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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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충숙왕의 4비.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이자 충목왕, 충정왕, 우왕의 할머니. 존호 중 하나인 명덕태후란 명칭이 유명하다.
본관은 남양.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로, 언니는 충선왕의 후궁 순화원비(順和院妃), 친정조카는 공민왕 대에 문하시중을 지낸 홍언박이다.
2. 생애
2.1. 왕비가 되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단정하다는 평을 받았다. 충숙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혼인, 덕비로 책봉되었다. 행동거지가 예법에서 어긋난 것이 하나도 없어 충숙왕이 매우 총애했다. 덕비가 낳은 두 아들이 충혜왕과 공민왕으로, 원 간섭기 시절 고려 출신 왕비의 소생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임금이 덕비의 아들 충혜왕이었다.
덕비의 아버지 홍규는 송송례 등과 함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를 제거하고 무신 정권 시대를 종결시킨 장본인들 중 한 명이다. 딸이 원의 공녀가 되자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려 딸이 매질을 당하고 원 사신에게 주어졌으며, 해도에 귀양을 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귀양에서 풀린 뒤 20년 동안 시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장남을 죽이기까지 한 충선왕 입장에서, 고려왕실에 충성하고 조용히 사는 그는 적당했다고 볼 수 있다.
2.2. 충숙왕의 복위를 돕다
1313년 충선왕의 양위로 충숙왕이 즉위했지만 1320년 충선왕이 티베트 귀양을 간 이후에야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321년 원나라에 불려가고 4년 동안 국왕인장도 빼앗긴 채 원에 머물러야 했으며 1325년에 고려로 귀국했다. 한편 심왕은 이 시기 원의 중심과 밀착해 고려국왕의 자리를 탐냈고 이로 인해 고려 국내세력이 충숙왕 세력과 심왕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세력의 지지는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1322년 국내신료들이 충숙왕 복귀시키기를 원에 청했지만 이 일로 인해 고려에서 갈등이 벌어졌다. 신하들이 충선왕 귀국을 중서성(中書省)에 제출한 일에 대해 심왕 파벌이었던 권한공, 채홍철, 이광봉 등은 경사만과 김인윤이 왕명이라고 해 신료들을 독촉해 어쩔 수 없이 청원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이때 중서성에 보낸 글을 왕명이라고 독촉해 신료에게 서명하게 한 사람이 대언 경사만과 호군 김인윤이었다. 대언은 왕명하달을 맡기에 경사만이 청원문을 쓰고 신료의 서명을 받은 일을 왕명으로 수행했거나 사칭했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고려백관을 상대로 왕명이라 한 걸 보면 경사만 혼자서 실행했을 리가 없다.
경사만이 덕비의 조카사위였고 궁중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주목되는데, 경사만이 궁중에서 덕비를 만나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권한공과 채하중이 심왕의 뜻을 받아 경사만, 김인연, 김지경을 순군옥에 가두자 2달 뒤 덕비가 순군에 명해 석방시켰다고 한다. 이를 보아 덕비는 충숙왕 귀국과 연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322년 충숙왕의 방향이 가늠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원에서 고려국왕의 인장을 거두어가고 충숙왕은 원에 억류된 상황이었다. 이 시기 국내에서 충숙왕을 지지하는 일에 대해 덕비와 그 인척 경사만이 앞장섰던 것이다.
심왕을 지지한 권한공은 심왕을 왕으로 내세울 것을 청원하는 글을 원 중서성에 제출하고자 했고 문무백관을 소집해 서명하라고 했지만 감찰집의 윤선좌가 상서문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대간, 문헌, 언양군 김륜, 김우, 찬성사 민종유가 서명하지 않았다. 심왕과 충숙왕이 대립한 상황에서 원 황제가 심왕을 총애했기 때문에 충숙왕 지지자는 많지 않았다. 김륜에게 여러 사람과 의견을 달리하다가 후회한다고 한 걸 보면 대부분은 서명한 게 맞다.
