공성도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하고 연의에서 이긴 요화보다 낮은 무력까지 보면 당최 쓸 구석이 없다. 거기에 서량쪽인데 추행진조차 없으니...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53/80/27/20. 병법은 돌파 하나뿐이다. 구릴 것 같지만 후반부엔 어쩔 수 없이 부장으로 쓰게 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4/80/24/18/43에 특기 5개는 모두 전투(돌격, 일제), 일기토(역공,삼단,나선)에 집중되어있다.
삼국지 11에서 무력이 83으로 샹향이 되었다. 여전히 통솔이 낮아서 부장용으로 쓸만하지만. 일러스트는 도끼를 들고 있다.
삼국지 12에서의 그의 무식한 일러스트는 올돌골과 매우 흡사하지만 적어도 올돌골에 비하면 인간적이다. 자세히 보면 전작과 마찬가지로 도끼를 들고 있는데 촉장들에게 돌진하려는 모습이다. 거기다 전법은 쓰레기인 속공인데 그나마 올돌골은 지력이 무려 '''1'''이라서 쓰레기 취급을 받지만 쓸만한 편인 쳘벽을 가지고 있으니 서질은 안습할 뿐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68/83/24/26. 특기는 훈련 1, 순찰 4, 공성 1. 전수특기는 순찰이고 전법은 창속약화.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6, 무력 83, 지력 24, 정치 18, 매력 43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정치력이 8 하락했다. 개성은 산전, 저돌, 주의는 아도, 정책은 봉시강화 Lv 4, 진형은 봉시, 장사, 전법은 돌격, 교란, 친애무장은 사마사, 혐오무장은 없다.
[image]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강유전의 양무 전투에서 적으로 등장해 단기접전으로 강유에게 사망한다. 병과는 산악기병. 능력치는 무력 74, 지력 78, 통솔 56, 민첩 62, 행운 63. 성격은 보통.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촉군에게 포위당했다가 다굴당해 죽었다고하며 평역에 정사에는 서질이란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류이다.
삼국전투기에선 도쿄 트라이브의 등장인물인 메라로 나왔다.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徐箕/徐質
(?~225)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문제기와 자치통감에는 서질(徐質), 당자전에는 서기(徐箕)로 기록되어 있다.
이성군의 태수로 225년 6월에 병사인 채방 등이 군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키자 살해당했다.
이 당시 위나라에서는 2차례 오나라 원정에 실패하고 225년에 위나라에서 세번째 원정을 계획하는데, 포훈이 반대했지만 이를 강행하기로 하고 준비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기 전에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에서 채방이 당자를 추대해 우두머리로 삼았으며, 채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둔기교위 임복과 보병교위 단소 등에게 청주자사 왕릉과 협력해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도록 했다.
결국 채방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그들 가운데 협박을 받았거나 무리하게 끌려들어간 자와 망명한 자들은 모두 죄를 면해줬다고 하며, 이 반란이 진압되자 우두머리로 추대됐던 당자는 그대로 도망가서 바다를 건너가 오나라의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10월에 위나라에서 계획한 세번째 원정이 실행된 것을 보면 반란 자체는 얼마 가지 못하고 금방 진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