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공

 


'''송(宋)나라 24대 국군
문공
文公
'''
''''''
자(子)
''''''
송(宋)
''''''
포(鮑)
'''아버지'''
송성공(宋成公) 자왕신(子王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8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10년 ~ 기원전 589년
1. 개요
2. 생애
2.1. 군주 자리에 오르기 전
2.2. 즉위 후
2.2.1. 불안한 초기
2.2.2. 초나라에게 패하다
2.2.3. 송 문공의 외정(外征)
2.2.4. 송 문공의 대 위기
2.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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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제 24대 군주. 송성공의 아들. 송소공의 동생. 일명 자포혁(子鮑革). 그는 형 송 소공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2. 생애



2.1. 군주 자리에 오르기 전


공자 포는 현면한 이들을 예를 갖추어 대해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언젠가 송나라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에 빠졌다. 이에 공자 포는 식량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해 민심을 샀다.[1] 또한 공자 포는 그 외모가 대단히 준수하여 송양공의 부인 즉 할머니인 왕희가 그와 정을 통하려 했으나 공자 포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왕희는 공자 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여, 국인들에게 민심을 샀으며, 송 소공이 덕이 없어 공자 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송 소공 9년(기원전 611년), 화원은 좌사, 공자 우는 우사 화우는 사마, 인환은 사도, 탕의제는 사성, 공자 조는 사구를 맡았다. 그런데 사성 탕의제가 죽자 공자 수가 그 뒤를 이었다. 11월 20일 송 소공이 빙저 땅에서 사냥을 갔을 때 공자 포의 무리가 송소공을 살해하고 공자 포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문공이다.

2.2. 즉위 후



2.2.1. 불안한 초기


송문공 원년(기원전 610년), 봄 진(晉)나라의 장수 순림보(荀林父)[2] 위(衛)나라의 공달, 진(陳)나라의 공손 녕, 정나라의 석초가 송나라를 쳤다. 그 구실은 바로 송 문공이 송 소공을 살해한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안 송 문공은 그것이 합법적이었음을 말하니 연합군은 철수했다.
송문공 2년(기원전 609년), 송무공, 송목공, 송대공, 송장공, 송환공의 후예들과 송소공의 아들은 송문공의 동복 아우인 사성 공자 수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송 문공은 공자 수와 송소공의 아들을 죽이고 송대공, 송장공, 송환공의 자손과 사마 자백의 빈객들은 송무공의 일족을 쳤고 송 무공, 송 목공의 일족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공손 사를 사성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공자 조가 죽자 악려를 사구로 봉해 민심은 안정되었다.

2.2.2. 초나라에게 패하다


송문공 4년(기원전 606년), 봄 정나라의 공자 귀생이 초(楚)나라의 지령으로 송나라를 쳤다. 송문공은 화원 악려를 보내 막게 했다. 2월 10일 양군이 싸워 송군이 패배했다. 정나라 군대는 화원을 포로로 잡았다. 덤으로 악려의 수급도 얻었다. 전차 460량, 포로 250명, 100명의 항복한 송군의 귀를 얻었다. 화원이 그 꼴이 난 까닭은 병사들에게 양고기 국을 줬으나 그 마부에게 돌아오는 몫이 없어 그의 원한을 산 까닭이다. 송 문공은 화원을 구하기 위해 전차 100량, 400필의 아름다운 얼룩진 털을 지닌 명마와 화원을 교환하려 했으나 화원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쳐 들어왔다.

2.2.3. 송 문공의 외정(外征)


송문공 5년(기원전 605년), 송무공, 송목공의 자손들이 조(曹)나라 군대와 함께 송나라를 쳤다. 가을에 송문공이 보복으로 조나라를 포위했다.
송문공 11년(기원전 600년), 가을 송문공은 등나라에서 상을 치르자 그 틈에 등나라를 포위했다.
송문공 12년(기원전 599년), 등나라가 진(晉)나라에 의지하며 송나라를 따르지 않자 6월 송문공이 등나라를 쳤다.

2.2.4. 송 문공의 대 위기


송문공 15년(기원전 597년), 초나라의 왕인 초장왕은 송나라가 소나라를 구원하자 송나라를 쳤다.
송문공 16년(기원전 596년), 초나라의 사자 신주(申舟) 즉 신무외(申無畏)가 제나라로 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자 송나라는 오랜 원수인 초나락 미워 신주를 포박했다.[3][4] 9월 초장왕이 크게 노해 송나라를 포위했다.
송문공 17년(기원전 595년), 초군은 송나라를 5개월 간 포위했다. 송나라의 도성은 식량이 떨어져 대 위기에 봉착했다. 송 문공은 악영제를 사신으로 보내 진(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晉)나라의 군주인 진경공(晉景公)은 송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대신 백종의 건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송나라는 초나라에 투항했다. 5월 초장왕이 항복을 받아들여 철군하려 했으나 신주의 아들인 신서(申犀)가 그 철군에 반대했다. 그리고 계책을 내서 초장왕이 포진을 하며 버텼다.[5] 이에 송문공은 더 버틸 수 없어서 화원을 초군 진영에 밤중에 몰래 보내 초의 재상인 자반에게 사정을 전해주고 그 자반은 초 장왕을 찾아가 보고했다. 이에 초장왕이 화원에게 물었다.
"성안 사정은 어떠하오?"
화원이 대답했다.
"인골을 땔감으로 쓰고, 각기 자녀를 교환해 먹을 지경입니다."
초장왕이 말했다.
"자반의 말이 틀림없구먼. 아군도 실은 식량이 2일 밖에 없소."
그리고 화원을 믿고 포위를 풀어주었다.

2.3. 사망


송문공 22년(기원전 589년), 8월 송문공이 죽고 그 아들은 자하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송공공이다.

[1] 야심가들이 흉년이 들 때 백성들에게 잘 대해 주어 인심을 챙기는 것은 흔한 수법이다. 훗날 제나라의 진무우가 백성들에게 돈을 꿔줄 때 후하게 빌려주고 이자는 적게 받는 것으로 인심을 샀고, 훗날 그 자손인 전상제나라를 차지했다.[2] 사람 이름이나 아버지 이외의 호칭으로 쓰일 때는 父는 甫와 통하므로 보라 읽는다.[3] 신무외가 신주로 이름을 바꾼 까닭은 신주가 송나라를 쳐서 송나라의 원한이 컸으므로 그 상황을 최대한 피해보려 함이었으나 결국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4] 이때 신무외가 죽었다고 한다.[5] 그게 다름이 아니고 둔전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