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억
張嶷
(? ~ 254)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탕구장군. 익주 파군 남충국 사람. 자는 백기(伯岐)[1] .
2. 이름 관련
嶷이라는 한자는 '억', '의' 두 음이 있지만 지명, 산 이름 등 특별한 경우 외에 총명하다, 높다, 영리하다의 뜻으로는 '억'으로 발음된다. 그래서 장의가 아니라 장억이 맞는 이름. 하지만 이문열 평역 삼국지나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등 인기있는 삼국지 매체들이 초기에는 장의라고 표기하는 바람에 장억이 아닌 장의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촉 소속에다가 활동시기까지 제법 일치하는 장익이라는 장수도 있으니 헷갈리면 곤란하다.[2]
3. 정사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약관의 나이에 현의 공조가 되었다. 이후 유비가 서촉을 다스리면서부터 따랐으며 이 당시에 유비 측과 유장 측의 전쟁으로 혼란한 통에 도적들이 현을 공격하여 관리들이 다 달아난 와중에 장억이 분연히 나서 도적들로부터 마을사람들을 지켜내어 이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갈량이 북벌차 한중에 주둔했을 때, 후방에서 예기치 못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에 장억이 도위의 신분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러 갔다. 장억은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주연을 연 뒤에, 직접 수하의 사람들을 이끌고 산적의 우두머리들을 베어죽이고 잔당을 추격해서 열흘도 안되어 모두 진압했다.
병이 들고 집안이 궁핍하여 곤란했을때 잘 모르는 사이지만 인정이 많기로 유명했던 광한태수 하지를 찾아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적 있었는데 하지는 성심껏 그를 치료해 주어 병이 나았다. 장억이 도리에 통한 이를 친구로 삼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을 신뢰한것이 이러했다고 한다.
주로 이민족 지역에서 근무했는데 최초 임지는 강, 저족 지역이었다. 이때 아문장으로 임명되어 마충을 따랐는데 문산군의 강족과 남쪽 4군의 남만을 평정할때 대체로 장억의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고 회유책으로 별다른 피해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익부기구전에 이르길 장억은 병마 300인을 받아, 마충을 따라 모반한 강족을 토벌했다. 장억은 별도로 수영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가서, 타리에 이르렀다. 마을은 높고 험준한 곳에 있었기에, 장억은 산을 따라 4~5리를 올라갔다. 강족은 요액에 석문을 만들고, 석문 위에 상을 편 다음, 돌을 그 위에 쌓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은 돌을 떨어뜨려 때려죽이니,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억은 공격할 수 없으리라 여겨, 사자를 보내 그들을 타일러 말하길
강족의 장로는 명을 받고는, 즉시 장억에게 왔고, 군량을 제공하고 군을 통과시켰다.너희 문산의 여러 종족이 모반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상해하니, 천자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시길 악한 무리들을 토멸하라 하셨다. 너희들이 만약 머리를 숙이고 군대를 지나게 하고, 군량과 군비를 보태 준다면, 복록은 영원히 융성할 것이고, 그 보답은 (너희가 베푼 것의) 100배에 이를 것이다. 만약 기어코 따르지 않는다면, 대병이 이르러 주멸할 것이고, 번개가 치듯 공격할 것이니,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촉군은 전진하여 남은 강족을 토벌했고, 남은 종족은 타리가 이미 항복했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어떤 자들은 군을 맞아들여 나아가 항복하고, 어떤 자들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병사를 풀어 공격하니, 촉군은 크게 이겼다.
후에 서남이 유주가 다시 모반하자, 마충은 내항독이 되어(233년) 유주를 토벌했는데, 장억은 다시 (마충에게) 속하여, 항상 관군의 으뜸으로 싸웠고, 마침내 유주를 참했다. 남쪽을 평정하는 일이 끝나자, 장가, 흥고의 요족이 다시 모반하여, 마충은 장억에게 뭇 영채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장억은 초항하여 2천명을 얻었고, 모두 한중으로 가도록 하였다. 건흥 14년(236년)에는 무도군의 저족왕 부건이 약속한 날 항복하지 않자 장완이 걱정했는데 부건과 부건의 동생의 반목을 예측하여 알아 맞추기도 하였다.
후에 남의 월수군(越嶲郡)에서 자주 반란이 일어나자, 이쪽으로 임지를 옮기고 얼마 안되어 남만족을 모두 토벌한데다, 이들의 민심까지 사로잡았다.