민종유와 김륜은 인척이었는데 민종유의 손자 김사평이 김륜의 사위였다. 김륜의 아우 김우도 심왕을 옹호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민종유와 김륜 집안은 확고히 충숙왕을 지지했다. 김륜은 허종의 조부 허공의 사위로 강화도 피난 당시 김륜의 장인 허공은 당시의 재상으로 최후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김륜에게 가족을 인솔하고 앞서게 했는데 당시 14세였지만 성숙했다고 한다.
허종은 충렬왕이 궁중에서 길렀으며, 성장하자 충선왕의 외동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결혼시켰다. 허종은 부유하게 컸지만 예의를 지키고 구제하기를 좋아해 충렬왕 대 수사공(守司空)으로 임명되었으나 파임하고 황제의 명령으로 원에 가 3년간 체류했다. 충선왕 대에 수사도로 임명되고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이 되었으며 원으로 다시 갔다가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자 귀국했다. 복국장공주가 덕비를 질투하자 덕비가 허종의 집으로 도망친 기록을 보아, 덕비와 허종은 꽤 친했던 것 같다.
민종유와 김륜, 김우는 상호인척이고 김륜은 허종과 인척이며, 허종은 덕비와 친했다. 이들은 인척으로 모두 덕비로 이어진다. 즉 덕비를 중심으로 한 외척집단이 결집되어 서명반대에 동조해 신하들이 서명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외에 심왕 옹립에 반대한 자들은 원과 밀착되지 않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기에 덕비세력과 손잡았다고 볼 수 있다.
충숙왕이 1324년 귀국한 뒤 1329년 충혜왕을 세자로 지목해 왕위를 물려주었다. 충숙왕이 충혜왕에게 양위한 이유는 원 때문인지만 충혜왕에게 선양한 데는 충숙왕의 의지로 보인다. 충숙왕은 복위하기를 원했지만 충혜왕의 행위에 대한 실망으로 보인다. 충혜왕 양위를 도운 게 김지경이라는 점을 보면 덕비가 연관되었던 것 같다. 김지경은 국왕귀국을 중서성에 올린 사람으로 경사만과 함께 순군옥에 들어갔을 때 덕비가 풀어주었다. 김지경은 덕비와 덕비의 조카사위 경사만과 긴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덕비의 아들이 즉위한 데에는 김지경과 덕비의 의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숙왕이 어려울 때 덕비가 도와준 데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다.
하지만 충숙왕은 충혜왕이 즉위한 뒤 명덕태후를 강제로 고향에 보내버렸다. 정방길이 충숙왕에게 이간질한 내용은 충혜왕의 왕위는 충숙왕이 물려주었는데 그 신하들을 파직시키고 의성창만을 충숙왕에게 속하게 해 봉양물자를 제공하지 않으면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의 아들 용산원자(龍山元子)와 우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충숙왕은 자신에 대한 대우와 용산원자의 일을 섭섭하게 여겼다. 충숙왕이 명덕태후를 견주(見州)로 내려 보내고 충혜왕과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이 일에 덕비가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덕비가 아들에게 아버지 잘 대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충숙왕은 덕비를 믿었는데 아니라서 섭섭했다고 볼 수 있다. 김지경을 충숙왕이 순군옥에 넣어버린 것도 이와 연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덕비의 이런 활약은 원 시절 최초로 고려인의 아들이 임금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2.3. 공민왕이 즉위하기까지
1330년 덕비는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강제로 고향에 내려가고 충혜왕은 그 해 9월과 12월 2차례 견주로 가서 덕비를 만났다. 하지만 덕비가 돌아온 건 1336년이 된 이후였고, 아들에게 덕경부(德慶府)를 후비부로 받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자 자기 차남을 대군으로 삼고 원에서 숙위를 시키거나 사람들을 시켜 충혜왕 이후 공민왕 즉위를 위해 움직였지만, 덕녕공주의 움직임으로 인해 결국 2번이나 실패하게 된다. 덕녕공주에게 밀려 충목왕과 충정왕 시절에는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했으나, 충정왕이 폐위되고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2.4. 공민왕 시절
덕비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공민왕이 관저를 덕경부에서 문예부(文睿府)로 고치고 대비 홍씨(大妃洪氏)가 되었으며, 공민왕이 원 독립을 선언하면서 관저를 숭경부(崇敬府)로 고치고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로 높여진다.
