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수

 

'''崔忠粹''' (1151[1]~1197)
고려무신으로 최충헌의 동생이다. 당대 권력자였던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에게 자신이 키우던 비둘기를 빼앗기자 이지영을 매우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듣고 분노한 이지영이 종을 시켜 최충수를 결박하게 하자 최충수는 '장군이 손수 묶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나를 묶겠는가'라고 말하였고 그 기세를 장하게 여긴 이지영은 최충수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최충수는 형인 최충헌을 꼬드겼고 같이 군사를 일으켜 이의민 일가를 모조리 쓸어버렸다.[2] 이 때 최충수가 이의민에게 직접 칼을 휘둘렀으나 맞지 않자 최충헌이 나서 이의민을 목 베어 죽였다고 전한다.
이후 형과 함께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건의했으나 임금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형에게 그를 폐위시키자고 제안했다. 이 때 최충수는 사공 왕진을 임금 자리에 올리려 했는데[3] 정작 최충헌은 명종의 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여 의견이 갈렸고 결국 박진재의 중재로 왕민을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옹립된 임금이 신종.
이렇게 형과 함께 한 순간에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으나 최충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종을 협박해 태자비를 내쫓아버렸으며 자신의 을 태자비로 만들려고 획책까지 한다. 이에 크게 놀란 최충헌은 최충수와 함께 을 마시며 "자기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다 패망한 이의방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냐?"고 타일렀고 최충수도 천정을 바라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형의 말을 따라 계획을 물렸다.
그러나 최충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음을 돌려 원래대로 자기 계획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장남 충헌에게서 차남 충수가 태자비로 자신의 딸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늙은 모친 역시 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만류하지만 최충수는 전혀 듣지 않았으며 자신을 만류하는 모친 역시 기어이 넘어뜨리는 패륜까지 저지른다. 결국 이 일로 형제 사이가 완전히 갈라졌고 최충헌이 군대를 동원해서 흥국사에 오자 격분한 최충수 역시 사병들을 이끌고 공격하면서 골육상쟁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최충수는 참패하였고 결국 파평군(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의 금강사까지 도주하다가 추격군한테 붙잡혀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최충헌은 이 일에 대해 크게 통곡하며 "사로잡으라고 명령했는데 무엇이 급해 죽여버렸냐?"며 추격군들을 꾸짖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 주었다. 비록 생전에는 완전히 돌아서버린 형제라 해도 차마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라지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는데 아닌 척 를 한 것일 개연성도 다분하다.[4]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신숭겸을 맡았던 배우 김형일이 출연했다. 역사적 행보와 마찬가지로 형보다 과격하고 충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도 실제 역사와 똑같다.
남춘자 작가가 그린 학습만화 '태조왕건과 고려왕조 500년'에서는 최충수가 죽은 뒤 최충헌이 홀로 진수성찬을 우걱우걱 먹으며 '옛날에는 동생이랑 같이 먹었는데...'하며 쓸쓸해하는 모습이 나온다.
박흥용 작가가 그린 학습만화 한국사에서는 이지영에게서 무사히 풀려나고도 최충헌에게 '비둘기를 빼앗기고 며칠 동안 갇혀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이지영의 애기(愛妓) 자운선을 탐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소인배스러운 면을 부각시켰다.

[1] 1149년에 형 최충헌이 태어났으므로 그보다는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2] 비둘기 사건에 대한 해석은 최충헌 문서의 관련 내용을 참조할 것.[3] 왕진의 여종을 총애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4] 조선1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이방번을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이방간 등이 죽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여러 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마찬가지로 최충수 사후 나온 최충헌의 발언 역시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