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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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an Zweig'''
1881년 11월 28일 빈 ~ 1942년 2월 22일 리우 데 자네이루
오스트리아의 작가.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전세계에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전기소설로 유명하다.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 빈에서 부유한 유대인 면직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이기는 했지만, 본인은 정작 그 혈통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1] 나중에는 유대교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츠바이크 본인은 생애 전반에 걸쳐 유대인이 유럽 상류층에 동화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정작 시오니즘을 창안한 테오도르 헤르츨[2] 과도 평생에 걸친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후 1차대전 당시에는 자원입대[3] 하여 국방부에서 근무한다.
츠바이크는 종전후에도 언론인 겸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한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비롯한 극우세력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츠바이크는 이를 피해 1934년 런던으로 망명한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서유럽을 빠르게 휩쓸자 츠바이크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남미의 브라질로 거처를 옮긴다. 전황은 여전히 독일에게 유리했고, 이런 현실에 츠바이크의 절망감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1942년 2월 23일 츠바이크는 아내와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됐고, 사인은 자살, 정확히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밝혀졌다.
당시 독일의 음악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친분이 있었고 슈트라우스의 작품인 오페라 '말없는 여자'(Die schweigsame Frau)의 대본을 작성하는 등 작품 협력을 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유대인 문제를 두고 끝까지 나치와 대립했는데 여기엔 츠바이크의 사례도 있다. 위의 '말없는 여자'의 초연 때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제작 명단 중 츠바이크의 이름을 지우라고 강요했으나 슈트라우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원래 초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괴벨스는 불참했고, 이후 오페라 자체도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방대한 지식과 역사와 문화를 꿰뚫는 깊은 통찰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조제프 푸셰』 등 많은 전기를 발표했고, 불세출의 걸작을 남긴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거장들에 대한 책을 집필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한 작가였다. 이러한 성향은 동향인이자 빈 대학교 동문, 동시대 학자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어린 교류는 1908년 츠바이크가 자신의 드라마 Thersites를 프로이트에게 보냈을 때부터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계속되었다.[4] 츠바이크는 프로이트를 “인간 영혼에 관한 지식을 우리 시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심화, 확대시킨” 사람이라 회고했고,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에 대한 평전 『정신의 탐험가들』을 집필하기도 했다.[5]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츠바이크가 집필한 수많은 소설과 평전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독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다른 예술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가 천재 감독 웨스 앤더슨의 2014년 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이다. 앤더슨은 이 영화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6][7]
'''대놓고 편파적으로 글을 쓰며 역사물을 신파극으로 재창조한다(...)''' 그의 문장들을 보면 흡입력이 굉장하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선 그 필력 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그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이 양반의 글을 읽을 땐 중립성은 포기하고 읽는 것이 좋다. 역사인물 한 명을 임의로 골라 그 사람에 감정을 이입하여 자신의 일기마냥 쓰는 것이 특징인데, 긍정적인 면은 당연히 좋게 묘사되고 부정적인 면은 감성팔이까지 동원해서 합리화하는 경향이 짙다. 물론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같은 학살자의 경우 그의 악행도 확실히 묘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상당수 작품들이 주인공격에 해당하는 역사인물에 대한 미화가 살짝 심한 편이다. 로버트 스콧의 남극탐험을 다룬 글이 그것. 미화까진 안 가더라도 주인공격 역사인물의 반동인물에 해당하는 역사인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는데 상술한《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선 마리 앙투아네트를 끌어내고 처형한 혁명가들을 광기에 빠진 악마들마냥 묘사하기도 했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다룬 글에선 메흐메트 2세와 예니체리를 지옥에서 온 악마들마냥 극단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런 특징이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흡입력을 높여주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만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 단점을 감안하고도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사소설이다.
'''Stefan Zweig'''
1881년 11월 28일 빈 ~ 1942년 2월 22일 리우 데 자네이루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작가.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전세계에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전기소설로 유명하다.
2. 생애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 빈에서 부유한 유대인 면직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이기는 했지만, 본인은 정작 그 혈통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1] 나중에는 유대교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츠바이크 본인은 생애 전반에 걸쳐 유대인이 유럽 상류층에 동화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정작 시오니즘을 창안한 테오도르 헤르츨[2] 과도 평생에 걸친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후 1차대전 당시에는 자원입대[3] 하여 국방부에서 근무한다.