장억전에 따르면 이전에 월수군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叟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단, 이는 《삼국지》 권45 등장종양전에 수록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 진수 자신이 단 주석 "공록은 건흥(建興) 3년(225)에 월수태수(越嶲太守)로 임명되었고, 승상 제갈량을 수행하여 남쪽으로 정벌하러 갔다가 만족(蠻夷)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당시 31세였다."라는 기록과 배치되고[3] 초황이 고정의 반란 당시 살해당했다는 화양국지의 기록과도 대치된다. 즉, 장억전의 기록은 틀렸고 제갈량의 남중정벌 당시 평정된 월수군에 언제 재반란이 일어나서 어떤 태수가 살해되었는지는 확정이 불가능하다. 이는 진수조차도 남쪽 얘기를 쓰면서 헷갈려서 제대로 쓰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자치통감에선 그냥 해당 기록에 240년, 월수군의 만이들이 수차례 한에 반란해 태수를 살해하자 태수가 이후 군(치소)에 가지 못하고 팔백여리 떨어진 안정현에서 기거하며 통치했다. ((庚申,公元二四零年)越巂蠻夷數叛漢,殺太守,是後太守不敢之郡,寄治安定縣,去郡八縣餘里)라고 적었다.[4]
장억이 월수 태수로 언제 부임했는가, 장억이 성도로 돌아가 탕구장군에 임명되었다는게 연희 17년(254년)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장억이 임명된 해는 239년, 연희 2년이다. 그렇다면 자치통감의 240년 배정은 무엇이냐? '월수군의 만이들이 수차례 한에 반란해 태수를 살해하자 태수가 이후 군(치소)에 가지 못하고 팔백여리 떨어진 안정현에서 기거하며 통치했다. 한나라 군주는 파서의 장억을 월수태수로 하였는데, 장억은 불러서 위로하여 귀순시키켜 새롭게 복종하게 하고, 강하고 교활한 만이를 주벌하고 두렵게 해 복종시켰으며, 군의 경계는 모두 평정을 이루며, 옛 통치를 회복하였다'라는 라는 기술을 보면 장억이 부임하고 옛 통치를 회복할(復還舊治, 다시 옛날의 치소로 돌아갔다) 때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
일단 제갈량이 남중 4군을 평정했다는 사실은 정사 삼국지나 화양국지에나 나오니 월수군이 평정된것은 틀림없다. 한마디로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평정된 월수군을 다시 잃고 실제로 언제 어떤 월수태수가 살해되어 안상현에 언제부터 월수태수가 근무했는지 실제론 알 수 없으니 제갈량의 월수군 토벌 이후 월수군 수차례 재반란의 시점을 특정하지 않으면서, 고정 토벌 이후 239년 이전 어느 시점에 월수군에 수차례 반란이 일어나 토지를 잃었고 사건이 정리되고 월수군을 회복해 안정된 것이 240년이었던 것으로 본 것이다.
어쨌거나 그때 여론은 옛 군을 되찾기를 바랐으므로 장억을 월수 태수로 제수하였다. 장억은 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 군으로 가서 은혜와 신의로써 이끌므로 만이(蠻夷)들은 모두 복종하여 매우 많은 사람이 와서 항복하고 귀순했다.
북쪽 국경의 촉마(捉馬)족은 가장 용맹하여 촉나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었다. 장억은 곧 가서 토벌하고 그 우두머리 '위랑(魏狼)'을 사로잡았다가 또 풀어 주며 깨우쳐 주고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도록 했다. 장억은 표를 올려 위랑을 읍후(邑侯)로 임명하고 부족 3000여 호는 모두 토지를 안정시켜 자기 직책을 지키도록 했다. 각 부족들이 이 소문을 듣고 대부분 항복했다. 장억은 이 공로로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소기(蘇祁)의 읍군(고을의 수령)'동봉(冬逢)'과 동봉의 동생 '외거(隗渠)'등이 항복했다가 다시 모반했다. 장억은 동봉을 죽이고 동봉의 아내는 모우왕(旄牛王)의 딸이므로 계략상 그녀를 사면시켰다. 그리고 외거는 서쪽 경계로 달아났다. 외거는 강인하고 용맹하여 날래므로 많은 부족 사람이 그를 매우 두려워하며 꺼렸다. 외거는 측근 두 명을 보내 거짓으로 장억에게 항복시키고 실제로는 소식을 얻으려 했다. 장억은 이 사실을 알아내어 그들에게 후한 상을 약속하고 반대로 계획을 실행하도록 했다. 이 두 명은 함께 모의하여 외거를 죽였다. 외거가 죽자 각 부족은 모두 안정되었다. 또 사도(斯都)의 우두머리 이구승(李求承)은 예전에 공록을 직접 죽인 자인데 장억은 현상금을 걸어 잡아들여서 그의 지난 악행을 일일이 열거한 뒤에 죽여 버렸다.
