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황

 




'''오자양장'''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오자양장(五子良將)
徐晃
서황
'''
'''시호'''
장후(壯侯)
'''작위'''
도정후(都亭侯) → 녹향후(逯鄕侯)
→ 양후(楊侯) → 양평후(陽平侯)
'''최종직위'''
우장군(右將軍)
'''성씨'''
(徐)
''''''
(晃)
''''''
공명(公明)
'''생몰 기간'''
(? ~ 227)
'''고향'''
사례 하동군 양현(楊縣)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서주에서
2.4. 하북 평정
2.5. 형주 정벌
2.6. 남군 공방전
2.7. 상요 토벌
2.8. 관중 평정
2.9. 장로 정벌
2.12. 조비 휘하
2.13. 조예 휘하
2.14. 죽음
3. 연의
4. 평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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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공명(公明).[1] 하동군 양현 사람. 위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맹장이며 실제 공적도 남다른 인물이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군리(郡吏)가 되어 거기장군 양봉을 따라 도적을 토벌해 공을 세웠고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이각, 곽사가 장안에서 난을 일으키자 서황은 양봉을 설득해 천자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도록 했는데 양봉이 이 계책을 따랐다. 천자가 황하를 건너 하동군 안읍현에 이르렀고 서황을 도정후에 봉했다.

낙양에 도착하자 한섬, 동승이 날마다 서로 다투어 싸웠다. 서황이 양봉을 설득해 조조에 귀부하라 했는데 양봉이 이를 좇으려 하다 후회했다. 조조가 예주 양국에서 양봉을 토벌하자 서황은 마침내 조조에 귀부했다.

조조가 서황에게 군사를 주어 하남군 권현과 하남군 원무현의 도적을 공격하게 해 서황이 그들을 격파하고 비장군에 임명되었다.

2.2. 서주에서


조조를 수행해 여포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군을 이끌고 여포의 장수 조서, 이추 등을 항복시켰다.

2.3. 관도대전


사환과 함께 하내에서 수고를 참수했고 조조를 수행해 유비를 격파했다.

또한 조조를 수행해 안량을 격파하고 백마를 공략한 후 진격하여 연진에 이르러 문추를 격파했다.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조홍과 함께 예주 여남군 은강현의 도적 축비(祝臂)를 공격해 깨뜨렸다.
순유전에 따르면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를 하게 되었다. 군량이 떨어지자 순유는 조조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원소의 치중대가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것입니다. 적장 한순은 날래기는 하지만 적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때 기습을 한다면 깨뜨릴 수가 있습니다.

조조가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묻자 순유는 서황을 추천했다. 서황은 사환과 함께 원소의 치중대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또한 사환과 함께 하남군 고시현에서 원소의 군량 운반 수레를 공격했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워 도정후에 봉해졌다.

2.4. 하북 평정


조조가 업을 포위한 뒤 기주 조국 한단현을 격파하자 기주 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이 거짓으로 성을 들어 항복했다가 다시 맞서서 지켰다. 조조가 서황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다. 서황이 도착하자 화살을 성 안으로 날려 성공과 실패에 관해 진술했다. 한범이 후회하며 서황에게 곧바로 항복했다. 그 뒤 조조에게 말했다.

역양을 멸한다면 다른 성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니 원컨대 공께서 역양을 멸하지 않고 항복시켜 다른 여러 성들에 보이신다면 모두 공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조조가 이를 옳다고 여겼다.
별도로 모성을 쳤는데, 복병을 두고 엄습하여 3둔을 격파했다. 조조를 수행해 남피의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의 자기 나라를 배반한 역적들을 쳐서 무찔렀다. 조조를 수행해 답돈을 정벌하고 횡야장군에 임명되었다.

2.5. 형주 정벌


조조를 수행해 형주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번성에 주둔하여 형주 남군 중려현, 남군 임저현, 남군 의성현의 도적을 토벌했다.