충혜왕이 원에 잡혀 귀양 가자 정승들이 덕비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덕비는 채하중에게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 것은 녹봉과 지위만 보전하는 것"이라며 질책했다. 공민왕 원년 공민왕이 종묘에서 친히 관제를 행하려 할 때 판서운사의 말을 듣고 중지시켰다. 이에 도당에서 반대가 들어왔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민왕 18년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왕이 태후에게 문안 가서 가뭄에 대해 언급하였더니 태후가 말하기를 “왕은 날씨가 가무는 까닭을 아시오. 작년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백성들이 굶어죽었고 금년에 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살길을 잃으니 왕은 누구와 더불어 임금 노릇을 하시겠소? 어째서 정사를 신하에게 위임하시며 공로 있고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토목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하여 화기를 손상하게 하시오.” 하였다.
태후는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일을 반대하고 있었다. 1366년 고려로 돌아온 덕녕공주가 태후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을 때, 신돈이 공민왕과 함께 왔다. 그런데 태후가 신돈에게 앉으라고 하지 않아, 신돈은 나가야 했다. 왕이 태후에게 "신돈은 중신인데 왜 자리를 안 내줬냐"고 하자 태후는 "미망인이기에 외부 승려와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후 신돈은 태후에게 원한을 품고 백방으로 참소하고 이간질했다고 한다. 태후와 신돈은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다.
신돈의 정치에 반대한 경복흥은 경사만의 아들로 우왕 대 이인임이 경복흥을 꺼렸지만 태후 생전에는 쫓아내지 못한 걸 보아 태후가 신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이 경복흥을 자기 세력에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신돈이 참소해 경복흥이 귀양을 갔다. 둘의 관계는 신돈이 죽자마자 경복흥이 복귀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태후는 경복흥과 같은 관료들이 신돈을 비판하기 어려워지자 직접 신돈을 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또 태후는 토목공사에 반대했다. 마암에 짓는 노국대장공주의 영전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가 투옥되었는데, 태후가 유탁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공민왕은 듣지 않았다.
태후는 불교에 우호적이지는 않았으나 당시 공사가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반대할 여지는 충분했다. 사원을 짓던 때가 1370년으로 신돈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태후가 무녀를 총애했다가 요망한 걸 알고 재산을 몰수한 뒤 측근을 때려죽인 기록을 보아 태후가 불교보다 무속신앙을 더 믿은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판서운사의 제사 건도 그게 원인이었던 모양.공민왕 17년에 시중 유탁이 마암 공사를 중지하자고 간언하였다가 투옥되었는데 태후가 사람을 시켜 그를 석방하도록 타일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태후가 계속하여 말하기를 영전의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천하에 비길 곳이 드물며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재정을 낭비하는 것이 이 공사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수해와 가뭄이 다 여기에 기인되지 않음이 없으니 그 공사를 그만두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공민왕이 절을 지었는데 상량上樑하다가 대들보에 깔려죽은 사람이 26명에 달하는 바, 몸과 사지가 각각 떨어져서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었다. 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공사를 중지하라고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태후가 공민왕 대에 정치에 관여하고 백성을 거론한 것은 큰아들 충혜왕 사건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 입장에서 큰아들이 백성들 못살게 굴었다고 원에 잡혀가 죽은 건 매우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공민왕 시대로 가면 원을 그 정도로 의식할 필요는 없어지지만 이 사건을 겪으면서 태후는 백성이 살기 어려우면 임금의 목숨과 직결된다고 여기게 되기는 충분했다.
태후가 신돈을 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인척인 경복흥 등도 같이 내쳐진 것이었다. 태후는 임금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료들이 등을 돌릴 때 도와준 게 친인척뿐이었기 때문에 친인척 배제에 부정적이었다. 태후는 시대의 변화로 인해 아들이 추진한 개혁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들을 위해 자기 나름대로 올바르다 여기는 일들을 아들에게 꾸준히 말한 것이다.
