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병관
[image]
1. 개요
統營 洗兵館. 통영 세병관은 조선시대의 객사 건물로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조선 선조 38년(1605)에 만들어졌다. 여수에 있는 진남관과 더불어 몇 안되게 남해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의 관아 건물이기도 하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였으니만큼 삼도수군통제영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1] 삼도수군통제영이 건설됐던 당시의 건물로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2] 또한 통영 세병관은 현전하는 현대 이전의 한반도 목조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하고[3]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다. 통영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긴하지만 진남관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볼 만 하다.
통영 세병관은 1963년에 세병관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국보 제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 내용
통영 세병관은 앞면(정면) 9칸, 옆면(측면) 5칸으로 된 거대한 목조건물로 단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4] 으로 만들어진 주심포 건물이다.[5][6]
통영 세병관의 건립연대는 1605년으로 이는 조선 선조 38년이다. 이와 같이 세병관의 건축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1963년 10월 24일에 있었던 건물의 해체수리때 세병관중수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을사년(1605년) 1월에 세병관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 14일에 완공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기관 자체가 1605년에 설립된 것은 아니고, 삼도수군통제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에 선조가 전라좌수영 소속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기관도 함께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관이 만들어지면서 새로 건물들을 세웠던 것은 아니고,[7] 기존의 전라좌수사 진영을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영으로 바꿔서 썼다. 따라서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은 기존의 전라좌수사 진영이 있던 한산도에 있었다.[8] 그러다가 2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칠천량 해전때 대패하면서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도 함께 파괴되었고, 3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한 고금도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겼다.[9]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601년 4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시언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잠시 옮겼다가,[10] 선조 36년(1603)에 6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경준이 삼도수군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로 옮겨오게 되면서 몇 년 간 이리저리 떠돌던 삼도수군통제영이 마침내 제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 이 자리에서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약 300여년간 조선의 해군본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11] 그리고 세병관은 160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진 후 여러 본부 건물들을 만들면서 이와 함께 1605년에 세워진 것이다.
통영 세병관의 외형은 관아 건물답게 단정하여, 단청과 같은 통상적인 것 외에는 눈에 띄게 특별나게 꾸며놓은 장식은 없다. 하지만 건물 전면 중앙에 걸린 현판과 건물 그 자체 크기가 대단히 거대하기에 전체적으로 웅장한 멋을 풍긴다. 특이할 만한 점으로는 건물의 앞뒤양옆에 기둥만 일렬로 길게 배열되어 있고 외부와 내부의 벽은 없이 완전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웅장하고 단순하지만 시원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또다른 특이사항으로는 건물 내부의 중앙에 약 45cm 높이의 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객사답게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를 행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으로 여기에는 임금의 궐패(闕牌)[12] 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13]
다만 아쉬운 것은 삼도수군통제영의 건물은 현재 세병관 이외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세병관은 살아남았지만 삼도수군통제영을 이루던 100여채의 다른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헐려버렸고, 1975년 삼도수군통제영 유적의 정비가 있기 전까지 세병관 주위는 현대식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둘러싸고 있고 세병관만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말끔하게 정비한 이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이루던 다른 건물들 여러 채를 복원하여 다시 세워놨다.
통영 세병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이미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으나, 조선의 국방유적지인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적인 건물이었다는 점, 현전하는 목조건축물 중에 가장 거대한 건물 중 하나이며 건립 연도도 명확하다는 점, 건물 그 자체로서도 조선 관아건축의 형태적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점 등의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2002년 10월 14일 국보 제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통영 세병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통영 세병관
-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 세병관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통영 세병관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세병관
- 두산백과 :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4.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1963년 10월 24일 해체수리시 종도리의 홈 속에서 발견된 세병관중수상량문에 을사년(서기 1605년) 1월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14일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앞면 9칸·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웠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武人圖)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크다.
[1] 이 자리는 현재 사적 제402호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지정되어 있다.[2] 세병관 이외의 다른 건물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소실되어 버려서 없다. 삼도수군통제영 자리에 남아있는 다른 건물들은 모두 복원되어 다시 세워진 것이다.[3] 다만 규모가 크다는 묘사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긴 하다. 현전하는 것 중에서 부피가 가장 큰 건물은 경복궁 경회루이며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은 종묘 정전이다. 이 외에 거대한 목조 건축물로는 여수 진남관, 경복궁 근정전 등이 있다.[4] 팔작지붕은 지붕 양식 중 하나로 지붕의 옆면을 보았을 때 삼각형의 박공이 달려있다. 지붕의 양식은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등 여러 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 팔작지붕을 가장 격이 높은 양식으로 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팔작지붕, 두산백과 - 팔작지붕[5] 주심포(柱心包)는 목조건축의 한 가지 방식으로 한반도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다. 참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주심포[6] 다만 세병관에 주심포 방식만 사용된 것은 아니며 익공식 기법과 다포식 기법도 여기저기서 발견되어 다포집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한려수도와 제주도 - 세병관[7] 임란의 난리통으로 인해 새로 관아 건물들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8] 이때와 관련한 유적들은 현재 사적 제113호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9] 이때와 관련한 유적들은 현재 사적 제114호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0] 이 시기 즈음에 건설된 건물이 여수 진남관이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영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라좌수영 건물로서 1599년에 세워진 것이다.[11] 참고로 두룡포는 현재 통영시가 위치한 지역의 옛이름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이 지역에 들어오게 되자 통제영, 통영 등으로 지역을 지칭하다가 지역 이름이 아예 통영으로 바뀌게 되었다.[12] 참조 : 한국고전용어사전 - 궐패[13] 출처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세병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