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고려)

 


'''고려 제22대 대왕
康宗 元孝大王
강종 원효대왕
'''
'''묘호'''
'''강종(康宗)'''
'''시호'''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濬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淸元孝大王)[1]
'''작위'''
한남공(漢南公)
'''절일'''
광천절(光天節)[2]
'''성씨'''
왕(王)
''''''
숙(璹) → 정(貞) → 오(祦)
''''''
대화(大華) / 법주(法柱)
'''왕후'''
사평왕후(思平王后), 정강원덕태후(貞康元德太后)
'''부왕'''
명종 광효대왕
'''모후'''
공평광정태후(恭平光靖太后)
'''능호'''
후릉(厚陵)
'''사망지'''
고려국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
'''생몰연도'''
음력
1152년 4월 5일 ~ 1213년 8월 9일
양력
1152년 5월 10일 ~ 1213년 8월 26일 (61세 3개월 16일 / 22,388일)
'''재위기간'''
음력
1211년 12월 25일 ~ 1213년 8월 9일
양력
1212년 1월 30일 ~ 1213년 8월 26일 (1년 6개월 27일 / 574일)
1. 개요
3. 생애
3.1. 즉위 전
3.2. 짧은 향국(享國)
3.3. 천붕만국(天崩萬國)
4. 평가
5. 가족관계
5.1. 부인
5.2. 자녀
6. 왕릉
7.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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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2대 임금. 묘호는 강종(康宗), 시호는 원효대왕(元孝大王).
휘는 처음 아버지에게 받은 숙, 희종이 한남공으로 봉해주며 고친 정, 이후 국왕이 되어 바꾼 오(祦)이다. 자는 대화(大華) 혹은 법주. 본디 명종의 태자였지만 폐출되어 강화도유배당했다. 후 분봉받은 작위는 공(公) 작위로 봉지는 한남군(漢南郡)이었다.
무신정권 탓에 여러모로 안습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불운한 임금.[3] 그러나 고려 왕실의 본격적인 부자 상속이 시작된 때도 강종 때부터이다.[4]

2. 묘호, 시호, 존호


공식 묘호는 강종(康宗)으로 태자 고종이 올렸다. 강종 시책문[5]에는 백성을 위무해 안정시켰기에(撫民於安) 묘호 강(康)을 올렸다고 기록했다.
대표 시호는 원효대왕(元孝大王)으로 역시 태자 고종이 올렸다. 강종 시책문에는 원은 '모든 선함의 맏이(長於諸善)', 효는 '모든 행위의 근본(本於百行)'이라는 뜻에서 시호 원효(元孝)를 정했다고 한다.
이후 시호가 계속 추가되어 최종 존호는 강종(康宗)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濬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淸元孝大王)이다.[6]
아쉽게도 추가 시호가 언제 올려졌는지, 누가 올렸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시호 명헌(明憲)이 고종 재위 40년에 올려진 걸로 봐서는 이모목청(貽謀穆淸)은 고종 40년 이전, 준철문열단총(濬哲文烈亶聰)은 고종 40년 이후에 올려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생애



3.1. 즉위 전


'''고려의 역대 왕태자'''
효령태자[7]

'''왕오'''

왕탁(왕태제)
고려 명종장남으로 아직 아버지가 익양공으로 있던 시절에 태어났다. 무신정변으로 백부인 의종무신들에게 폐위되고 아버지 명종이 즉위하자 1173년 4월에 21살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강종의 관례식 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려던 이고가 역으로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의방이 권력 실세가 되자 1174년 3월에 이의방의 딸과 정략 혼인을 하게된다.
그러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러 출정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승려 종참에게 암살당하자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태자비는 폐출되고 만다.[9]
1197년 9월, 최충헌이 부왕 명종을 폐위시킬 때 그 역시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당시 강종은 북궁(北宮)에 있었는데 최충헌의 부하들이 윽박지르자 태자비와 함께 궁궐을 나와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강화도로 갔다고 한다.
이후 강화도에서 14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1210년 12월 사촌동생이던 희종이 다시 그를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211년 1월, 희종은 강종을 한남공(漢南公)으로 봉해 공작으로 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같이 받은 직위는 수사공(守司空), 훈위는 상주국(上柱國).[10] 사촌동생 희종이 봉해준 한남(漢南)은 옛 고구려의 매홀군이며 신라의 수성군이었다. 현재는 경기도에 속해있으며 수원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3.2. 짧은 향국(享國)


