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

 


아람어
사각 문자
יוחנן שליחא
시리아 문자
ܝܘܚܢܢ ܫܠܝܚܐ
히브리어
יוחנן בן זבדי
그리스어
Ἰωάννης
라틴어
Ioa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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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나 요한 묵시록을 집필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묘사이다. 원래 집필 당시 나이는 노인이었으나 화가들은 젊은 요한이 집필하는 것으로 주제를 삼아 그린다.

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1:1~2 (공동번역)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예수가 뽑은 '''12사도 중 한 사람이자 복음사가인 기독교성인'''으로서 축일은 12월 27일. '''세례자 요한과는 다른 사람'''이며, 요한 복음서, 요한의 세 편지,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역시 12사도 중 하나이자 최초로 순교한 12사도인 대 야고보의 동생이기도 하다. 교회 전승에서는 12사도 중에서 베드로만큼 총애받는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변모 사건에도 베드로, 대 야고보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예수 또한 그를 아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가장 어린 나이였기에 보통 예수가 준비하거나 시킬 일들을 가장 많이 담당했었다.
조선 천주교에서는 한문으로 '''약망(若望)'''이라고 표기하여 '''약한(若翰)'''이라고 적는 세례자 요한과 구분하였고, 개신교에서는 '''약한(約翰)'''이라고 적었다.[1]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사사성경이 간행된 이후에는 사도 요한은 한글로 '''요왕''', 세례자 요한은 '''요안'''으로 적어 구분하다가 1960년대부터 점차 둘 다 '''요안'''으로 통일하기 시작하였으며, 공동번역성서 발간 이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양측에서 모두 '''요한'''이라는 표기가 정착하였다.
현대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예수의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요한 복음서의 저자 복음사가 요한(John the Evangelist), 그리고 요한묵시록의 저자 파트모스의 요한(John of Patmos) 3명을 각각 다른 인물로 보기도 하는데, 그래야 나이 의혹과 여러가지 모순이 해결되기 때문이다.[2] 가톨릭에서도 그렇게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사도 요한은 기원후 5년~15년 정도에 태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요한 복음서는 기원후 90~95년경, 요한묵시록은 늦어도 기원후 96년까지는 기록하였고[3][4], 마지막으로 요한의 서신이라 불리는 '요한 1서~3서'를 기록하였다. 물론 예수의 승천 당시 10대 후반이라고 가정하면 트라야누스가 즉위했을 땐 80대 노인인 것을 감안하면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긴 하다. 80대에도 집필을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2. 생애


12사도 중에서 가장 어렸다고 하며, 그 때문에 젊은 시절의 그를 그린 성화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수염이 없는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다만 요한묵시록을 집필하는 모습의 성화는 당시 사도들이 전부 순교로 세상을 떠나고 교회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인의 모습으로 그린다. 상징물은 이 든 잔과 복음서의 저자임을 나타내는 성경이다. 파트모스 섬 유배 당시 로마 제국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요한을 죽이려고 독이 든 잔을 몰래 주었는데, 요한이 그 잔을 축복하자 이 되어 기어나갔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로서의 상징은 독수리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의 예수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요한 복음서는 전기 형식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가 전한 궁극의 계명인 '사랑' 을 가장 심도있게 집필한 복음이기에, 가장 높이 나는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미술에서의 조형적 특징으로 위에 언급된 미소년 외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편히 잠드는' 모습을 형상하기 위해 잠들어 있거나 눈을 감은 모습으로도 많이 그려지며, 붉은 옷을 입고 있을 때가 많다.
일설에는 예수가 가장 총애한 제자라고 하며, 실제로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등 복음서의 많은 부분에서 요한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항목을 참고.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만나기 전에 독신이었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 어부 출신'''이고 제베대오(Zebedaios)의 아들이며, 사도 중 大 야고보(7월 25일)와 형제지간. 둘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긴 사도들이었지만, 초반에는 출세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며 대놓고 높은 관직을 요구하는 발언을 해 사도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5] 예수는 그들의 과격한 성격을 천둥에 빗대어 '''보아네르게스(Boanerges)'''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어느 마을이 예수를 푸대접하자 분격해서 "주님, 우리가 하늘에서 을 내려서 저들을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했다가 예수에게 혼나기도 했다. 아마 이건 이전에 야훼가 유황불을 쏟아부어 한 도시를 그야말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킨 과거 사례를 알고서 예수에게 부탁한 일화일 확률이 높다. 당연히 심판이 아닌 구원을 목적으로 온 예수에게 호되게 질책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랑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사랑을 많이 강조한 사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최후의 사도인 요한에게 이야기를 듣고자 온 사람들이 하도 사랑만 이야기하자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한은 '''"애덕만 제대로 실천한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전승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했다고 보는 요한 복음서 등도 사랑을 강조한 내용이 꽤 많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모조리 튄 다른 사도들과 달리, 유일하게 예수십자가 형장까지 따른 사도이다.[6]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었기에[7] 예수가 끌려갔을 때 베드로와 달리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아마 이 때문에 형장까지도 갈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발치에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었으며, 예수성모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한 뒤 요한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하고 말하며 성모 마리아를 부탁한다. 그 뒤로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승천 때까지 모셨다고 하며, 가톨릭에서는 이가 성모 마리아가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가르침의 근거가 되었다. 또한 예수부활할 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소식을 듣고 베드로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다.
12사도 중 드물게 사도행전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거의 전부가 베드로의 파트너로 나올 뿐 요한이 독립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은 없다. 베드로가 체포되어 대사제에게 불려갔을 때와 사마리아 전도에서 베드로와 함께했다.
사도 요한의 형인 큰 야고보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제일 먼저 죽었고[8], 베드로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안드레아는 X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외에 '의심의 사도' 토마스인도에서 창을 맞고 순교했고, 바르톨로메오는 살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으며, 그 밖의 사도들도 모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것에 비하면, 사도 요한은 12사도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한 사도라고 알려졌다. 기록상으로는 그 최후가 불분명하며, 그리스도교 전승에는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으나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놀란 박해자들이 요한을 처형하는 대신에 파트모스(밧모) 섬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그곳에서 요한묵시록을 집필하는 등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고 한다. 전승을 그대로 믿는다면 사망 당시 최소 90에서 100세 전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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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터키에 있는 에페소를 가려면 거쳐야 하는 셀축이라는 도시에 옛 성당의 페허가 있는데, 이 성당 자리에 "성 요한의 무덤"이라고 쓰여있는 비석이 있어서 에페소를 들리는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셀축은 과거에는 아야술룩(Ayasuluk)이라 불리던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더 이전에는 에페소스의 근교로 여겨져왔는데, 동로마 제국 시기 들어 사도 요한의 기념성당을 조성해 상당한 규모의 성당이 들어섰고, 사도 요한의 무덤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본당 우측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성당은 14세기 초기에 지진으로 회생불능의 손실을 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투르크군이 이곳을 점거함으로써 재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전승이 전해졌고, 무슬림들도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 위치 자체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현재 볼 수 있는 비석은 1950년대에 새로 놓인 것이다.