2.6. 남군 공방전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2.7. 상요 토벌


무제기에 따르면 태원의 상요 등이 병주 태원군 대릉현에서 모반하자 하후연, 서황을 보내 이를 포위해 격파했다.
210년, 태원에서 모반한 자를 쳤다. 병주 태원군 대릉현을 포위해 함락시키고 적의 우두머리 상요를 참수했다.

2.8. 관중 평정


한수, 마초 등이 관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서황을 보내 하동군 분음현에 주둔시켜 하동을 달래었는데, 소와 술을 내려 선조의 묘에 올리도록 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지금 신(臣)에게 정예병을 내려 포판진을 건너게 해 주십시오. 군의 선봉이 되어 그 내부를 끊는다면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옳은 말이라 하고는 서황에게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주어 포판진을 건너게 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 주령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을 건너 하서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적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여 명을 이끌고 서황을 공격했으나 서황이 이를 격퇴했다. 조조군이 강을 건너 마침내 마초 등을 격파했다.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보내 우부풍 유미현, 우부풍 견현의 여러 저족을 평정케 했고, 조조와 안정에서 회합했다.
조조는 업으로 돌아가면서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보내 좌풍익 부현, 좌풍익 하양군의 남은 적들을 평정하게 해, 양흥을 참수하고 3천여 호를 항복시켰다.

2.9. 장로 정벌


조조를 수행해 장로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서황을 보내 독(櫝), 구이(仇夷)의 여러 산의 저족들을 공격케 해 모두 항복시켰다. 평구장군으로 올렸다. 장군 장순(張順)의 포위를 풀어 주었고 도적 진복(陳福) 등의 30여 둔을 들이쳐 모두 깨뜨렸다.
조조가 업으로 돌아올 때 서황을 하후연과 함께 남겨 양평에서 유비를 막도록 했다.

2.10. 한중 공방전


유비진식 등 10여 진영을 보내 마명각도를 끊자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이를 쳐서 깨뜨렸는데, 적은 스스로 산과 계곡에 투신해 죽은 자가 많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서황에게 절을 내렸고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이 잔도는 한중의 험요한 요지요. 이에 유비가 안팎을 단절하여 한중을 취하고자 했으나 장군이 일거에 적의 계책을 꺾어버렸으니 심히 좋은 일이오.

조진전에 따르면 하후연이 양평에서 죽어 조조가 이를 우려했다. 조진은 정촉호군으로 임명되어 서황 등을 지휘해 양평에서 유비의 별장인 고상을 격파했다.
그리고 조조가 친히 양평에 이르렀고 그 뒤 한중의 제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2.11. 번성 공방전


219년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다. 우선 조조는 서황을 보내어 조인을 구원하려 했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이를 즉시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무제기에 서황이 조인을 구원하러 간 것이 8월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 일은 이쯤의 일로 보인다. 서황은 이끌던 병사들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창끝으로 싸워 다투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고 번성과 연락하는 동시에 관우를 견제하며 시간을 끌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음에도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 했다. 조엄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동소전에 따르면 관우가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조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조조가 다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병마가 집결하기를 기다려 함께 전진하라.

적은 언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공격하기 전에 조조가 그 앞뒤로 은서, 주개 등 모두 12진영[2]을 서황에게 보냈다.
관우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관우는 서황과 예전부터 서로 경애했다. 멀찍이서 함께 대화했는데 다만 평소의 일만 말할 뿐 군사(軍事)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서황이 말에서 내리며 영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 오는 자에게는 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그러자 관우가 대경실색하여 서황에게 말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이에 서황이 답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적은 위두에 둔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만총전에 따르면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 만총은 이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다. 조엄전에 따르면 관우는 결국 번성 포위를 풀고 물러나 면수에 주둔하면서 위군의 도하를 막고 양양을 굳게 포위하였다.
조조가 영을 내렸다.

내가 30여 년간 용병해왔고 또 옛적에 용병을 잘하는 자들에 관해 들어보았으나, 멀리 말을 몰아 달려가서 곧바로 적의 포위망에 돌입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장군의 공은 손무사마양저를 뛰어넘는다.


