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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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
3. 사건 경위 및 조사과정
4. 뒤늦게 드러난 테러범의 실체
5. 사건 이후 영향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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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막을 불과 1주일 앞 둔 1986년 9월 14일 오후 3시 12분경 김포국제공항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사건이다. 서울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청사(현 국내선 청사) 1층 외곽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에 위치한 음료수 자동 판매기 옆의 철제 쓰레기통에서 고성능 사제 시한 폭탄이 갑자기 폭발, 전송객 부부 등 일가족 4명과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1명 등 총 5명이 숨지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의 유치를 성공시킴으로써 비약적인 국위 선양을 이루기 위해 국가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테러였기에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으로 강력히 추정되었음에도 테러범의 실체를 전혀 잡지 못해 미제 사건이 되었으나, 1년 뒤에 북한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키면서 대북정책은 급속도로 냉각되고 국민들의 대북 감정 또한 극도로 악화되기에 이른다.[1] 다만 이 사고는 보도통제의 영향으로 중점적으로 보도되지는 못해서, 다른 사건과 달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비교적 빨리 잊혀져 버렸다.

2.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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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사망자 다섯 중에서 대부분이 일가족으로 드러났다. 김포국제공항에서 미국 LA로 출국하는 어머니 김신해를 배웅한 김봉덕 일가가 공항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테러를 당했다. 위 사진은 사건 당일 테러가 발생하기 직전에 김봉덕 씨 일가족들이 어머니 김신해 씨와 함께 국제선 청사 출국장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참고로 사진이 좌우반전되어 있다. 이 사진이 마지막 가족 사진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2] 이 테러로 김봉덕 씨 본인을 비롯해 부인 옥금숙 씨 등 일가족 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으며[3] 나머지 일가족 9명도 중경상을 입는 비극을 당하였다.[4]
대형 유리창이 10장도 넘게 산산조각나는 등 수류탄 7개와 맞먹는 위력적인 폭발이었음에도 사망자가 5명에 그친 것이 기이할 정도였는데, 5명의 희생자들 중 한 사람인 국제공항관리공단 직원 유주환 씨가 사건 당시 폭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천정 보수공사를 하던 중이었기에 폭발물 파편 대부분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유 씨의 시신에 박힌 파편은 무려 90여 개나 되었으며, 시신 수습 당시 하반신은 사라진 상태였다.
사건발생 1년후에 파주 임진각에는 사건 당시 숨진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 1987년 12월 20일에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추모비에는 공단직원 유주환 씨를 포함해서 네 가족의 이름이 적혀 있다. #1, #2

3. 사건 경위 및 조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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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건전지 2개와 전기줄, 철제 신관, 테이프 등 파편 30여점을 수거했으며, 테러범이 5번과 6번 출입구의 인도와 횡단보도 쪽으로 파편이 비산하도록 폭파 각도를 맞춘 것으로 추정하였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가 공항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이 있어 평소에도 인파가 붐비는 데다가 특히 외국인보다 한국인들이 많은 장소라는 것을 테러범이 계획적으로 노리고 폭발물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폭발 후에 잿빛 연기가 났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폭발물의 종류는 콤퍼지션-4(흔히 말하는 C-4)로 잠정 확정되었다. 참고로 콤퍼지션-4는 3년 전인 1983년에 버마에서 발생했던 북한 소행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에서 사용된 폭발물로, 당시 민간용으로는 이 폭약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당국은 이번 폭탄 테러 또한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지었다.[5]
폭탄 테러 특성 상 현장 보존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당국의 대처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라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건 발생 후 가장 기본적인 현장 인원 통제 조차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등 거의 패닉 상태였다. 게다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우리나라에 외국인 선수단이 몰려 오는데다가 사건 발생 다음날에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방한할 예정인 상황인지라, 당국에서는 국가 이미지 관리 상 사건 현장을 빨리 정리 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청소부들을 불러 '''잔해들을 무단으로 치우고 현장을 청소해버렸다.'''[6] 때문에 사건 현장 보존은 실패하였고, 범행 용의점이 있는 내외국인의 출국을 막고 연행 조사했으나 아무 혐의점을 찾지 못하였으며, 천 만원의 포상금을 걸고 인터폴 회원국에도 수사 협조를 요청했으나 결국 범인은 물론 범행 목적도 밝혀내지 못한 체 '''미제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윤일균 초대 국제공항관리공단 이사장이 폭탄 테러의 책임을 물어 이사장 직에서 해임되었으며 후임 이사장은 김준봉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2017년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테러 사건의 배후에 '일본인'이 연루됐을 가능성에 우리 정보 당국이 수사에 착수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치안 본부장이었던 강민창 치안총감[7]의 회고에 따르면, 시한폭탄이었던 만큼 폭탄을 설치한 후 출국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고, 사건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추측에 의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이해구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 역시 “자신에게 보고될만한 수사 진척이 없었다”라고 언급하는 등,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 당국이 얼마나 무능하게 대처하였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4. 뒤늦게 드러난 테러범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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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건 발생 23년 후인 2009년이 되어서야 이 사건의 범인과 전모가 드러난다.