처음 군의 성곽이 무너져 버리자 장억은 다시 작은 성벽을 쌓았다. 재임한 지 3년이 지난 뒤에 원래 군으로 돌아와 성곽을 보수할 때 이민족(夷種)의 남녀가 모두 노동력을 제공했다.
정작(定莋), 대등(臺登), 비수(卑水) 세 현은 군으로부터 300여 리(120km)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소금과 철과 옻을 산출했지만 만족이 살고 있는 국경 지대에서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독점하여 썼다. 장억은 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빼앗아 군의 고관에게 관리를 맡기려고 했다. 장억이 정작(定莋)에 이르렀다.
정작(定莋)의 두목 '낭잠(狼岑)'은 반목왕(槃木王)의 외숙으로서 만이(蠻夷)들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장억이 자신들의 산업을 빼앗으려는데 화가 나 직접 와서 만나지 않았다. 장억은 장사 수십 명을 시켜 곧장 가서 잡아 오게 해 때려죽여 시체를 그 마을로 돌려보내고 상을 후하게 주어 낭잠의 악행을 알리고 아울러 말했다.
경거망동 하지 마시오. 움직이면 곧바로 죽게 될 것이오.
부족들은 모두 면전에서 결박하고 사죄했다. 장억은 소를 잡아 잔치를 열고 두터운 은덕과 신의를 보였다. 그래서 소금과 철을 얻게 되고 필요한 도구가 풍부해졌다.
한가군(漢嘉郡)의 경계에는 모우이(旄牛夷) 부족 4000여 집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낭로(狼路)'는 고모부 동봉(冬逢)의 원수를 값기 위해 작은아버지 '낭리(狼離)'에게 동봉의 부하들을 이끌고서 형세를 살펴보도록 했다.
장억은 일이 있기 전에 측근에게 고기와 술을 갖고 그곳으로 가 위로하게 하고 낭리는 상을 받고 아울러 그 누이를 만났으며 누이와 동생은 즐거워 수하의 부족민들을 이끌고 장억을 만났다. 장억은 그들에게 두터운 상을 주고 잘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모우이 부락은 이 뒤로 줄곧 반란이 없었다.
군에는 모우이 마을을 지나 성도에 이르는 옛날 길이 있었는데 평탄하기도 하고 가까웠다. 모우이에서 길을 끊은 뒤부터 백여 년이 되었고 대신 안상을 지나게 되었는데 험하고 멀었다.
장억은 측근들을 보내 낭로에게 재물과 비단을 주고 다시 낭로의 고모에게 그의 뜻을 설명하도록 했다. 낭로는 곧 형제와 처자식을 데리고 모두 장억을 배알했다. 장억은 그와 맹세하고 옛길을 개통했으며 천 리 길을 조용하고 깨끗하게 하여 옛날의 역참을 회복시켰다. 상주하여 낭로를 모우구비왕(旄牛㽛毗王)으로 임명하고 사자를 보내 낭로를 유선에게 인사시키고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그래서 유선은 장억에게 무융장군(憮戎將軍)을 더하고 전처럼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이렇게 장억은 연희 3년(240년) 봄, 월수군을 평정했다. 자치통감에는 '한나라 군주는 파서의 장억을 월수태수로 하였는데, 장억은 불러서 위로하여 귀순시키켜 새롭게 복종하게 하고, 강하고 교활한 만이를 주벌하고 두렵게 해 복종시켰으며, 군의 경계는 모두 평정을 이루며, 옛 통치를 회복하였다.'(漢主以巴西張嶷為越巂太守,嶷招慰新附,誅討強猾,蠻夷畏服,郡界悉平,復還舊治。)라고 적고 있다.