2.5. 우왕의 즉위
1372년 공민왕이 모니노에게 스승을 붙여 공부시킬 것을 청했는데, 태후는 '아직 모니노의 나이가 어리다'며 반대했다. 그녀는 진짜 공민왕의 아들인지 불분명한 모니노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공민왕의 후계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사후 왕실의 최고 어른[1] 으로서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을 선택하려고 했으나, 시중 이인임의 강력한 주장으로 모니노를 왕으로 세웠다.
그녀가 우왕의 즉위를 망설인 것은 결과적으로 우왕의 왕권을 흔들어놓고 나아가 우왕, 창왕이 폐위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공민왕은 모니노가 신돈의 여종 반야의 소생이라는 것 때문에 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모니노의 생모를 궁인 한씨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모니노의 출생에 의혹을 더해주기만 했다. 그래서 공민왕 생존시에도 모니노의 정통성은 불안불안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이 우왕의 혈통에 대해 계속 의문을 표하니, 우왕의 정통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우왕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요동 정벌과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 무리수는 위화도 회군과 폐가입진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어찌보면 고려 왕실의 정통성에 의도치 않게 흠집을 냄으로써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데 일조한 셈.
우왕 즉위 후에는 태후로서 섭정하였다.
2.6. 훙서
1380년(우왕 7년) 향년 83세로 남편과 아들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묘는 영릉(令陵), 시호는 공원왕태후. 1391년(공양왕 3) 충정왕의 모후 희비와 함께 기제(忌祭)와 진전제(眞殿祭)를 왕후의 전례에 따라서 거행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 소생의 후손들은 바람잘날이 없었다. 장남인 충혜왕은 막장짓거리를 일삼다 폐위되어 죽고 손자인 충목왕은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지만 일찍 요절, 둘째 손자인 충정왕은 둘째 아들인 공민왕에 의해 죽고 공민왕 역시 초기에는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지만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흑화하며 암군이 되어 죽고 게다가 자신의 가문마저 아들 공민왕 시해의 영향으로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2] 더구나 서손자 우왕, 서증손 창왕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으로 한국 역사에서의 태황태후 중에서도 손가락에 들정도로 장수하였고 우왕 즉위 때도 무척 나이가 많았는데도 위치상 이인임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그나마 밀린 뒤에도 견제를 지속해야 하는 등 맘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그녀가 죽은 뒤 얼마 안돼서 그녀의 친인척 및 경복흥 등의 친 명덕태후 세력들은 바로 숙청이 되고 말았다.
3. 칭호
명덕왕태후의 실제 지위는 대왕태후였다. 그렇지만 실제 존호는 대왕태후가 아닌 왕태후였는데 그이유는 고려는 살아있을 때 대왕태후에 봉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3]
충숙왕의 왕비로서 받은 존호는 덕비, 둘째 아들 공민왕이 즉위해 올린 존호이자 지위인 대비, 이후 독자적인 외왕내제가 잠시 부활하며 천자국식으로 올린 숭경태후, 사후 추봉된 시호는 공원태후.
근데 이렇게 되면 명덕태후(明德太后)란 칭호는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고려사에서는 명덕태후로 기록했지만, 정작 명덕태후가 존호인지 시호인지는 알 수 없다.
4. 영상매체에서
아들인 공민왕이 사극의 주제로 많이 다뤄졌다 보니, 어머니인 공원왕후 역시 그에 맞춰 자주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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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신돈에서는 배우 엄유신 씨가 공원왕후 역을 맡았다. 평생 원나라의 공주들에게 치여 살았던 한을 아들인 공민왕을 이용하여 풀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고 자신을 높여주는, 즉 자신의 권력과 권위와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존재이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며느리인 노국대장공주 문제로 강짜를 부리고, 며느리를 시집살이 시키는 것으로 가정 내 자기 권위를 확인하려 든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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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정도전에서는 배우 이덕희[5] 씨가 공원왕후 역을 맡았다.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이 두 드라마가 공민왕~우왕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신돈>을 다 본 후 <정도전>을 보게 되면 명덕태후의 행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