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쿠리타테
[image]
''Securitatea''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이 설립한 비밀경찰. 정식 명칭은 국가보안부(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였다.
1948년 8월 30일 설립되었으며 NKVD(후의 KGB)의 지도 하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공산주의 정권의 비밀경찰이었다. 국가보안부는 보나렌코(P. Bonarenko), 니콜스키(A. Nikolski) 등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소련인으로 구성되었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친위대로 써먹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차우셰스쿠가 세쿠리타테를 만들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다. 1989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총살된 이후에 해체되었다.
루마니아 국민들은 전부다 싸잡아서 '세쿠리타테'라고 불렀지만, 엄밀하게는 내무부(Ministerul Afacerilor Interne; M.A.I.) 산하의 6개 조직 가운데 '세쿠리타테'가 2개 있다.[1]
'''①보안군'''(Trupe de Securitate), '''②보안국'''(Organe de Securitate), ③소방국(Pompieri), ④국가정보국(Arhivele Statului), ⑤경찰국(Miliția), ⑥국방국(Ministerul Apărării Naționale).
주로 전쟁 고아들을 징집한 루마니아의 보안군은 루마니아 노동당의 당군으로서, 국방국 소속의 군인과는 다른 군복을 착용하는 별도의 조직이었으며, 더 많은 임금을 받았다. 주로 세쿠리타테로 불리는 것은 2번의 보안국으로, 국가에서 각종 특혜를 받았으며, 집과 상점을 특별히 배정받았다. 임금도 6개의 기관 가운데 가장 많이 받았다.
세쿠리타테는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1985년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는 2,200만 명이었으나, 국가보안부 요원의 수는 무려 11,000명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50만의 정보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루마니아 전국에 1100여 개의 도청센터와 320만개 이상의 도청기를 설치하여 인민을 철저하게 감시했다고 전해진다.
1989년 12월 17일, 차우셰스쿠의 실정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루마니아인들이 티미쇼아라 지방을 시작으로 혁명을 일으키자, 세쿠리타테(보안군과 보안국)는 온 나라가 차우셰스쿠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차우셰스쿠에 충성하였다.
루마니아 정규군은 평소 세쿠리타테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보안군만을 편애하는 차우셰스쿠에게 충성도가 낮았다. 그런데, 22일 차우셰스쿠에게 강경 시위 진압을 명령 받은 국방장관 바실레 밀레아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군인과 장교들은 이 사건이 '보안군에 의한 처형'이 아닐까 의심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음 국방장관으로 차우셰스쿠가 임명한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대세를 읽고 비밀리에 차우셰스쿠 정권에 협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눈속임을 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병영 복귀 등을 지시하며 시간을 끌었고, 루마니아 정규군은 차우셰스쿠를 버리고 혁명에 가담하였다.
시위대에 가담한 정규군은 여전히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면서 시민을 공격하는 세쿠리타테(보안군)와 교전을 벌였고,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 역시 정규군과 협력하여 세쿠리타테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인민과 정규군이 하나가 된 압도적인 혁명의 물결 앞에 세쿠리타테도 중과부적으로 밀려났으며, 12월 22일에는 루마니아 구국전선이 방송국과 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쿠리타테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보호하는 것도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잔존 요새에 의존하여 혁명 세력 휘하 정규군과 교전을 벌였다.
12월 23일, 루마니아 구국전선은 모든 루마니아 인민, 군과 정부가 반 차우셰스쿠 전선에 동참했다고 발표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는 세쿠리타테에게는 투항을 권고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에 충성을 버리지 않는 세쿠리타테는 정규군과 시민을 공격하길 멈추지 않았다. 구국전선은 시민들에게 셰쿠리타테 토벌에 협력하고 정부에 위치를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12월 24일, 헬리콥터를 타려던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이 도주하여 발이 묶였고, 육로로 튀다가 시민들에게 신고되어 혁명군에 붙잡혔다. 세쿠리타테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 세력은 차우셰스쿠의 목을 얼른 따버려서 승패를 확실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 세쿠리타테에게 차우셰스쿠가 구출되어 저항의 구심점이 된다면 내전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5일, 군사재판 결과로 차우셰스쿠 부부는 총살을 선고받고 끌려나가 무수한 총격을 당해서 벌집이 되었다. 국민전선은 수백발의 총탄을 맞고 무참히 죽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영상을 텔레비전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방송했는데, 이는 세쿠리타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책략이었다.[2]
각지에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세쿠리타테 요원은 죽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빈발했다. 보안군은 몇몇 기지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정규군에게 토벌되었다.
세쿠리타테 조직 자체는 차우셰스쿠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지만, 보안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던 자들은 해외 정보에 밝았기 때문에 기업가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이후 극우 정당[3] 에 투신하여 루마니아 정계를 어지럽히게 된다.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으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으나, 루마니아의 경제 환경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기를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고아가 되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세쿠리타테에 등용되어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은 다음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는 심복이 되었는데[4] , 아동기의 학대와 세뇌 교육으로 사이코패스처럼 잔혹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고통받은 아이들이 다시 차우셰스쿠의 앞잡이가 돼서 국민을 억압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 언론인 클레어 홀링워스는 루마니아에 갔을 때, 집에 세쿠리타테가 체포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목욕 중이라서 옷을 벗고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말한 뒤, 지인에게 도움을 청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에 연루되어 있다.
''Securitatea''
1. 소개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이 설립한 비밀경찰. 정식 명칭은 국가보안부(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였다.