장억이 부임한지 15년이 되어 그 지역이 안정되고 평화로웠는데 장억이 성도로 돌아가자 많은 만족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억의 수레를 붙잡고 촉군 경계까지 배웅했다고 한다. 모우이 마을을 지날 때 군장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나와 장억을 맞이했으며 촉군 경계에 이를 때까지 뒤를 따랐다. 연이어 서서 장억을 수행하여 조공한 두목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는 훌륭한 장수임과 동시에 뛰어난 목민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장억은 이르러 탕구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강개하고 장렬하므로 사대부가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하후패가 촉한으로 귀순한 후 장억에게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마음을 의탁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장억이 답하길 '우리는 아직 서로를 모르는데 마음에 의탁한다고 하십니까? 원컨대 3년후에 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라고 답했고 식견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후 비의가 성격이 호방하여 투항하는 자들을 쾌히 받아들이고 친하게 지내자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 바 있는데, 과연 비의는 투항장수였던 곽순에게 살해당했다.
252년 제갈각이 동흥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바로 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강유에게도 오와 촉이 동시에 북벌하자고 통보했다. 장억은 제갈각의 사촌 동생인 제갈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촉과 오의 제갈씨 집안은 서로 교통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제갈첨에게 제갈각에 대한 경고를 대신 부탁한 것일 듯 하다. 내용을 보면 제갈첨에게 오의 불안정한 상황상 제갈각의 북벌을 말려야한다고 역설하는게 확연하다. 하지만 제갈첨이 이 편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제갈첨이 제갈각에서 연락을 하긴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그리고 제갈각은 합비신성에서 대패했고 제갈각의 지나친 권세를 경계한 손량과 손준에 의해 멸족당했다.
254년에 강유가 적도로 출병했을 때 노구를 이끌고 강유를 따라 선봉에 서서 북상하였다. 이때 위나라 적도현의 장 이간이 항복을 요청하자 다른 이들은 의심했지만 장억만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장억의 말 대로 촉군이 적도에 이르자 이간이 백성들을 이끌고 촉군을 맞이 하였으니 장억의 식견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이때 장억은 병세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할 정도였는데 장억의 몸이 불편하여 행군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여론까지 있었으나 장억은 중원에 마음을 두고 일신을 적지에 두길 원했다고 한다, 이후 출발하기에 앞서 유선에게 고하길
라고 말했고 이 말에 유선도 그 마음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신은 폐하께 과분한 은총을 받았으며 하늘의 은총을 받아 이렇게 군사에 참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양주를 평정한다면 국경 밖에서 지키는 일을 할 것이고 이기지 못 하면 이 몸을 죽여서라도 은혜에 보답할 것 입니다.
서질이 지휘하는 정촉호군과 필사적인 교전을 벌여 패하고 순사하나, 위군에 입힌 피해가 촉군이 입은 피해의 배가 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의 피해를 입혔고, 그 결과 강유군 본대와의 교전에서 결국 정촉호군은 전멸당하고 서질도 전사한다.
장억이 다스리던 지역에는 장억에 관련된 전설도 남아있으며, 장억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장억전에는 그가 다스리던 월수군 백성들이 장억의 전사 소식을 들고 슬퍼하며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하며 묘당을 세워 수재와 한재가 있었을 시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장억이 전사하자 촉한 조정은 그의 맏아들 장영을 서향후에 봉하고 작은 아들 장호웅에게 그의 작위를 잇게 했다.
삼국지 촉서에 그의 열전은 황이여마왕장전에 속하는데 각각 황권, 이회, 여개, 마충, 왕평, 장억을 뜻한다. 이들은 모두 익주출신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요직에 오른 인사들인데 장억과 같은 열전에 속한 이들의 능력을 생각했을때 장억 역시 촉한 후기 장수들 가운데 높은 평가를 받은 장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열전에 기록도 많은 편이다. 진수는 위에서 언급된 장수들과 함께 장억을 평하면서 장억은 식견이 뛰어나고 과단성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4. 연의
삼국지에서 후반부가 비중이 없기도 하고, 축융부인이 던진 단도를 팔에 맞아 사로잡히고, 왕쌍이 던진 유성추를 등에 맞아 부상을 입는[6] 등 여러 이미지상 B급 장수의 이미지가 많다.
그래도 삼국지연의에서의 죽음 묘사도 정사처럼 비장감 넘치기는 마찬가지. 강유를 따라 북벌하다가 등애, 진태의 함정에 빠져 포위된 강유를 구하기 위해 수하기병들을 이끌고 위군에게 돌격해 강유를 구하고 무쌍을 찍다가 위군이 화살세례를 퍼부어 수하들과 함께 고슴도치 신세가 되어 전사했다. 강유는 장억의 전사에 크게 괴로워하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공명이 가정에서 패한 후 강등을 청한 것처럼 자신의 직책을 낮춘다.