서황은 군을 거두어 개선하며 마피로 돌아왔다. 조조가 7리 밖에서 서황을 맞이해 술을 마련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조조가 술잔을 들어 서황에게 권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번성, 양양을 보전한 것은 모두 장군의 공이오.


이때 제군이 모두 집결하여 조조가 제영(諸營)들을 순시했는데, 사졸들은 모두 군진을 이탈해 조조를 보려 했으나 서황의 군영은 가지런히 정돈하여 장졸들은 진에 머물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가 감탄하며 말했다.

서장군은 가히 주아부의 기풍을 갖추었다 할 만하오.


2.12. 조비 휘하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서황을 우장군으로 임명하고 녹향후로 올려 봉했다. 제위에 오르자 양후로 올려 봉했다.
유봉전에 따르면 조예는 정남장군 하후상, 우장군 서황을 보내 맹달과 함께 유봉을 습격하도록 했다.
하후상과 함께 익주 한중군 상용현에서 유비를 쳐서 격파했다. 양평을 진수하게 하고 양평후로 옮겨 봉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손권이 장수 진소를 보내 양양을 점거하자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토벌케 했다. 조인은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서 장군 고천(高遷) 등을 시켜 한수 남쪽의 부화민(附化民)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2.13. 조예 휘하


조예가 즉위하자 오나라 장수 제갈근과 양양에서 맞섰다. 식읍을 200호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3,100호가 되었다.

2.14. 죽음


서황은 성정이 검약하고 삼가고 신중하여 군을 이끌 때는 늘 멀리까지 정찰했다. 우선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되면 뒤에 싸우고 싸움에 이겨 추격할 때는 이익을 다투어 사졸들은 밥 먹을 틈도 없었다. 서황은 늘 탄식하며 말했다.

옛 사람들은 명군(明君)을 만나지 못한 것을 근심했으나 오늘 나는 다행으로 명군을 만났으니, 늘 공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뿐 어찌 사사로운 명예를 좇겠는가!