월간조선 2009년 3월호에 # '''아부 니달'''(본명은 사브리 알 바나)을 범인으로 지목한 기사가 실렸다. 1985년 로마 공항, 빈 공항 습격과 1986년 팬암 73편 납치 사건 등을 주도했고, 온건파인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의 측근까지도 서슴지 않고 죽였던 '사막의 독사'라 불리던 인물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관련 자료들을 통해 '''아부 니달이 북한의 청부를 받고 그 하수인들을 국내에 잠입 시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했다.
이 판단의 근거 자료들 중 핵심은 스위스 베른 신문의 한 일본인 기자가 발견했다는 '''동독의 첩보기관 슈타지의 비밀 문서'''이다. 당시 동독은 아랍계 테러조직들을 지원했으나 동독이 테러 기지로 이용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슈타지에서 아부 니달을 비밀리에 조사하자 슈타지의 도움이 필요했던 아부 니달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 전모를 털어놓았고, 그 중에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내막도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빨치산 투쟁'에 공감대가 있던 '''김일성과 아부 니달은 친밀한 관계'''였고 아부 니달은 핵심 조직원들을 북한에서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북한이 폭탄 테러를 사주'''했고 아부 니달은 자신의 조직 2인자인 삼린과 독일 적군파 출신의 여성 크라베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며, 북한으로부터 대가로 미화 5백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삼린은 폭발물 제조기술자인 아부 이브라힘에게 폭발물 제조를 지시했으며, 이브라힘은 자신의 동거녀 크라베에게 한국으로의 폭발물 운반을 맡긴다. 크라베는 루마니아 정보기관인 세쿠리타테에서 만들어준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영국인으로 한국에 위장입국하여, 김포국제공항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홍콩으로 출국했다. 테러가 성공하자 북한 정권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에 있는 한 은행의 아부 니달의 비밀 계좌로 500만 달러를 송금했고 북한이 준 이 돈은 현재도 은행에 묶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는 북의 김일성 정권과 아부 니달이 이끄는 아랍 테러 조직 그리고 루마니아 정보기관의 합동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밖에 폴란드, 북키프로스, 일본도 지원했다.
이 사건의 핵심축인 아부 니달은 2002년 8월 16일 이라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사인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사담 후세인이 아부 니달을 암살했을 거라는 설이 많다. 사담 후세인이 아부 니달을 죽인 이유에 대해 두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하나는 미국에게 테러지원국으로 찍힐 것을 두려워한 후세인이 미국에 대한 성의 표시로 아부 니달을 죽였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담 후세인이 아부 니달에게 테러역량 강화를 위해 여러가지 훈련과 지도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해서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실제 테러범인 이브라힘과 크라베 부부는 생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랫동안 이라크에 거주하다가 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2003년 4월 시리아로 달아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사건 이후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 있는 국제공항의 보안 검색이 대폭 강화되어, 김포, 제주, 김해국제공항 등 국내 3대 국제공항에서 외곽 검문 검색 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외곽 검문 검색 제도의 도입으로 공항 진입 차량들의 검문 검색이 한층 강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항 청사 출입구에서 부터 보안 검색대를 설치'''하여 항공편 탑승객 외에도 탑승객을 배웅하러 온 일반 방문객들을 비롯한 '''공항 청사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서 형식적인 검문 검색으로 인한 비효율성 및 검문 검색 대기로 인한 혼잡 및 불편과 관련하여 민원들이 폭주하는 바람에 '''1992년 1월부터 단계적 폐지'''가 이루어져 오늘날처럼 이들 국제공항의 방문은 다시 자유로워졌다.
또한 이후에 폭탄 테러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많은 공공장소의 쓰레기통은 내부가 잘 보이는 비닐 쓰레기통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5명의 사망자로 인해서 언제 또 닥칠지 모를 또다른 폭발사고의 희생자를 막기위해서 1987년에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방지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 이런 북한 소행의 테러들은 1987년 12월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정권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보수 진영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 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 맨 우측의 성인남성이 김봉덕 씨고, 김봉덕 씨의 옆옆의 검정가방을 들고 서 있는 곱슬 단발머리 여성은 김봉덕 씨의 부인 옥금숙 씨며, 옥금숙 씨 바로 왼쪽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이 바로 김봉덕 씨의 어머니 김신해 씨이다.[3] 김봉덕, 옥금숙 부부와, 부부의 조카인 김현주(당시 15세), 옥건 군(당시 19세) 네 사람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봉덕 옥금숙 부부의 외동딸 김연진양은 생존[4]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신해 씨를 배웅하러 당시 20명이나 되는 친정 식구들이 나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무려 9명이나 다친 것이다.[5] 참고로 콤퍼지션-4는 북한 외에 이슬람 테러 조직도 즐겨 쓰던 폭발물이었다.[6]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 물청소를 통해 현장을 말끔히 정리했던 것처럼 말이다.[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탁 치니 억하고 죽더라'로 역사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다만 실제 발언은 박처원 처장이 했다고 한다. 강민창 전 치안 본부장은 2018년 7월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