5. 미디어 믹스
5.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image]
'''장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맹획의 처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뛰쳐나가지만 결과는 아시다시피....
5.2.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5까지는 장의로 표기하다가 6부터 제대로 장억이라고 표기한다.
보통 올 70대라는 균형잡힌 능력치로 나온다. 강유, 조운, 이엄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 외의 다른 촉장들과 달리 능력치 총합이 300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장익, 오의, 왕평보다 총합이 높아서 코에이도 장억을 잘 대접하는 듯하다. 삼국지 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3에서는 71/65/36/59 육전:64, 수전:23, 히든 능력치는 야망:6, 운:6, 냉정:6, 용맹: 8[7] 이라는 참 박한 능력치인데가 무력이 71인데, 육전, 수전이 매우 낮아서 장군이 못되고, 정치는 36이라서 상업투자에 못써는 능력치이라서 버림받는다.
삼국지 5에서는 모든 능력치들이 70대 중반으로 상승해서 엄청나게 쓸 만해졌다. 진형은 봉시, 형액, 장사 특수능력은 무쌍, 분기, 화계, 진화, 침착, 내분으로 좀 A급으로 쓸 만하다.
삼국지 9에서는 마충과 같이 병법수가 7이나 된다.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73/지력 75정치력 76으로 능력치 총합은 마충(297)보다 높고 특히 북벌기의 시나리오에서는 매우 쓸 만하고 보병 병법은 분투까지 있고 노병 병법은 연사까지 있다. 나머지 병법은 정란, 조영, 배반등으로 B급 탑클래스이다. 기마, 궁기가 없는게 아쉽다.
삼국지 10에서는 통솔력 80/무력 74/지력 75/정치력 77/매력 75의 능력치. 통솔력이 무려 80이다. 균형 잡힌 능력치라 장수제인 삼국지 10에서는 매우 좋다. 후기장수에 한정짓지 않더라도 능력치 총합 381은 무려 전체 32위이다. 이래도 감이 안온다면 합이 동률인 다른 장수가 가규, 공손찬, 장각이다. 어디에 써도 제 몫을 해 줄 수 있는 장수. 특기는 기술, 치안, 훈련, 화시, 일제, 진정, 은밀, 지리, 기염, 역공. 총 10개다.
삼국지 11에서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74/정치력 77/매력 76으로 삼국지 10에 비해 약간 너프를 먹긴 했지만, 능력치 총합이 378[8] 이고 적성도 기병과 수군 빼고 전부 올A인 만능형 장수이다. 다만 특기가 답파인데, 나쁜 특기는 아니지만 장억 정도 능력치를 가진 장수한테는 아쉬운 감이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75/정치력 77. 전법은 창병견수. 유선 시기에 주로 활약한 장수이기 때문에 촉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재, 거기다 209년에 등장해 254년까지 부자연사 측정으로 생존해있기 때문에 먼치킨으로 성장시킬 여지는 충분하다. 창군견수는 범위 내 아군 창병의 방어력, 무력, 지력이 상승 되는 전법이다. 특히 장비에게는 만인적의 지속시간을 늘려주고 유비의 의용병의 활용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유비군에게 매우 유용하다.
일러스트는 11까지는 투구를 썼지만 12에서는 벗었다. 자세히 보면 검을 든 채 죽기 직전 최후의 분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13에선 전작과 능력치가 완전히 동일하다. 특기는 훈련 2, 순찰 4, 신속 3. 전수특기는 순찰이며[9] 전법은 전법 포인트 3을 사용하는 궁병공격진으로 범위 내 궁병에게 공격 2단계(아군전체 공격력 40) 사거리 2단계를 부여한다. 자부대 버프뿐인 강궁보다 공격력이 앞서며 사거리는 강궁이 조금 더 길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충분히 길며 전법 지속시간도 긴 편이다. 전법 포인트 3을 사용하는 전법치곤 꽤나 쓸만한 전법인 셈.
삼국지 14에서 일러스트는 전작 삼국지 13을 그대로 쓴다. 능력치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75/정치력 77/매력 75. 개성은 숲전, 후위, 모집, 개수, 운반이 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공법개혁 Lv 3, 진형은 장사, 학익, 투석이 있고, 전법은 분전, 화시, 진정, 투석을 가지고 있다. 친애무장은 강유, 마충, 요주, 혐오무장은 없다.