1948년 8월 30일 설립되었으며 NKVD(후의 KGB)의 지도 하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공산주의 정권의 비밀경찰이었다. 국가보안부는 보나렌코(P. Bonarenko), 니콜스키(A. Nikolski) 등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소련인으로 구성되었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친위대로 써먹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차우셰스쿠가 세쿠리타테를 만들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다. 1989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총살된 이후에 해체되었다.
2. 보안군과 보안국
루마니아 국민들은 전부다 싸잡아서 '세쿠리타테'라고 불렀지만, 엄밀하게는 내무부(Ministerul Afacerilor Interne; M.A.I.) 산하의 6개 조직 가운데 '세쿠리타테'가 2개 있다.[1]
'''①보안군'''(Trupe de Securitate), '''②보안국'''(Organe de Securitate), ③소방국(Pompieri), ④국가정보국(Arhivele Statului), ⑤경찰국(Miliția), ⑥국방국(Ministerul Apărării Naționale).
3. 특혜
주로 전쟁 고아들을 징집한 루마니아의 보안군은 루마니아 노동당의 당군으로서, 국방국 소속의 군인과는 다른 군복을 착용하는 별도의 조직이었으며, 더 많은 임금을 받았다. 주로 세쿠리타테로 불리는 것은 2번의 보안국으로, 국가에서 각종 특혜를 받았으며, 집과 상점을 특별히 배정받았다. 임금도 6개의 기관 가운데 가장 많이 받았다.
4. 악명
세쿠리타테는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1985년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는 2,200만 명이었으나, 국가보안부 요원의 수는 무려 11,000명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50만의 정보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루마니아 전국에 1100여 개의 도청센터와 320만개 이상의 도청기를 설치하여 인민을 철저하게 감시했다고 전해진다.
5. 몰락
1989년 12월 17일, 차우셰스쿠의 실정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루마니아인들이 티미쇼아라 지방을 시작으로 혁명을 일으키자, 세쿠리타테(보안군과 보안국)는 온 나라가 차우셰스쿠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차우셰스쿠에 충성하였다.
루마니아 정규군은 평소 세쿠리타테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보안군만을 편애하는 차우셰스쿠에게 충성도가 낮았다. 그런데, 22일 차우셰스쿠에게 강경 시위 진압을 명령 받은 국방장관 바실레 밀레아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군인과 장교들은 이 사건이 '보안군에 의한 처형'이 아닐까 의심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음 국방장관으로 차우셰스쿠가 임명한 빅토르 스탄쿨레스쿠는 대세를 읽고 비밀리에 차우셰스쿠 정권에 협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눈속임을 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병영 복귀 등을 지시하며 시간을 끌었고, 루마니아 정규군은 차우셰스쿠를 버리고 혁명에 가담하였다.
시위대에 가담한 정규군은 여전히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면서 시민을 공격하는 세쿠리타테(보안군)와 교전을 벌였고,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 역시 정규군과 협력하여 세쿠리타테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인민과 정규군이 하나가 된 압도적인 혁명의 물결 앞에 세쿠리타테도 중과부적으로 밀려났으며, 12월 22일에는 루마니아 구국전선이 방송국과 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쿠리타테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보호하는 것도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잔존 요새에 의존하여 혁명 세력 휘하 정규군과 교전을 벌였다.
12월 23일, 루마니아 구국전선은 모든 루마니아 인민, 군과 정부가 반 차우셰스쿠 전선에 동참했다고 발표하면서, 저항을 계속하는 세쿠리타테에게는 투항을 권고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에 충성을 버리지 않는 세쿠리타테는 정규군과 시민을 공격하길 멈추지 않았다. 구국전선은 시민들에게 셰쿠리타테 토벌에 협력하고 정부에 위치를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다.
12월 24일, 헬리콥터를 타려던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이 도주하여 발이 묶였고, 육로로 튀다가 시민들에게 신고되어 혁명군에 붙잡혔다. 세쿠리타테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 세력은 차우셰스쿠의 목을 얼른 따버려서 승패를 확실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 세쿠리타테에게 차우셰스쿠가 구출되어 저항의 구심점이 된다면 내전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5일, 군사재판 결과로 차우셰스쿠 부부는 총살을 선고받고 끌려나가 무수한 총격을 당해서 벌집이 되었다. 국민전선은 수백발의 총탄을 맞고 무참히 죽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영상을 텔레비전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방송했는데, 이는 세쿠리타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책략이었다.[2]
각지에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세쿠리타테 요원은 죽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빈발했다. 보안군은 몇몇 기지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정규군에게 토벌되었다.
6. 그 후
세쿠리타테 조직 자체는 차우셰스쿠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지만, 보안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던 자들은 해외 정보에 밝았기 때문에 기업가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이후 극우 정당[3] 에 투신하여 루마니아 정계를 어지럽히게 된다.
7. 여담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으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으나, 루마니아의 경제 환경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기를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고아가 되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세쿠리타테에 등용되어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은 다음 차우셰스쿠에 충성하는 심복이 되었는데[4] , 아동기의 학대와 세뇌 교육으로 사이코패스처럼 잔혹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고통받은 아이들이 다시 차우셰스쿠의 앞잡이가 돼서 국민을 억압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 언론인 클레어 홀링워스는 루마니아에 갔을 때, 집에 세쿠리타테가 체포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목욕 중이라서 옷을 벗고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말한 뒤, 지인에게 도움을 청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에 연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