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1. 强度
센 정도. 어떠한 특성이 센가에 따라서 세분화되어 인장강도(얼마나 더 길게 잡아늘일 수 있는가?), 압축강도(얼마나 더 세게 누를 수 있는가?) 등이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쉽게 풀이하면 그 재료에 충격을 주어 그 재료가 파괴되기에 까지 따른 변형저항을 이야기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응력 항목 참조.
몬트리올 엑스포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닛폰햄 파이터즈 등에서 뛰었던 한국계 혼혈 야구선수 터멀 슬레지는 (아마도 strength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봤거나 또는 한영사전에서 이 단어를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이 의미로 '강도'라는 한글문신을 어깨에 새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強盜의 의미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참고로 강성과는 다르다. 강성은 영구변형이 되지 않는 범위(탄성한계) 안에서, 힘이 가해졌을 때 얼만큼의 변형(힘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탄성변형)이 일어나는지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동차 기자들과 자칭 자동차 전문가들은 강도라는 단어를 써야할곳에 아무데나 강성이라는 단어를 갖다붙인다. 충돌안전성이나 내구성은 강도와 관계있지 강성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심지어 고장력강판은 강도가 높은 강판이지 강성은 차이가 없는데도, 고장력강판을 많이 써서 차체강성을 향상시켰다는 헛소리를 당당하게 적어놓고는 한다.
관련 문서 : 비강도
2. 强盜
폭행, 협박 등으로 상대방의 물건을 빼앗는 행위. 또는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 자세한 내용은 강도죄 문서 참고.
3. 講道
도를 강론한다는 뜻으로, 원래는 어떤 종교던 상관 없이 자신들의 교리를 설파하는 모든 행위를 지칭했으나 개신교 전래 이후에는 개신교 스타일의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가 대폭 축소되었다. 그나마도 강도죄 쪽과 어감이 겹친다는 문제로 설교 쪽으로 완전히 대체되었고, 21세기 들어서는 강도사라는 직분 명칭으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4. 江都
1232년부터 1270년(고종 19년 ~ 원종 11년)까지 여몽전쟁 중 38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지금의 강화군을 일컫는 말. 별칭으로 강화경(江華京)이 있다. 강화도 천도이후,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에는 황도(皇都)[1] 로 불렸던, 임시수도가 아닌 엄연한 정식 수도였다.
원래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소속인 강화현(江華縣)이었다. 천도 후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승격되었고, 본궐이 세워졌다. 하지만 한반도 본토를 유린하고 강화도 정부에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한 몽골 제국에 굴복해 개경으로의 환도와 더불어 내성과 외성, 궁궐 대부분을 허물면서 양광도 인주 소속으로 들어가 강화현이 되었고 후 강화부가 되었다. 이후 왜구와 병자호란, 병인양요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강화로의 천도는 무신정권기 최우의 독단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되어 궁궐지나 성의 조성없이 이루어져 전국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성과 궁궐을 쌓게 되었는데 불과 2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강도에는 주로 개경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근처의 남경(서울)과 광주(경기도 광주)에서 합입한 백성들이 거주했다. 고려왕릉도 당시 죄다 유골을 여기로 옮겼기도 하며, 고종(고려)의 홍릉 등 일부 왕릉은 아직도 강화도에 남아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전쟁통 혼란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해도 가 보면 굉장히 초라하다. 이 시기 강도에는 각종 제방이 설치되어 대규모로 둔전이 이루어지고 각도의 산물이 모여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대도시였다고 추정된다. 조선 초 한양 인구 20만의 절반이며, 현대의 강화군 인구보다 많다!
강화도가 다른 섬보다 넓은 편임을 감안해도 1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살릴 정도로 생산성이 있지는 않으므로 둔전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간척도 많이 이루어져 이 시기에 여러 지역의 만이 농지로 바뀌었다. 강화도 위성지도를 보면 해안가 지역에서 이 시대 이전에 바다였던 부분을 구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