끝내 교우를 맺어 붕당을 만들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을 남겨 자신이 죽은 후 평상복으로 염하라 했다.
227년에 죽으니, 시호를 내려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서개(徐蓋)가 후사를 이었다. 서개가 죽자 아들 서패(徐覇)가 후사를 이었다. 조예는 서황의 봉호를 나누어 서황의 아들과 손자 20명을 열후에 봉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대부(大斧)라는 큰 도끼를 전용 무기로 사용한다. 만총과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그의 설득에 넘어가 조조에게 투항하기로 한다. 이때 만총이 서황에게 투항할꺼면 양봉을 죽이자고 하지만 서황은 지금까지 섬겼던 주인을 죽일 수 없다고 거절하여 충의지사라는 이미지를 굳힌다. 오히려 정사에선 서황이 양봉에게 투항을 권했다.
일단은 연의에서도 위나라의 1급 장수이긴 하지만 정사에 비하면 군공이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그저 전투에 참전하면서 이름만 올리는 정도로 위에 언급한 상세한 성과는 나오지 않는다.
연의 기준으로 변변찮은 일기토도 거의 없고 오히려 몇 안 되는 일기토 중 하나는 관우에게 죽은 안량를 띄워주기 위하여 안량에게 도전했다가 20합 만에 패하는 장면이다. 그래도 등장 초기에 허저와 50합을 싸운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무력으로만 따지면 조조군 내에서 몇손가락 안에 들기는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첫 등장 시 곽사군의 장수 최용과 맞붙어 단 한 합에 무찌른 적이 있다.
안량 사후 나온 안량의 복수를 위해 나온 문추와 싸운다. 가정본에서는 문추와 30합을 무승부로 싸우다가 문추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퇴각한 것으로 적었다. 그런데 모종강본에서는 30합과 무승부는 언급하지 않고, 그냥 싸우다가 문추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퇴각한 것으로 변경된다. 아마도 서황이 안량과 싸워서 20합에 졌는데, 그 안량의 복수를 위해 나선 문추이기 때문에 안량보다도 강할 것으로 추정되어 문추와 30합을 대등하게 싸웠다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인 듯하다.
그 이후 하북 정벌에서 소소하게 이기는 일기토가 있긴 한데 그다지 유명한 장수가 없다는 게 함정.
이후 은근히 비슷한 처지인 장합과 세트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는 과정에서 둘이 조운을 막는 장면이 있다.
동관을 지킬 때, 저돌적인 조홍과는 반대로 꽤나 냉철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며, 마초와 싸울 때 별동대를 지휘한 것은 나온다.
하지만 한중 공방전에서는 갑자기 찌질하고 무능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전까지는 양봉을 죽일 수 없다면서 인격자의 모습으로 나오던, 그리고 동관 전투에서도 조홍에게 옳은 간언을 하던 서황이 갑자기 찌질하고 무능해져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한신배수진을 흉내낸답시고 조조가 길잡이로 붙여준 왕평이 옳은 말로 간언하는 것을 공연히 무시했다가[3] 패해놓고 찌질하게 왕평만 갈구고, 빡친 왕평이 강 건너가 촉에 항복해버리는 모습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황은 자신의 허물은 가리고 조조에게 왕평이 배신때리는 바람에 대패했다고 왕평 탓만 해버린다.
번성 공방전에서 서황이 관평을 일기토로 3~4합 만에 패주시키고 관우와 일기토를 하게 된다. 서황은 먼저 관우와 과거의 친분을 언급하면서 비행기를 태워줬지만, 갑자기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니 관우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관우는 일기토로 덤빈다. 서황은 관우와 80합을 겨루다가 관우를 패주시킨다. 그나마 서황과 관우의 일기토 부분은 서황의 입으로 관우가 노쇠하였다고 말했고, 작가도 관우의 한쪽 팔이 독화살 부상 때문에 힘이 빠졌다는 등, 명백한 패널티를 제시하긴 했으므로 개연성은 어느 정도 있다.
정사처럼 서황이 번성에서 관우를 격파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관우도 서황을 띄워줘서 읽는 이 처지에는 한중 공방전에서는 찌질한 놈이던데 왜 이렇게 강해졌는지 어리둥절하게 된다.
연의에서는 에서 로, 또 촉으로 배신한 맹달을 토벌하기 위해 사마의와 동행하지만 맹달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이건 허구에 불과하며 정사에서는 그냥 노환으로 죽었다. 나관중황충, 장료, 태사자도 비슷하게 죽은 걸로 묘사했는데, 아무래도 장군은 전사해야 제맛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다만 대개 전사한 장수들은 좀 멋있게 죽어서 체면이 서는 반면 서황은 그 이름값에 맞지 않게 맹달이 툭 하고 쏜 눈 먼 화살에 죽어서 멋과는 많이 떨어진 채 죽었다. 자연사에서 전사로 바뀐 케이스 중에 서황은 대단히 질이 낮은 편에 속한다.
정확한 사유는 잘 나오지 않지만 이는 역시 관우와 잘못 얽혀서 그런 경우가 크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연의에서 관우를 이기거나 죽이거나 생포한 경우 그 결과가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서황은 심하게 너프되었고, 조인은 매일 깨지기만 하기 일수이며, 여몽은 일곱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죽고, 주연은 수명이 20년이나 앞당겨졌다. 이이, 사정, 반장 등은 말할것도 없다. 물론 이 저주(?)에 벗어난 것도 있지만 후세 사람들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관우를 대적하여 특히 이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셈.

