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헤르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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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헤르츨'''
''' תאודור הרצל | Theodor Herz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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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빈야민 제에브 테오도르 헤르츨
히브리어: בִּנְיָמִין זְאֵב תֵּאוֹדוֹר הֶרְצְל
독일어: Theodor Herzl[1]
'''출생'''
1860년 5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 페슈트(Pest)
'''사망'''
1904년 7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라이헤나우안데어락스(Reichenau an der Rax)
'''묘지'''
오스트리아 제19구역 되블링 묘지(1904~1949)
이스라엘 예루살렘 헤르츨 언덕(1949~현재)
'''학력'''
빈 대학교
'''직업'''
기자, 작가, 사회운동가
'''종교'''
무종교(무신론자)
'''사상'''
시오니즘
'''가족'''
야코프 헤르츨(부)
자네트 디아만트(모)
율리 나샤우어(부인)
파울리네 헤르츨(장녀)
한스 헤르츨(장남)
마르가레테 헤르츨(차녀)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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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헝가리인 언론인. 시오니즘의 주창자이자 이스라엘의 국부.

2. 생애


1860년 5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던 헝가리부다페스트에서 출생.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 겸 작가로 활동했다.[2] 그러다가 프랑스 파리에 특파원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목격한 드레퓌스 사건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사건이 단순한 누명 사건이 될 수가 없었던 이유는 혁명의 본고장으로서 반유대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프랑스에서 터진 사건이었기 때문. 헤르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다가 프랑스에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유럽 유대인들은 폐쇄적인 유대 공동체가 유럽인에게 이질감을 주어 차별을 받는다고 여겨 가톨릭/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유대 전통에 거리를 두는 등 유럽에 동화되려는 태도를 가져왔다. 그렇게 몇 세대가 이어지며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해져가고 있었고, 드레퓌스 역시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막상 상황이 닥치자 유럽인들은 거리낌없이 유대인을 타자화하며 차별과 사회적 낙인으로 그들을 대했다. 이런 현실을 목격한 헤르츨은 아무리 유대인이 유럽인이 되려 해도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유대인에게도 조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헤르츨은 1896년 2월, 《유대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Der Judenstaat. Versuch einer modernen Lösung der Judenfrage'')》라는 책을 펴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오스만 제국황제 압뒬하미트 2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넘겨달라는 청원을 하기도 한다. 결국 황제와의 면담은 실패했지만 이 일로 그는 일약 시오니즘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시온주의자 세계대회는 그 노력의 결실. 이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이스라엘을 위한 큰 업적을 이룬것과 달리, 가정사는 불행했다. 당시 시오니즘에 호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 계층이었던 탓에[3] 헤르츨은 시오니즘 운동의 재정적 부담까지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 1897년 1차 시온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16개국 대표들의 참가경비마저 헤르츨의 사비로 충당해야 했을 정도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아내의 지참금마저 탈탈 털어쓴 헤르츨은 마흔네 살에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남편 사후 3년만에 세상을 등졌다. 큰딸은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 둘째 딸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망, 아들[4]은 자살하고 둘째 딸의 아들(외손자)도 자살하여 가문은 완전히 대가 끊겨 버렸다.
1904년 심장병으로 숨진 탓에 생전 이스라엘의 건국을 보지는 못했지만, 에 묻혀 있던 유해가 1949년 이스라엘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스라엘 국립묘지가 '헤르츨 산(הר הרצל)'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5] 헤르츨 언덕 (위키백과 한국어판)

3. 평가


[image]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는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 [image]
'''뒤쪽으로 헤르츨의 초상화가 보인다'''
이스라엘에서는 다비드 벤구리온(초대 총리), 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국부로 칭송받는다. 연령대에서도 헤르츨이 바이츠만, 벤구리온보다 1~2세대 앞선 인물이었고, 두 사람은 헤르츨의 후계자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헤르츨이 없었다면, 벤구리온이나 바이츠만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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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귀향을 이뤄내고 민족 국가의 기틀의 닦았다는 점에서 유대교모세와 비견된다는 시각도 있다. 동포들의 귀향을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전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난 것까지 비슷하다.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에 등장하는 지온 즘 다이쿤의 실제 모델이다. 외견상으로도 빼다박은 정도로 닮았고 각자 세력의 독립 운동 중핵을 맡은 사상가였으며 갑작스러운 사망 또한 일치한다. 그리고 먼 훗날 헤르츨이 꿈꿔오던 조국과 지온이 꿈꾸던 조국은 각자 비뚤어진 선민사상으로 물들여진다는 결과까지도 비슷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온의 안티테제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자 헤르츨의 시오니즘에 해당되는 지온의 지오니즘을 왜곡시켜 침략전쟁을 일으킨 기렌 자비는 지온의 포지션인 헤르츨의 동족인 유태인을 학살하고 탄압한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모티브다.

4. 관련 항목



[1] 독일어 발음은 [ˈteːodoːɐ̯ ˈhɛɐtsl̩\](테오도아 헤아츨)에 가깝다.[2] 그의 부인도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헤르츨은 취미로 기자를 하다시피 했다.[3] 이미 성공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을 획득한 사회에 동화 혹은 공존하고 싶었지, 아예 다 버리고 새 땅으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재벌 하면 생각날 로스차일드 가문조차도 1902년까지는 헤르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4]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주치의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5] 출처 : 토크멘터리 전쟁사 78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