1211년 12월, 최충헌이 암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뒤 주동자였던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그를 강안전(康安殿)에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0세로 역대 고려 임금 중에서는 최고령 즉위였다. 동시에 유일하게 60대에 즉위한 임금이기도 하다.[11]
재위 원년(1212년) 1월 강종이 임금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아들 왕진[12]을 현 황해도 안악군에서 개경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후 강종은 전례를 따라 조세를 줄이고 사면령을 선포했다. 4월에 절일을 정했고 5월에 자신의 모후 의정왕후(義靜王后)를 광정태후(光靖太后)로 추존하면서 옥책(玉冊)을 올렸다.[13]
7월에 아들 진을 왕태자(王太子)로 봉했고 부(府)를 만들어 관저를 설치해주었다. 8월에 조칙(詔勅)을 내려 태자의 모후이자 자신의 왕후인 유씨(柳氏)연덕궁주 왕비(延德宮主 王妃)로 책봉했다.
사평왕후와 낳은 딸을 수령궁주(壽寧宮主)로 봉했으며 하원백(河源伯) 왕춘(王瑃)[14]에게 시집 보냈다. 동국이상국집에 수령궁주가 강종, 원덕왕후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표문들이 전해지고 있다.[15]
강종은 이때부터 이미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왜나면 사위 하원백 춘이 태자에게 천인(天姻)[16]의 기회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의 전문(箋文)을 올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태자에게 과장되게 올린 표현일 수도 있지만 강종이 워낙 늙었으니 단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3.3. 천붕만국(天崩萬國)


재위 2년(1213년) 4월에 드디어 아버지 명종의 무덤 지릉(智陵)을 참배했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었던 강종은 점차 몸이 악화되었고, 유배 생활로 인한 지병으로 8월 9일에 수창궁 화평전에서 승하한다. 즉위한지 고작 1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의 유조(遺詔)는:

짐은 본디 받을 수 없는데도 대보(大寶)[17]

를 이어 받아 몇년이 지났다.

덕은 박한데 부담은 크니 질병이 심해졌다.

'''천위(天位)[18]

는 고려해보니 잠시라도 비울 수 없다. 태자 진은 덕은 위를 덮고 밝음이 아래를 씌우니 이에 명령을 내려 커다란 어려움[19]을 전한다.'''

너희 모든 관료들은 자신의 일을 하며 사왕(嗣王)을 받들라. 산릉은 검소하게 만들고 상은 역월로 따져 삼일안에 끝내라.

- 고려사 강종 세가 중 발췌.

유조를 남긴 뒤 밤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한다.
사후 아들 고종이 강종을 종묘에 제사지내며 책문을 올렸다.

본래부터 용비(龍飛)의 모습를 가지셨고,

홍학(鴻擧)의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역수(曆數)가 몸에 계셨으니 중명(重明)을 계속 비추셨지만,

국가(國家)가 다난(多難)하니 어쩔 수 없이 숨어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돕고 신이 도우니,

거룩함이 드러났고 모든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황극(皇極)에 오르셨고,

대통(大統)을 이으셨습니다.

이제 신기(神器)를 후동(後侗)에게 넘기시니,

현명한 유풍(遺風)이 선조(先祖)들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동국이상국집 전집 37권엔 고종이 이규보를 시켜 만든 아버지 강종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있는데 어째서 만승지존(萬乘之尊)의 자리를 버리고 가셨냐며 하늘이 만 개의 나라를 무너트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天崩萬國).
고종 재위 2년엔 임금이 된 고종이 강종을 경령전(景靈殿)[20]에 모셨다.
고종은 직접 의봉문[21]까지 나가 강종의 영정을 배웅했는데 주변 신하들은 이를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고려사 고종 세가엔 당시 이를 구경하던 백성들의 반응이 적혀있다.

선왕(先王)[22]

이 원래 태자(太子)였다가 섬으로 번천(播遷)[23]되니 12년을 숨어살았다.