츠바이크는 종전후에도 언론인 겸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한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비롯한 극우세력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츠바이크는 이를 피해 1934년 런던으로 망명한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서유럽을 빠르게 휩쓸자 츠바이크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남미의 브라질로 거처를 옮긴다. 전황은 여전히 독일에게 유리했고, 이런 현실에 츠바이크의 절망감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1942년 2월 23일 츠바이크는 아내와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됐고, 사인은 자살, 정확히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밝혀졌다.
당시 독일의 음악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친분이 있었고 슈트라우스의 작품인 오페라 '말없는 여자'(Die schweigsame Frau)의 대본을 작성하는 등 작품 협력을 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유대인 문제를 두고 끝까지 나치와 대립했는데 여기엔 츠바이크의 사례도 있다. 위의 '말없는 여자'의 초연 때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제작 명단 중 츠바이크의 이름을 지우라고 강요했으나 슈트라우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원래 초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괴벨스는 불참했고, 이후 오페라 자체도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3. 작품
방대한 지식과 역사와 문화를 꿰뚫는 깊은 통찰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조제프 푸셰』 등 많은 전기를 발표했고, 불세출의 걸작을 남긴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거장들에 대한 책을 집필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물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한 작가였다. 이러한 성향은 동향인이자 빈 대학교 동문, 동시대 학자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어린 교류는 1908년 츠바이크가 자신의 드라마 Thersites를 프로이트에게 보냈을 때부터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계속되었다.[4] 츠바이크는 프로이트를 “인간 영혼에 관한 지식을 우리 시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심화, 확대시킨” 사람이라 회고했고,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에 대한 평전 『정신의 탐험가들』을 집필하기도 했다.[5]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츠바이크가 집필한 수많은 소설과 평전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독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다른 예술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가 천재 감독 웨스 앤더슨의 2014년 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이다. 앤더슨은 이 영화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6][7]
3.1. 작품들의 특징
'''대놓고 편파적으로 글을 쓰며 역사물을 신파극으로 재창조한다(...)''' 그의 문장들을 보면 흡입력이 굉장하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선 그 필력 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그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이 양반의 글을 읽을 땐 중립성은 포기하고 읽는 것이 좋다. 역사인물 한 명을 임의로 골라 그 사람에 감정을 이입하여 자신의 일기마냥 쓰는 것이 특징인데, 긍정적인 면은 당연히 좋게 묘사되고 부정적인 면은 감성팔이까지 동원해서 합리화하는 경향이 짙다. 물론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같은 학살자의 경우 그의 악행도 확실히 묘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상당수 작품들이 주인공격에 해당하는 역사인물에 대한 미화가 살짝 심한 편이다. 로버트 스콧의 남극탐험을 다룬 글이 그것. 미화까진 안 가더라도 주인공격 역사인물의 반동인물에 해당하는 역사인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는데 상술한《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선 마리 앙투아네트를 끌어내고 처형한 혁명가들을 광기에 빠진 악마들마냥 묘사하기도 했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다룬 글에선 메흐메트 2세와 예니체리를 지옥에서 온 악마들마냥 극단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런 특징이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한 흡입력을 높여주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만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 단점을 감안하고도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사소설이다.
3.2. 주요 작품
- 아목(Amok)
- 체스 이야기
- 낯선 여인의 편지
- 연민
-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
-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 초조한 마음
- 메리 스튜어트
- 광기와 우연의 역사
-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 어제의 세계 - 자서전 격인 책으로, 그가 직접 경험한 유럽 지성사를 서술했다.
- 위로하는 정신
- 카사노바를 쓰다
- 환상의 밤
[1] 나중에 인터뷰에서 츠바이크가 '나도 그렇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우연히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뿐이다.'라고 말한것을 보면 집안분위기 자체가 유대인의 정체성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유대인 출신의 오스트리아 언론인. 젊은 시절에는 유대인이 유럽사회에 동화될 것을 주장했지만 드레퓌스 사건 당시 취재를 목적으로 프랑스에 파견됐다가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맞닥뜨리고는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을 주장하게 된다.[3] 츠바이크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1차대전 당시 많은 유럽 각국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목숨바쳐서 싸웠음에도 현실은 시궁창. 대표적인 예로, 독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에 이미 유대인 사병들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전쟁에서 진 후에는 배후중상설이라는 희대의 정신승리를 시전하며 모든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린다.[4] https://blogs.bl.uk/european/2015/09/a-friendship-with-freud-.html[5]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 :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슈테판 츠바이크 ; 김연수 옮김) 책 소개 중에서.[6]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안인희 옮김) 저자 소개 중에서.[7] 영남일보 (2020-12-18) : 광기와 우연의 역사…역사를 결정 지은 '우연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