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덕태후
1. 개요
강종의 2비. 시호는 강종 元효대왕과 元 자 돌림이다. 고종 안효왕의 모후이며 생전 태후로 올려졌다.
2. 가족관계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현종 원문왕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인종 공효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안후 왕성, 어머니는 인종과 공예태후의 셋째 딸 창락궁주다.
부계 족보는 현종 → 정간왕 → 경안공(敬安公) 왕영(王瑛)[1] →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 → 한남백(漢南伯) 왕기(王杞) → 신안후(信安侯) 왕성(王珹) 순이다.
모계 족보는 인종 → 창락궁주(昌樂宮主) 순이다.
이렇듯 강종과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멀어도 모계로는 상당히 가까웠는데 두 사람은 외사촌(강종 입장에서는 고종사촌) 관계이다.
자녀는 고종 하나이다.
3. 생애
강종이 명종의 태자였을 시절, 두번째 태자비(太子妃)로 들어왔다. 강종의 첫 태자비[2] 는 이의방의 딸이었고, 둘 사이에 이미 딸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첫번째 태자비는 1174년 이의방이 실각하자 폐출되었다.
그렇게 1175년 9월, 원덕태후는 새로운 태자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아들인 왕진은 1192년 1월에 태어난다.
1197년,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 의해 북궁에서 폐태자된 남편을 따라 같이 강화도로 떠난다.
1211년 당시 군주 희종 성효대왕이 수창궁에서 최충헌을 죽이려 시도 했다가 실패, 강화도로 내쫓기는 일이 발생한다.
최충헌은 결국 다시 강종을 소환했고, 태자비도 다시 만월대에 복귀한다. 1212년 10월, 태자비는 연덕궁주(延德宮主), 이어 연덕궁주(延德宮主) - 왕비(王妃)에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사평왕후의 딸 수령궁주를 잘 보살핀 듯하다. 수령궁주는 결혼할 때 아버지 강종과 의붓어머니 연덕궁주 - 왕비에게 표문(表文)을 바쳤는데 이 때 왕비에게 자신을 보살펴 주어 감사하다고 하고 있다.
남편 강종은 너무 늙어 1213년에 붕어하니, 연덕궁주 - 왕비는 혼자가 되었다.
남편을 이어 아들 왕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연덕궁주 - 왕비가 언제 태후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15년 9월, 연덕궁주 - 왕비는 아들과 함께 청주동궁(淸州洞宮)으로 거처를 잠시 옮긴다. 이 때부터 왕태후(王太后)란 존호로 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1216년 1월, 자신의 어머니 창락공주가 죽었다. 외손자인 고종은 3일동안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1218년 4월, 며느리 안혜태후가 들어왔다.
1219년 3월, 손자 왕전이 태어났다.
1220년 10월, 오빠인 영인후(寧仁侯) 왕진(王稹)이 죽었다.
1223년 10월, 아들 고종은 황태후를 태황태후로 올렸다. 이 황태후가 누구인지 고려사 고종 세가는 명시해두지 않았다. 하지만 1년 전에 죽은 선정태후이거나 당시 살아있던 원덕태후일 것이다. 만약 원덕태후가 맞다면 그는 고려사 최초로 살아서 태황태후가 된 여인이다.
1332년, 상도(上都)을 떠나 강도(江都)로 천도하였다. 이 혼란스러울 때에 며느리가 죽었다.
1235년 6월, 손자 왕전이 결혼하였다.
1236년 2월, 증손자 왕심이 태어났다.
1239년 5월,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나라가 엉망진창일 때 훙(薨)하였다.
4. 평가
한 때 태자비로서 본궐 내명부의 2인자였으나 폐위되었고, 다시 돌아와 왕후, 이어 태후로서 내명부의 1인자가 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강화도에 숨었고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여러모로 다이나믹한 삶을 산 태후이다.
5. 왕릉
능호는 곤릉(坤陵)이며 현재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있다.
강화도엔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존재하는데 태후의 곤릉, 아들 고종의 홍릉(洪陵), 사촌 희종의 석릉(碩陵), 손자 며느리 순경태후의 가릉(嘉陵)이다.
6. 왕실의 중시조
원덕태후의 아들 고종부터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까지 총 10명의 왕이 원덕태후의 피를 이었다. 충선왕 대부턴 몽고 황실의 피가 섞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