3. 기타


예수를 직접 따른 12사도 가운데 최연소이자 가장 오랫동안 산 인물이었던 그를 마지막으로 초대(고대) 교회 1세대가 끝났고,[9] 성경의 맨 마지막의 저자인 점 등 사실상 초대 그리스도교의 마지막, 예수의 공생애부터 초대 교회의 발전, 박해,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 장식 등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또한 성경과 초대 교회의 끝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예수 세대의 고별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10]
근대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성 요한과 그의 형 사도 성 야고보는 사제 가문이고, 아버지 제배대오는 유대교 사제이며, 요한과 야고보는 사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결과가 있다. 당대의 유대교 사제들은 성전에서 봉직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따로 갖고 있던 직업이 있었고 그것으로 먹고 살았는데[11]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 제배대오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부였던 것. 게다가 이들은 꽤나 부유한지 복음서들, 특히 마태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만 버려두고 따랐다고 나오는데 반해 이 둘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따라간다. 즉, 베드로 형제의 경우에는 자기 소유의 배가 없었던 반면에 요한 형제는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던 것.
또한 이들은 예루살렘에 자신 가문에 속한 별장이 있었는데, 이 별장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곳, 다시 말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곳이다[12]. 또한 이들은 대사제의 친척이었고, 그렇기에 대사제와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시고 붙잡혀 가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따라가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요한을 두고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18:15)고 명시한다. 이 연구결과들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자신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 인용할 정도로 공신력이 있는 것들이다.
서양권의 이름인 , 요한, 요하네스, 쟝, 이반 등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 다산 정약용한국 천주교의 개조(開祖)인 이벽의 세례명이 모두 요한이었으나 다산은 사도 요한, 이벽은 세례자 요한으로 서로 다른데, 조선 시대나 일제 강점기 초기의 기독교 관련 사료를 조사할 때 이런 미묘하게 다른 한문 표기를 제대로 했는가를 살펴보는 게 위작과 진실한 사료를 구별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2]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후자의 2명은 사도 요한이 세운 교회와 그 전승을 따르는 요한계 공동체에 속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다시 말해 그들의 신학적 사상은 사도 요한 특유의 색채가 입혀진 것이다[3] 전승에 의하면 기독교를 박해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고 네르바가 즉위한 96년에 요한이 유배지였던 파트모스 섬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묵시록이 파트모스 섬에서 쓰여졌으므로 결국 96년 이후일 수는 없다.[4] 이 설정오류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요한복음 마지막 부분인 21장 23,24절에는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공동번역성서)"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즉 사도 요한이 장수를 누려 기원후 90~95년까지 살아있었다는 얘기.[5] 이건 사실 요한이 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그런 것이다.[6] 정확히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언급된다. (요19.26)[7] 정확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라고 표현되는데, 이 '다른 제자'가 요한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요18.15)[8] 사도행전 12장에 칼에 죽었다는 구절이 나온다.[9] 전승에 의하면, 교부 폴리카르포(Πολύκαρπος. 라틴어: Polycarpus, 영어: Polycarp. 개신교에서는 영어식으로 "폴리갑"이라고 부른다)가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고 한다. 사도 요한에 대해 언급하며 요한 복음서를 사실상 정경으로 확립한 리옹의 성 이레네오가 폴리카르포의 제자이다.[10]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 '선 오브 갓'(Son of God)(2014)도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예수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수가 파트모스 섬에 있는 요한을 찾아오는 것으로 끝난다.[11] 이것은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사제들을 따라한 것이다. 사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사제적 백성임을 강조했고 그렇기에 사제들에 대한 율법과 관습을 자신들이 지켰는데, 그 때문[12] 이전까지의 정설은 이 별장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 마르코의 소유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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