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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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23호'''
<colbgcolor=#315288> '''경복궁 근정전'''
景福宮 勤政殿 | Geunjeongjeon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궁궐
'''시설'''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395년(창건) / 1867년(중건)
1. 개요
2. 역사
4. 특징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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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정전 정면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소개 영상
景福宮 勤政殿
조선시대법궁인 경복궁의 정전#s-6으로,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경복궁에 입궐했을 때 근정문을 통해 들어가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며, 좌측에는 수정전이 있다.

2. 역사


1395년 경복궁을 지을 때 함께 지어졌으며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로, 대한민국에서 궁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서경》(書經)의 구절을 이용하며 왕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려진다(政)"는 뜻에서 붙여준 이름이다.[1]
1395년(태조 4년) 건설되었는데, 지붕이 용 문양이 새겨진 청자 기와들로 뒤덮여 있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2] 이후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의 아들 광해군이 복원을 시도했었는데, 이때 값비싼 청자 기와로 복원하려 해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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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에는 복원을 포기하고, 남아있는 돌 축대만을 일종의 예식 장소로 사용했음이 영조 때 그려진 의령남씨가전화첩 중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이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으며, 고종이 근정전에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하였다.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볼 수 있는 근정전의 모습은 2000년대 초 대대적인 보수와 수리를 거친 모습이다.

3. 정문




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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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건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조각의 발톱이다. 발톱이 '''7개'''인데 당시 중국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 조룡이 언제 나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경복궁을 처음 만들 때부터 있었다는 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만들었다는 설 정도가 있다. 이 중에서도 좀 더 지지받는 쪽은 후자인 흥선대원군설. 중국 사신이 왕을 알현할 때 기본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기 때문에 천장의 용을 볼 일이 없어서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으리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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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보수하며 근정전에 설치된 집기류들이 여러모로 이상하다. 도자기, 부채 등은 그렇다 쳐도, 이나 향로, 심지어 엄청나게 큰 도끼(!)까지 설치되어 경복궁의 정전이라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

5. 여담


  • 유홍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근정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모습은 근정전 남동쪽 구석의 행각(行閣)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출처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의 북악산의 스카이 라인이 근정전의 지붕 선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경복궁 개방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당이 꽤 넓어서 앉을 자리도 많은데다 날씨 좋은날 풍경, 혹은 야경이 정말로 멋지기 때문. 그덕에 경회루와 함께 경복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 베트남 후에 황궁에도 똑같은 이름의 건물이 존재한다. 다만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과는 달리, 후에 황궁의 근정전은 황제의 집무 공간인 편전이다.
  • 조선왕조 역사 중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은 선조이다.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렸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다음 임금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 1900 파리 엑스포의 한국관 원형이었다.
  • 근정전 처마에는 잡상 7개가 올려져 있다. 허나 경복궁의 옛 사진 자료들을 보기에 따라서는, 정확하진 않지만 1층에는 8개, 2층에는 10개인 것으로 세어지기도 한다. 잡상을 홀수로 놓는 것이 원칙#이라고는 하나, 덕수궁 중화전이 10개#인 등 애초에 우리나라의 잡상 수는 딱히 규칙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내부는 1920년대에 일제에 의해 크게 바뀌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순직 경찰관들의 위령제를 지내는 등 일제의 행사장으로 전락했고, 해방 이후에는 한 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도 했다.

6. 대중매체에서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궁궐이 나오면 근정전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복궁이 왜란 때 불타 버렸기에 흥선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복원되기 전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에선 절대 근정전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못 나오는 경우도 많다..[3] 물론 나오면 그건 고증 오류.(...) 또한 어좌에 앉아있는 왕과 대립하는 신하들의 모습도 자주 등장하는 편. 다만 이런 장면은 대부분 스튜디오 촬영을 하기 때문에 근정전은 그냥 지나가는 배경 처리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심시티 시리즈에서는 숭례문, 63빌딩 등과 함께 한국의 랜드 마크로 꾸준히 등장한다.

[1] 《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기사.[2]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2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중략)...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중략). 즉 사극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된 고종 시기를 제외한 세종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의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은 청기와 건물로 표현해야 옳은 재현이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라 하는 이유는 1443년(세종 15)에 근정전 취두(鷲頭, 치미나 용두와 같은 망새로서 용마루 양쪽 끝에 세워 놓은 대형 장식 기와)가 비로 인해서 무너졌는데, 비싼 청기와와 아련와(牙鍊瓦,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만든 기와)중에 무엇으로 덮을지 고민하면서 청기와를 정밀하고 좋게 구워 만드는 기술을 시험해 보라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유력하다. 기존에 청기와가 덮여 있었을 시 아련와를 고민한다는 것은, 더 값싼 아련와를 정전에 덮는 꼴이 되고, 편전은 이미 청기와가 있으니 격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 사정전은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청기와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어 선조 대의 사정전은 어떠했는지가 애매한 위치에 있다.[3] 특히 숙종 ~ 정조 시기는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라 경복궁이 나오지 않는 조선 사극은 의외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