'''그러는 동안 사직신민(社稷臣民)을 다른 자가 가져갔으니 다시 보위(寶位)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향국(享國)[24]

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성사(聖嗣)에게 넘기고 죽은 뒤 사친지전(四親之殿)[25]에 안치되니 참 천명(天命)이로다.

당시 백성들은 강종이 돌아올거란 생각을 전혀 못한 듯 하다. 하긴 의종 이래로 고종 즉위까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한 임금이 없고 죄다 무신에게 간섭 받았으니 폐태자가 어떻게 돌아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4. 평가


사신은 “강종이 임금으로 있으면서 모든 정무는 권신의 견제를 받았고 갑자기 병들어 나라를 다스린 햇수도 짧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며 평을 내릴 정도로 그야말로 임금으로 한 업적이 없었다. 이 점에서는 숙부 신종과도 비슷한 부분.
사실 임금으로 즉위할 때 이미 늙고 병든 상태였고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붕어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그 당시에는 이미 최충헌이 전권을 쥐고 흔들며 국정을 자기 맘대로 농단했던 만큼 '''이미 뭘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지만. 그래도 그의 아들인 고종의 가계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지도 모른다.

5. 가족관계



5.1. 부인


  • 제1비 사평왕후 이씨: 강종이 왕태자 때인 1174년 3월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들였으나, 그 해 12월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암살하면서 태자비가 된지 9개월만에 폐출되었다. 강종이 즉위한 후 사평왕후로 추존되었다. 사평왕후는 전주 이씨로,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한국사에서 유일한 전주 이씨 왕비이다[26]. 딸 1명(수령궁주)을 낳았다. 장인 이의방의 친동생인 이린의 6대손이 바로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이다.
  • 제2비 원덕태후 유씨: 사평왕후 폐출 이듬해인 1175년 9월에 태자비에 봉해졌다. 인종과 공예태후의 셋째 딸인 창락궁주와 종실 신안후 왕성의 딸이며, 유씨 성은 누구의 성씨를 따른 것인지 불분명하다. 강종 즉위 후인 1212년에 연덕궁주에 봉해지고, 아들인 고종이 즉위한 후 태후가 되었다. 1239년에 붕어하여 원덕태후의 시호를 받았다. 능은 곤릉이며, 이 곤릉은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4기 중 1기이다. 강화도에 있다.
  • 기타 첩실들

5.2. 자녀


  • 장녀 수령궁주: 사평왕후 소생으로, 강종 즉위 후에 궁주에 봉해졌다. 사후 경렬(敬烈)의 시호를 받았다.
  • 장남 고종: 태자이자 고려 제23대 국왕.
  • 기타 서자 9명: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 의하면, 강종은 왕태자 시절에 이미 여러 첩실들로부터 9명의 서자를 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소군#s-3(小君)으로써 중이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6. 왕릉


