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경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고종
안혜태후

'''원종비
순경태후
'''
경창궁주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정화궁주
'''시호'''
'''원종'''
'''정순왕후(靜順王后)'''
'''충렬왕'''
'''순경태후(順敬太后)'''
'''원 무종'''
'''고려왕비(高麗王妃)'''
'''작위'''
경목현비(敬穆賢妃)
태자비(太子妃)
'''본관'''
경주 김씨(慶州 金氏)
'''사망지'''
고려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 사당리(社堂里) 자택
'''능호'''
가릉(嘉陵)
'''생몰연도'''
1222 ~ 1237.07.29
1. 개요
2. 생애
3. 시호
4. 가릉
5. 대중매체


1. 개요


원종 순효대왕의 1비로 충렬왕의 모후다. 이름은 김연(金軟).

2. 생애


그녀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생전 본관은 경주이나 조부인 김태서 대에 전주를 관향으로 삼으니 본관은 전주로 바뀌었다. 그녀의 어머니 우봉 최씨는 다름아닌 최우의 장녀. 그러니까 그녀는 최우의 외손녀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고려 황실과 연을 맺어 사돈으로서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혼인으로 원종이 태자였던 시절에 입궐해 경목현비라 불렸다.

부부의 결혼은 천지양의의 상례(天地兩儀之常)이니, 이보다 중요한 상례는 없을 것이다. 제왕의 자손(帝王垂子孫)이 만세의 통치(萬世之統)를 드리우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생략)

- 고종의 주례사로 태자 원종과 태자비 순경태후가 결혼할 때 내린 칙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3권 기록.

고종 22년(서기 1234년)에 정식으로 원종과 혼례를 올려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35년 아들 충렬왕을 낳고 그 다음 해 공주를 낳은 뒤 병을 얻어 15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1] 이 때 낳은 공주도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려서 죽은 듯. 거기다 충렬왕 때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왕실의 피바람이 그나마 덜 불었을 거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
동국이상국집 제 36권에 이규보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쓴 순경태후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이 남아있다.

3. 시호


고려의 시호 전통을 지킨 마지막 왕후다. 고려는 위숙왕후 이래로 국왕의 대표시호와 왕후의 대표시호를 맞췄다. 예를 들어 威숙왕후와 세조 威무대왕, 원종 順효대왕과 順경태후 같이.[2]
원종 3년(서기 1262년)에 죽자 그 시호를 ''''정순왕후(靜順王后)''''라고 하면서 추증했다. 훗날 1274년 아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에 추존되어 그 시호를 ''''순경태후(順敬太后)''''라 했다. 충렬왕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려의 전통을 지킨 독자적 시호를 바치고 아버지에게 최후의 묘호 및 시호를 바침으로서 고려의 마지막 '전통적' 태후[3]와 해동천자에게 예우를 바쳤다.
동문선 29권엔 아들 충렬왕이 어머니를 추봉할 때 쓴 옥책문이 남아있다. 근데 여기선 '''숭崇'''경왕태후라고 했다.
충선왕 때 원 무종이 충렬왕의 어머니라고 하여 고려왕비라 추봉했다.

4. 가릉


그녀의 능인 가릉(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해 있는데, 희종의 석릉와 시아버지의 홍릉, 시할머니인 원덕왕후 유씨의 곤릉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에 위치한 몇 안 되는 고려왕릉 중 하나이다.

5. 대중매체


MBC 사극 무신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달아 외조부 최우의 손에 의해 잃자 외조부를 원망하며 시름시름 앓아가다가 갓 태어난 왕손을 남긴 채 거의 화병으로 죽는 것으로 연출되며 나왔다. 이 때문에 남편 원종은 무신정권에 극도로 반감을 가지게 된다.

[1]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애책문엔 16살에 죽었다고 한다.[2] 이 뿐만 아니라 태후 존호를 시호로 사용하는 것도 고려 고유의 시법이다. 원래 태후는 생전의 칭호로 사후엔 붙히지 않는다. 태후 문서의 고려 항목 참조.[3] 마지막 태후는 아니다. 고려 마지막 태후는 명덕태후이며 그외에도 제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와 같이 태후 시호가 올려졌던 왕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