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왕

 



'''개성 왕씨 평양공파 시조
왕기
'''
'''시호'''
'''정간왕(靖簡王)'''
'''작위'''
개성국공(開城國公)[1031년]
평양공(平壤公)
'''본관'''
개성 왕씨 평양공파
'''이름'''
기(基)
'''아들'''
왕진, 왕거, 왕영(王瑛)
''''''
정의왕후
'''부왕'''
현종 원문대왕
'''모후'''
원혜태후(元惠太后)
'''생몰연도'''
1021년 8월 ~ 1069년 11월
1. 소개
2. 역임 관작
3. 생애
4. 후손


1. 소개


고려 왕조 중기의 왕족. 필영대왕[1], 문원대왕, 조선국 양헌왕과 같이 사후 제후왕으로 추증 되었다.
휘는 기(基). 고려사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현종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에 버금가는 명군이었던 문종의 동복 동생이다. 또한 순종의 1비 정의왕후의 아버지.

2. 역임 관작


'''정간왕의 생전 역임 관작'''
'''공신호'''
홍인숭효광덕공신(弘引崇孝光德功臣)[1031년]
'''수직'''
수태위(守太尉)[1031년]
수태보(守太保)
수태사(守太師)[1049년]
'''직위'''
상서령(尙書令)[1031년]
내사령(內史令)[1049년]
중서령(中書令)
'''작위'''
개성국공(開城國公)[1031년]
평양공(平壤公)

3. 생애


현종 때 받은 작위는 개성국공(開城國公). 문종 초에 평양공(平壤公)으로 바뀌었다.
평양공이 사망한지 2년이 지난 1071년, 그를 옹립하려는 모의가 발각되어서 주모자들이 처벌받는 일이 벌어진다.[2]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지 2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들킨 것. 그의 장남 왕진(王璡)이 이 일로 평양공을 대신하여 유배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나름 명망이 있었는지, 사후 정간왕(靖簡王)으로 추봉되었다. 추봉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문종 때 추봉되었다는 설과 순종이 추봉했다는 설이 있다.

4. 후손


그의 후손들은 알게 모르게 사료에 많이 등장하며, 고려사 열전 종실편에서는 다른 항목의 '''거의 20배 분량'''이다. 삼별초에게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왕온은 그의 7대손이며, 고종~원종 때에 등장하는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3]은 승화후의 동생이다.
또한 충선왕에 의해 대리통치를 하게 되는 제안대군#s-2, 희종의 왕비 성평왕후, 강종의 2비 원덕태후, 원종의 2비 경창궁주,[4] 공민왕의 3비 익비(益妃)[5]도 그의 후손이다.
개성 왕씨의 분파 중 하나인 평양공파는 그에게서 파생된 것인데, 사실 그의 세 아들 중 후손을 둔 것은 막내아들 낙랑공 왕영뿐이다. 차남 왕거(王琚)는 요절했다고 한다. 왕영은 문종과 2비 인예태후의 차녀 보령궁주[6]와 혼인해 아들 2명을 뒀다. 위에 언급된 정간왕의 후손들은 모두 왕영의 후손들이며 왕영부터 그의 8세손인 왕숙까지 '''무려 8연속으로''' 국왕의 부마가 되는 영예를 누린다. 보통 왕족의 경우 자신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국왕을 한 사람의 5대손부터는 종친으로 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습망체에 가까운 지위가 아니었을까 추정될 정도.

[1031년] A B C D E 弘引崇孝光德功臣守太尉兼尙書令開城國公[1] 징효대사탑비 기록. 추가로 시호 미상의 추증 대왕이 한명 더 있다.[1049년] A B 守太師兼內史令[2] 만약 실행되었다면 실패한 계유정난이 되었을 것이다.[3] 왕준이 포로로 몽골에 끌려간 이후 왕준의 일가는 13세기 초 홍다구의 일가와 함께 요동을 관할하며 요동의 고려인들을 관리하였고, 홍씨 일가와 함께 요동행성의 고위관직을 맡았다.[4] 세 사람 다 남편과 성씨가 겹치는 걸 피하려고 그랬는지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썼다.[5] 익비는 공민왕과 혼인한 후 한씨 성을 받았다.[6] 순종, 선종, 숙종, 의천의 동복 남매. 생년이 기록에 없어 그녀가 이 4명과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