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히오 리빙스톤
1. 개요
칠레의 前 축구선수. 별명은 '''두꺼비'''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리빙스톤의 풀네임을 보면 칠레의 공용어인 스페인어권 이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부모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존 리빙스톤은 칠레 축구의 선구자 격인 사람이었고, 리빙스톤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축구에 빠졌다. 리빙스톤은 8살부터 성 이그나티우스 대학 부속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5살에는 우니온 에스파뇰라라는 클럽에서 뛰기도 했지만 이 팀 소속으로는 정식으로 필드를 밟은 적은 없었다,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데 칠레[2] 에서 법학을 공부하느라 잠시 축구를 그만두기도 하였다.
2.2. 선수 생활
하지만, 그는 대학교 축구팀에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았으며, 1938년에는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3] 그리고 1941년 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선방으로 조국 칠레를 3위에 올려놓는 활약을 하면서 MVP에 올랐고[4] 남미 대륙에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각인시켰다.
194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는 잠시 아르헨티나의 라싱 클럽에서 뛰기도 했는데, 라싱 클럽에서는 한낱 대학생이던 그를 28만 페소라는 거액을 주고 데려갔다.[5] 이는 라싱 클럽에서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는 하나의 증거였다. 하지만 라싱 클럽에서 리빙스톤의 폼은 그리 신통치 못했는데 첫 경기 CA 보카 주니어스전에서 4골을 허용하며 2대 4로 패하는 등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폼은 온데간데없었다. 갑자기 폼이 추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향수병이었다. 결국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라싱 클럽에서 나온 리빙스톤은 원래 소속팀인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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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톨리카 대학교에 돌아가 직원으로 일하면서 카톨리카를 위해 뛰었고 1949년에는 새로운 감독 알베르토 부치카르디[7] 와 대형 영입 선수 호세 마누엘 모레노[8] 와 함께 칠레 리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리기도 하였다.
1954년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팀은 침체를 겪으며 강등의 쓴맛을 보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다시 1부 리그에 올라오기도 하였다.
1957년에는 은퇴를 앞두고 잠시 칠레의 다른 클럽인 콜로-콜로에 1년 임대를 갔다왔고, 1959년, 친정팀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2.3. 1950년 월드컵
칠레 소속으로 월드컵에도 출전한 그는 3경기에서 모두 주장으로 활약하였다. 팀은 비록 스페인과 잉글랜드에게 패했지만 최고의 도깨비팀이던 미국을 5대 2로 격파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4. 은퇴 이후
애초에 남미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들어갈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터라 칠레에서 유명한 스포츠 저널리스트와 TVN의 해설가로 활동했는데 92세로 사망할 때까지 50년을 넘게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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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가로 활동하던 리빙스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클라우디오 브라보와 자웅을 겨루는 칠레 역대 최고의 골키퍼.[9] 195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칠레 대표팀 자체가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으므로 전해오는 영상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몇몇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민첩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4. 어록
'''"라싱 클럽과 콜로-콜로에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나의 모든 애정은 카톨리카를 향해있었다."'''
'''"내가 계속 라싱 클럽에서 머문다면 무엇으로 돈을 벌까? 아니면 같은 기회를 계속 받을 수 있을까? 내 행복은 카톨리카에서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1959년 은퇴기념 인터뷰 中
5. 여담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그는 6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34경기에 나왔는데 그의 통산 대표팀 출전 횟수가 52회인걸 감안하면 3분의 2 가량을 코파 아메리카에서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1941년의 대활약 덕분에 한준희 해설위원은 코파 아메리카 역대 최우수 골키퍼로 리빙스톤을 선정하기도 하였다.
6. 수상
6.1. 클럽
- 칠레안 프리메라 디비전 우승 2회: 1949, 1954(이상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 칠레안 세군다 디비전 우승 1회: 1956(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 토르네오 인테르나시오날 데 파스콰 우승 1회: 1950(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6.2. 개인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회: 1941
[1] 일부 자료에서는 181cm로 표기하기도 한다.[2] 칠레 교황청 가톨릭 대학교. 스페인어 표기로는 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 de Chile. 현재 남미 전체에서 10위권 안에 들고 학생 수도 2만2천명에 달하는 규모가 큰 명문대학교이다.[3] 1910년에 처음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팀이 생겼을 때는 말 그대로 대학생들의 팀이었지만 1937년에 본격적으로 프로화되면서 선수들의 기용폭을 넓혔다. 그리고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는 1939년부터 칠레안 프리메라 디비전에 참가하였다.[4] 역대 코파 아메리카에서 골키퍼가 MVP를 차지한 경우는 이 때의 리빙스톤과 1993년의 세르히오 고이코체아, 그리고 1921년의 아메리코 테로리에레의 3번에 불과하다.[5] 미화로는 2만 4천 달러로 당시 이적료 기록인 베르나베 페레이라의 2만 3천 파운드에는 조금 못 미치는 액수였다. 10년 전의 이적료 기록이긴 하지만 골키퍼의 이적료가 공격수에 비하면 상당히 싸게 거래되는 편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이다.[6] 아르헨티나의 잡지인 엘 그라피코에 수록된 그림이다. 리빙스톤의 가장 유명한 그림(혹은 사진) 중 하나.[7]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칠레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8] 라 마키나의 에이스인 그 분 맞다. 이 당시에는 CA 리버 플레이트와의 갈등 때문에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9] 1980년대 후반의 로베르토 로하스도 있지만 그 사람은 브라질과의 1990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자해공갈로 칠레 대표팀 역사의 한켠을 흑역사로 장식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