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왕후
1. 개요
희종의 왕후.
성평왕후의 시호는 희종 성효대왕과 成 자 돌림이다. 근데 희종의 대표시호는 成 자와 誠 자가 같이 적혀 있는데 성평왕후는 전자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2. 가족관계
성평왕후는 고려 왕실의 일원이다. 부계는 현종 원문왕의 후손으로 정간왕계이다. 정간왕의 삼남 왕영 → 왕영의 장남 왕정 → 왕정의 장남 왕성 → 왕성의 차남 왕진 → 성평왕후 순이다.
성평왕후는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모계를 따라 임씨라 했는데, 이는 외증조모 공예태후의 성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성평왕후는 명종 광효왕의 외손녀로, 명종 → 연희궁주 → 성평왕후 순이다.
아들 다섯 명, 딸 다섯 명을 낳았다. 그 중 맏아들 왕지는 태자였고 맏딸은 안혜태후다.
3. 생애
성평왕후와 희종이 언제 결혼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종이 올린 시책문에 따르면 성평왕후는 상황(上皇)의 왕후가 되기 전에 성황(聖皇)이 궁궐에 데리고 왔다 하니, 희종의 태자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종은 태자가 되기 전부터 결혼했던 아내가 있었다. 희종이 태자가 되자 자연히 아내도 태자비가 됐지만,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이 희종의 아내를 내쳤다. 결국 태자비는 폐비됐지만 최충수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진 못했는데, 자세한 건 최충수 문서 참조.
여하튼 공석이 돼 버린 태자비 자리를 신종이 성평왕후를 뽑아 희종에게 중매한 것으로 보인다.[1]
즉 굴러들어온 돌인 성평왕후는 꽤나 위태로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늙은 시아버지 신종이 양위하고 남편 희종이 즉위한 뒤, 원비가 되었지만 궁주호는 7년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2] 그렇게 함평궁주 - 원비[3] 가 되어 공식적인 왕후가 되었다.
허나 남편이 수창궁에서 최충헌을 사살하려 했지만 실패, 역으로 강제 퇴위를 당했다. 현 인천광역시로 남편과 맏아들이 유배되었고, 본인만 본궐에 남게 되었다. 성평왕후는 궁궐에 남겨진 이유는 아마 차기 왕이었던 강종 - 고종 부자의 가까운 친척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후 고려 - 몽골 간 전쟁이 일어나자 조정은 고려궁지로 천도했고, 왕후 역시 따라갔다. 강화경(江華京)을 나가지 못하고 죽었고, 사위 고종이 시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