5.3. 영걸전 시리즈
5.3.1. 삼국지 공명전
남만정벌 오계봉전투에서 유선이 원군으로 보냈다며 마충과 함께 합류한다. 아군의 유일한 무도가로 등장. 그리고 '''사기 캐릭터'''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평범하지만 충성스러운 촉장1 정도로만 묘사되는 장억이 창작물 속에서 무지막지하게 띄워진 거의 드문 케이스. 아이러니한 것은 장억이 정사에서 훌륭한 장수였음이 알려진 뒤로는 시대를 앞서간 재평가 소리도 나오는 편.
대무도가로 전직한 뒤 뻑뻑하는 소리가 들리면[10] 적 하나를 죽이는 수준의 말도 안되는 강함을 자랑한다.
스토리 비중은 공기에 가까워 일기토라곤 모든 전투를 통틀어서 단 두 번, 축융, 왕쌍과의 일기토뿐인데, 둘 다 지는 일기토이다.[11]
콘솔판에서는 무도가 병과 자체가 너프를 먹었지만, 그래봐야 개사기가 사기로 너프먹은 정도일 뿐이다.
5.3.2. 삼국지 조조전
장익과 친밀한 사이로 나온다. 가상모드 백제성 전투에서는 송사리 취급당하며 조조에게 일기토로 단칼에 썰리는[12] 장익의 복수를 위해 멋대로 백제성 내문을 열고 나가지만, 장익에게 복수를 못하고 죽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무도가 장수 6명 중 유일하게 민첩 특화가 없는 최약체이다.
5.3.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역시 무인계로 등장. 하지만 전화위복 말고는 그리 성능이 좋지 못하다. 오히려 전화위복+재반격의 연계가 되는 위연에 밀려서 섬멸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편. 오죽하면 관련 덧글에는 '공명전 생각하고 키우면 후회한다'가 있다.
5.4. 삼국전투기
촉의 명장 중 한명이지만, 변방에서 주로 근무했기 때문인지 챕터 60 적도 전투(2)에서야 처음으로 출연했다.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대사를 내뱉는다.
캐릭터는 이노우에 산타 원작의 만화 도쿄 트라이브의 주인공 데구치 카이. 서질은 카이의 친구이자 라이벌 메라로 나왔다.
위의 정사에 가깝게 서술되어 서질과의 전투신 끝에 적도 전투(3)에서 단 2화만에 전사한다. 그래도 친구 마충#s-1이 짤린 거에 비하면 일단 등장은 했고, 평가도 나름대로 괜찮게 했다. 피날레도 간지나는 편.
[1] 이름과 자는 『시경』 「대아편」의 '극기극억(克岐克嶷)'에서 유래한 듯하다.[2] 여러 매체에서 한 인물에게 장의 혹은 장억으로 이름을 혼용하는 바람에 삼국지를 자세히 보지 않는 독자들은 이 둘을 서로 다른 인물로 인식하여 촉나라에 장익, 장의, 장억 세 사람이 존재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꽤 있다.#[3] 화양국지에는 아예 초황이 죽은 후 223년 공록을 일단 월수태수로서 안상현에 머물게 해서 멀리서 원격 통치했다고 나온다.[4] 촉서 마충전에는 233년 내항도독이 된 마충이 장억과 함께 오랜기간 토지를 잃은 월수군을 회복했다고 되어 있다.[5] 곽거병의 이복 아우로 한무제 사후 한소제를 보필, 정사를 집행했다. 소제의 형인 연왕 단의 반란을 진압했다.[6] 정작 손례를 털어갈 때는 부상이 나았는지 돌아다닌다.[7] 참고로 용맹 8을 가지고있는 무장은 연의에서 장억에게 유성추를 던진 왕쌍이다.[8] 고대무장과 수호지 무장을 제외하면 능력치 총합이 공동 40위다.[9] 장억이 온전치 않은 몸상태로 최후의 싸움을 분전했으니 말 그대로 분전 특기를 줄 만도 한데 없다.[10] 대무도가는 거의 연속 공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연속 공격이 잘 터진다. 그래서 장억의 실질적인 공격력은 공격력의 거의 2배다.[11] 스토리 진행상 같이 들어오는 마충#s-1은 반대로 구데기 취급받는 병과인 궁병이지만, 막상 일기토는 장억과 똑같이 2개다. 축융한테는 지고 대릉에게는 이긴다.[12] 유저의 선택지에 따라 일어나는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