4. 평가


성품이 매우 엄격하여 생활이 검소하고 언행을 삼갔으며 어람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밑의 장수들과 병사들을 쉴 틈도 없이 부려먹어 병사들이 이르길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건, 서황에게 속해서다"라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서황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니들 솥을 부수기라도 했더냐"며 넘어갔다고 한다. 이를 보아 일 중독이거나 허구한 날 이것저것 시켜서 밑의 사람들 피곤하게 만들거나 출세주의자적인 상사였던 것 같다.
조조를 만난 뒤로 충성할 시간도 적다며 교우관계는 넓지 않았다. 하지만 번성 공방전에서 관우와 적으로 만났을 당시 허물없이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다 공사 구분 때문에 갑자기 병사들에게 죽이라 명하자 관우가 무슨 소리냐면서 당황한 걸 볼 때, 관우와는 제법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정사에 나온 여러가지 면모를 보았을 때 성격이 과묵하고 무뚝뚝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장료, 관우와 친했던 건 그런 점에서 일치해서 그런 걸지도.
한 가지 의문점은 여포 수하 시절의 장료처럼 서황도 양봉의 수하로 있을 적의 행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양봉과 함께 천자를 호위하다가 나중에 조조와 대립하지 말라고 간언하는 것 정도뿐이다. 아무래도 정사 삼국지의 특성상 인물의 열전에 본인에게 흑역사가 되는 것이나, 패전기록, 약점이 될 만한 것들 등이 아예 누락되거나 완곡하게 기록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황의 출신지 하동군은 백파적의 주 무대였고, 백파적 출신 양봉의 밑에서 일했다는 것은 아마도 서황도 백파적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실제로 백파적 출신이었다면, 당연히 기록에서 빼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조인, 장료, 우금, 장합, 악진과 더불어 '''조조군의 에이스'''라는 평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서황은 단연 활약이 돋보인다. 용맹하고 과단성 있으며, 과묵한 데다가 지모도 있기에 많은 총애를 받았다. 참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기에 수많은 대전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흔히 용감무식한 장수로 인식받기 쉽지만 실제로는 유독 맹장이 많았던 조조군 사이에서도 장합과 함께 네임드 중에서는 몇 안 되는 지용을 겸비한 장수였다. 양봉에게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진언한 것이나 조조에게 역양 정벌의 중요성을 진언한 부분에서 단지 군사적인 면만이 아닌 상당한 대국적 식견을 겸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황전에 따르면 정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승산이 없는 전투를 함부로 벌이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그의 신중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무패장군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건 창천항로에서 칭한 서황의 별명이고, 실제로도 무패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불리한 기록은 은폐하는 경향이 있는 삼국지의 특징을 감안해도 그렇고 무패라고 단정 짓기엔 기록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스스로 야전사령관으로 이끈 것에 대해서는 ‘혹시 모름’ 정도일지 모르나, 전역 단위로 보면 패배가 분명 있다.
분명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 적벽대전에서는 무제기 말고는 명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기에 어떤 장수가 참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후 조인, 서황 등의 장수에게 형주의 수비를 맡긴 것을 보면 정황상 서황도 적벽의 참패를 조조와 같이 맛봤을 것이고, 남군 공방전 때도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결국 조인이 남군을 포기하고 형북으로 철수했으니 서황도 남군 사수라는 임무에서 실패하고 조인을 따라 물러났다는 의미다.
그리고 조비 시절에 남군으로의 오나라 공격군의 일원으로 조진, 하후상, 장합, 문빙 등과 함께 언급되는데, 서황의 경우 정벌군의 일원으로서만 기록되었을 뿐, 그 기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이 없다. 결국 주연의 분전에 힘입어 위군의 남군 공격은 실패로 끝난다.
초기의 위군 무장들 중에서는 3100호로 장합(4300호)과 대장군인 조인(3500호) 다음으로 많은 식읍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건 워낙 오래 살아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죽었을 당시는 조예 시절이었고 제갈근이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진군했을 당시에도 백전노장으로서 일선에 나서서 싸웠다.

5. 미디어 믹스



[1] 관로의 자와 한자까지 같다. 참고로 제갈량의 자인 공명과는 한자가 다르다(孔明).[2] 1영은 2천명이며 12영은 총 24000명이다.[3] 이때 서황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면 결사적으로 싸워서 이기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훗날 왕평의 다른 상관인 마속 역시 가정에서 똑같은 드립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