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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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종과 인선왕후의 3녀.
2. 생애
1652년(효종 3) 13세의 나이로 이조 참판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과 가례를 올렸다. 이듬해 효종은 출합[4] 하는 딸을 위해서 인경궁 옛 터에 집을 짓게 하는데 많은 물자와 공역이 들어가서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청평위궁평면도를 보면, 약 160여간 규모를 자랑한다.[5]
효종은 자신의 딸들을 위해서 아끼지 않고 베풀었고, 이는 현종 또한 마찬가지여서 공주의 집을 수리하는 일로 비판 받는다. 이렇게 숙명공주가 워낙 금지옥엽으로 자라서 그랬는지, 숙종 대에는 내전에 문안하러 들어와서는 조사석의 임명을 두고 "그 사람이 재주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자의대비 앞에서 말했다.[6][7] 숙종은 공주의 이런 말을 노엽게 여겨서 "암탉이 우는 일도 경계하는데, 하물며 공주들이겠느냐?" 라고 말한 일까지 있었다. 이때 사관은 숙명공주가 동평군 이항과 불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사실 숙명공주, 숙안공주 등은 시가가 서인이었고, 동평군의 어머니인 숭선군부인과 자의대비의 후원을 받는 남인인 희빈 장씨가 싫었던 까닭이었다.신들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숙명 공주(淑明公主)를 위하여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집을 지으시는데 제도가 굉장하고 사치하여 공역이 크므로 물역(物役)의 비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서 석 달 동안에 쓴 것이 군포(軍布) 70여 동(同)과 요미(料米) 4백여 석에 이른다고 하니 앞으로의 비용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4년 8월 19일
급기야 갑술환국 때는 "청평(靑平)[8] , 인평(寅平)[9] , 익평(益平)[10] 세 공주를 살해하여 야 남인은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까지 공초에서 나온다.
숙종 대에 언니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이 처형당할 때, 홍치상은 자신의 사촌이자 같은 동서인 숙명 공주의 장남인 심정보에게 누명을 씌웠는데, 결국 심정보도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11]
3. 여담
- 세간에는 소문난 고양이 집사이자 냥덕후로 비춰진다. 오죽하면 인선왕후가 편지로 "네 여동생은 벌써 회임 중인데, 너는 어쩌자고 고양이만 좋아하니?" 잔소리를 한 적이 있으며 효종도 "너는 시집에 가면 시부모에게 잘 해야지, 왜 고양이만 끼고 사니?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해서 먹어라" 하면서 편지로 잔소리를 해댔다. 또한 숙명공주가 입궁해야 하는 날에 입궁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효종이 "뭐 들어와야 하는데 못 들어온 것도 잘못이겠지. 그런데 그건 분명 전부 네 남편 탓이니까 네 남편 갈궈라"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 효종, 인선왕후, 장렬왕후 등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65통을 모은 숙명신한첩이 있으며, 소장 및 관리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 숙명공주는 특히 연년생 남동생인 현종과 사이가 좋았다. 인선왕후는 여러 사위 중에 숙명공주의 남편인 심익현을 가장 총애했는데, 심익현의 이모부가 인선왕후의 오빠인 장선징이었기 때문이었다.
[1] 정확히는 윤1월 25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숙명공주 태지석에서 확인 가능하다. # [2] 효종이 공주를 위해서 인경궁 옛 터에 새로 지었다. [3] 본관은 청송, 자는 가회(可晦)이며, 호는 죽오(竹塢)이다. [4] 조선 시대 왕자나 왕녀가 가례 후 궁궐 밖의 살림집으로 나가는 일을 말한다. [5]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 중이다. # [6] 조사석은 자의대비의 사촌 동생이다. [7] 조사석은 본래 당적은 서인이되, 본인이 노선을 또렷하게 하지 않아 노론에게는 소론이라고 비난받고 남인에게는 노론이라고 비난 받았다. [8] 청평위 심익현과 혼인한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 [9] 인평위 정제현과 혼인한 효종의 넷째 딸, 숙휘공주. [10] 익평위 홍득기와 혼인한 효종의 둘째 딸, 숙안공주. [11] 심정보는 당대에 주색잡기를 좋아하고, 성품은 용렬하고 식견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