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립
宋希立
1553년(명종 8) ~ 1623년 12월 20일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신중(信仲),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위로 형 송대립(宋大立)이, 아래로 동생 송정립(宋挺立)이 있었다.
송희립은 1553년 전라도 흥양현(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1] 에서 현감을 지낸 송관(宋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에 별시로 치른 무과에 병과 159위로 급제하여 1591년에 이순신의 직속군관이 되었다. 귀선의 건조교육과 감독을 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그해 5월 1일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의 군관으로서 거제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 머물며 원균 등과의 합동작전을 주장하였다.
이후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순신이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고문을 받고 있는 동안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하게된다.
정유재란 때에는 수군이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었지만 이순신이 복직한 후 다시 그 휘하가 되며, 뒤이어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다. 다음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해 진린에게 화친을 청해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그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에 고니시는 사천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에 있는 시라노부(宗調信)에게 함대 500여 척을 모두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이순신은 고흥 나로도에서 송희립에게 노량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는데, 송희립은 명군과 조선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을 가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그를 들은 이순신은 그에 동의했다.
이후 육지와 바다에서 몇 개월 동안 봉쇄 작전을 펼치자 일본군의 세력은 크게 꺾여 진린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이 때 송희립은 다시 화친에 응한다 해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 분명하며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넓은 바다' 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바로 노량 해전.
이상으로 서술된 바와 같이,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으로 종군했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던 다른 인물들은 관직이 오르면서 전근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1592년부터 노량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5월에는 양산군수, 동년 8월에는 다대포군수에 제수받았다. 1611년에는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619년에는 별장으로 재직하였고 주사청의 업무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동년 12월에 세상을 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김명국이 연기했으며, 구수한 사투리로 김완과 함께 분위기 메이커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부터 노량까지 이순신의 옆을 지킨 것은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과 같다.
징비록에서도 등장했으나, 이쪽은 이순신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비중은 비교적 낮다.
명량에서도 등장했다. 초요기를 올리다 저격수 하루에게 총알을 어깨어 맞지만 견디고 초요기를 올렸다. 이순신의 명령을 듣고 이를 병사들에게 알려 전투를 수행하는 역할로 나온다.
1553년(명종 8) ~ 1623년 12월 20일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신중(信仲),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위로 형 송대립(宋大立)이, 아래로 동생 송정립(宋挺立)이 있었다.
2. 생애
송희립은 1553년 전라도 흥양현(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1] 에서 현감을 지낸 송관(宋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에 별시로 치른 무과에 병과 159위로 급제하여 1591년에 이순신의 직속군관이 되었다. 귀선의 건조교육과 감독을 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그해 5월 1일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의 군관으로서 거제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 머물며 원균 등과의 합동작전을 주장하였다.
이후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순신이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고문을 받고 있는 동안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하게된다.
정유재란 때에는 수군이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되었지만 이순신이 복직한 후 다시 그 휘하가 되며, 뒤이어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다. 다음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본국으로 퇴각하기 위해 진린에게 화친을 청해 퇴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그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에 고니시는 사천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에 있는 시라노부(宗調信)에게 함대 500여 척을 모두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이순신은 고흥 나로도에서 송희립에게 노량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는데, 송희립은 명군과 조선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을 가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그를 들은 이순신은 그에 동의했다.
이후 육지와 바다에서 몇 개월 동안 봉쇄 작전을 펼치자 일본군의 세력은 크게 꺾여 진린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이 때 송희립은 다시 화친에 응한다 해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 분명하며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넓은 바다' 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바로 노량 해전.
이상으로 서술된 바와 같이,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으로 종군했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던 다른 인물들은 관직이 오르면서 전근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1592년부터 노량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5월에는 양산군수, 동년 8월에는 다대포군수에 제수받았다. 1611년에는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619년에는 별장으로 재직하였고 주사청의 업무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1623년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동년 12월에 세상을 떴다.
3. 대중 매체에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김명국이 연기했으며, 구수한 사투리로 김완과 함께 분위기 메이커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부터 노량까지 이순신의 옆을 지킨 것은 실제 역사에서의 행적과 같다.
징비록에서도 등장했으나, 이쪽은 이순신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비중은 비교적 낮다.
명량에서도 등장했다. 초요기를 올리다 저격수 하루에게 총알을 어깨어 맞지만 견디고 초요기를 올렸다. 이순신의 명령을 듣고 이를 병사들에게 알려 전투를 수행하는 역할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