왕릉인 후릉은 강화도에 위치했다고 하나, 확실하게 그 위치가 확인된 전임자의 석릉이나 자기 아들의 홍릉,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능인 곤릉, 손자며느리인 순경태후의 가릉 등과 달리 그 위치가 아직도 불명이며, 현재로서는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7.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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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인이 태자 시절의 아역을 맡고 성장한 이후에는 박병선[27]이 맡았다. 그리고 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 이씨는 박은빈이 맡았다.
젊었던 태자 시절에는 무신들의 전횡으로 엉망이 되어가는 고려 왕조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지녔고 부왕인 명종에게 국정을 돌보라는 간언을 할 만큼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갈등을 빚고, 정중부 사후엔 허승이 명종을 폐위하고 태자를 옹립하려는 야심을 품었던 일 때문에 부왕의 미움을 사지만, 경대승의 (반강제적인) 중재로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경대승 덕에 태자 자리를 지켰으면서, 그의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낙향을 권하거나 박대하는 등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다.[28]
이의민 집권기에는 조용히 있다가 결국 최충헌에 의해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가 말년에서야 비로소 재등장한다. 최충헌의 권력이 막강한 데다, 이미 노쇠하여 몸도 마음도 지쳐 최충헌에 대해서도 조용하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29] 태자 시절의 모습과 비교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
[1] 고려사 강종 총서 기준.[2] 왕태자 시절엔 천희절(天禧節)이었고 왕이 돼서 절일을 광천절로 정함.[3] 생애만 놓고 봐도 정말 파란만장하다. 원래 부왕 명종이 임금이 될 팔자가 아니었지만 무신정변이 터진 후 큰아버지인 의종이 폐위되면 졸지에 그의 아버지가 임금이 되어버렸고 덩달아 그도 태자 신분으로 수직 상승했다. 그 이후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했건만 이의방이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생이별을 해야 했고 이후 최충헌이의민을 암살하고 정권을 차지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그대로 끌려나와 유배를 떠나는 수모를 겪는다. 아이러니하게도 13년 후 최충헌에게 대들었던 조카 희종이 폐위되자 '''또''' 최충헌에 의해 강화도로 옮겨와 임금 자리에 올랐지만 고작 2년 만에 붕어하고 말았다. 권력을 잡고 농단한 무인들 탓에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것.[4] 강종을 시작으로 해서 고려의 왕위는 고종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까지 계속 장자에게 승계된다. 강종 이전의 왕위 부자 승계는 태조혜종, 광종경종, 현종덕종, 문종순종, 선종헌종, 숙종예종인종의종, 신종희종 정도였다(끝은 공민왕우왕창왕 순). 부자 세습이 계속되려나 싶으면 자꾸 끊기는 일이 빈발했다. 목종이 경종의 아들이기는 했으나 중간에 성종을 거쳤다(성종은 경종에게는 사촌동생).[5] 실물은 소실됐으며 내용이 동문선 제28권에 기록되어 있다.[6] 의외로 고려 중~후기를 보낸 임금치고는 시호가 긴 편인데 왕권이 실추되면서 시호가 줄어들었던 의종 이후 임금들과는 달리 강종은 아들인 고종과 손자인 원종이 계속 올려주었다.[7] 의종(고려)의 태자.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태손이 있었다고 한다.[8]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결혼기간은 고작 9개월이다(...) [9] 강제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으나 사이는 좋았는지 짧은 기간 슬하에 수령궁주라는 딸을 1명 두었고[8] 강종 즉위 후 사평왕후로 추봉되어 강종과 재회하게 된다.[10] 수사공은 수직으로 명예직이고 상주국은 훈위라 하여 작위와 같이 주는 명예직이다.[11] 그 다음은 강종의 숙부인 신종으로 그는 54세에 즉위하였다.[12] 훗날의 고종 안효대왕.[13] 옥책에서는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고 어머니를 성모(聖母)라 했고 아버지를 선황(先皇)으로 칭했다.[14] 후에 하원공(河源公)으로 진작.[15] 수령궁주는 계모인 원덕태후와 사이가 좋았던걸로 보이는데 표문엔 "친모를 잃은 자신을 너무 잘 보살펴 줘서 첩이 제명(帝命)을 받들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16] 하늘과 결혼, 즉 왕실과의 결혼을 의미한다.[17] 왕위를 비유한 것이다.[18] 역시 왕위의 비유.[19] 왕위의 비유인데 큰 어려움이라고 표현한걸 보면 뒤를 이을 아들이 걱정된듯하다. 아니면 왕으로서의 부담을 강조한 것이거나.[20] 현종이 지은 신전으로 태조 및 현 국왕의 사대조를 모신다. 경령전은 신위가 아닌 영정을 안치했다.[21]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다음의 문. 가장 화려한 문이었다.[22] 강종. 당시 국왕은 고종이다.[23] 내쫓기다란 뜻.[24] 나라를 다스리다란 뜻.[25] 경령전의 별칭. 태조와 국왕의 사대조를 봉안하니 이런 별명이 있다.[26] 조선왕조 때에는 국성인 전주 이씨는 왕비가 될 수 없었다.[27] 다음 작품인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백사 이항복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 2015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8] 물론 명종이 태자를 용서했다지만 그건 경대승이 강제한 거나 다름없어 속으로는 앙금이 남았기에, 태자가 경대승 편을 들면 이를 명분으로 폐태자할 수도 있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긴 하다.[29] 왕위에 오른 직후 원덕왕후와 나눈 대화를 보면 겉으로는 최충헌에게 순응하면서도 속으로는 난신적자로 생각하며 증오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왕실의 대를 안 끊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평생의 원수와 타협해야 했던 강종의 고뇌가 엿 보이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