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케이시
[image]
1. 소개
일본의 전 프로야구선수이자 감독.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
별명이자 인생의 좌우명은 초혼(草魂). 약팀에 있으면서, 공의 위력이 떨어져가는 와중에도 잡초처럼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선수생활을 빗댄 별명이라 하겠다.
2. 선수 시절
원래는 오른손잡이었지만, 4살 때 오른팔 골절을 당한 것과 더불어 프로야구 선수로 아들을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왼손잡이로 바꿨다. 그 후 이쿠에이 고등학교[2] 로 진학하여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춘계 코시엔에 한 차례 진출했고, 고교 졸업 후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드래프트가 개최된 1965년, 드래프트 2위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했다. 원래는 한신 타이거스의 1위 지명이 유력했지만, 한신은 스즈키 대신 이시도코 미키오라는 투수를 지명한다.[3]
입단 첫 해에 10승 12패, 방어율 3.19의 신인으로썬 뛰어난 성적을 거둔데 이어 2년차인 1967년, 44경기에 등판에 21승[4] 13패 평균자책 2.77의 호성적을 거두고, 탈삼진 222개로 퍼시픽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하면서 킨테츠의 에이스로 자리매김 했다. 이듬해에도 25승에 무려 305탈삼진을 기록하였고, 그 뒤로도 좌완 파이어볼러로서 1967년부터 5년 연속 20승[5] , 6년 연속 퍼시픽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하며 에이스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1969년엔 24승을 거두며 처음으로 다승왕도 수상했다. 동시기 센트럴리그에도 에나츠 유타카가 센트럴리그 탈삼진 1위를 6년 연속으로 기록하며, '''세리그의 에나츠, 파리그의 스즈키'''라 불렸다.
그러나 1972년부터 갑자기 탈삼진이 크게 줄어드는 등[6] 구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스즈키는 서서히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처음에는 기교파로의 변신을 위한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한신 타이거스로의 트레이드도 고민했지만, 1975년 시범경기에서 4이닝 4실점으로 털리고 난 다음에야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그러면서 제2의 전성기가 오게 되었다. 스즈키의 커리어하이 시즌도 사실 기교파 투수로 완전히 변신한 이후부터였다. 대표적인 게 1977년 시즌 20승을 거두며 2번째 다승왕을 수상한 것과, 현역 시절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1978년 시즌이었는데 이해 성적은 25승(1위)[7] 10패 평균자책 2.02(1위) 178탈삼진(1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단일시즌 25승 투수가 된 시즌이다.
그렇게 선수 생활을 이어 오며 킨테츠의 암흑기 탈출 및 퍼시픽리그 2연패(및 첫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써 활약하기도 했으나, 20년차 시즌인 1985년 시즌 도중 결국 노쇠화를 견디지 못하고 은퇴한다. 은퇴 후 그의 등번호 1번은 퍼시픽 리그 최초이자 킨테츠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다.[8]
킨테츠에서만 20년을 보내면서 통산 317승(역대 4위, NPB의 마지막 300승), 288선발승(역대 1위[9] ) 선발 등판 577번[10] (역대 3위), 340완투[11] , 71완봉승(둘 다 퍼시픽리그 역대 1위), 개막전 역대 최다승(9승), 20승 이상 시즌 8번(퍼시픽리그 타이기록) 등의 기록을 보유하였다. 또한 통산 3061탈삼진(역대 4위), 무사사구 경기 78경기(역대 1위), 560피홈런(역대 1위) 등의 기록도 있는데, 이는 파이어볼러로서 정면승부를 즐겨 했고, 기교파로 전향한 다음에도 그 성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12]
참고로 3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6명 중[13] 유일하게 '''한 팀(킨테츠)'''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야말로 킨테츠를 위해서만 뛰어온 사나이..
3. 감독 시절
이렇게 영광의 선수시절을 보낸 그이지만, 감독 시절은 영 좋지 못했다. 전체적인 평은 '''자신의 생각만 지나치게 고집하는 감독.'''[14] 감독으로 처음 부임하자마자 1993년 스프링캠프에서 스파이크를 신고 러닝 훈련을 하라 했지만, 트레이닝 코치였던 타치바나 류지가 겨울에 스파이크를 신고 러닝하면 다리를 다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타치바나와 싸우다가 동년 시즌 종료 후 그가 퇴단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 성적도 4-2-6으로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중간의 1994년 성적인 2도 전반기까지 최하위였다가 타선이 폭발하면서 겨우 오릭스와 공동으로 해낸 성적.[15]
그러나 역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한 결정타는 '''노모 히데오에 대한 비난.''' 노모가 긴테츠에서 뛰었을 때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고[16] 스즈키 케이시 본인부터가 긴테츠의 레전드여서 본인의 의견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화를 일으킨 게 문제. 거기다 요시이 마사토 등과도 여러 차례 불화를 일으켜서 노모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떠나고, 요시이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스즈키는 그 후로도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인생 최대의 마스터베이션이라는 혹평을 내릴 정도로 노모 등과 다른 선수들을 비난하다 1995년 최하위를 찍으며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해임된다.[17][18] 그 뒤 긴테츠는 나시다 마사타카가 2001년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내내 하위권에만 있어야 했다.
4. 기타
다른 의미의 로나쌩.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 신인이던 1966년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같은 좌완 투수이자 대선배이던 가네다 마사이치(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에게 커브를 던지는 방법을 배울려고 하자 ‘배우고 싶으면 돈을 갖고 와라’(...)는 말을 듣고 빡쳐서(...)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가네다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이 되자 그 화를 풀면서(...) 가네다가 감독으로 있던 1973년부터 1978년까지의 6시즌 동안 롯데전 통산 26승 8패의 성적을 남겼다.
간사이 사철 3개팀에서 각각 뛰었던 요네다 테츠야(한큐), 카도타 히로미츠(난카이)와의 대담에서 아래의 일화 등을 회상했다.
- 요네다 : 한큐는 자금 지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계약 갱신 시 전례가 없다, 전례를 깰 것이냐라며 선수들과 항상 싸웠다.
- 스즈키 : 간사이 3개 구단 중 월급은 난카이가 제일 좋았음. 오사카 구장에 가보면 노무라 카츠야를 비롯한 주력들은 모두 외제차를 보유했으나. 킨테츠는 겨우 토요타 코로나를 탔다.
- 카도타 : 그렇지 않다.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을 때 고치 캠프에 들 것이 없어서 문짝에 실려 옮겨졌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하던 팀이었으니 구단이 돈이 많다고는 생각이 안 된다.
- 카도타 : 센트럴리그와 격차는 분명히 있다. TV중계도 없고, 신문기사에 실리는 것은 경기결과 뿐.
- 요네다 : 퍼시픽리그는 화제 만들기에 필사적이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말을 경주하는 이벤트까지 할 정도 였다.
- 카도타 : 퍼시픽리그의 구장들은 더러웠다. 난카이 2군 구장은 특히 프로가 사용할 구장이 아니었다. 2군으로 강등되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경우 후지이데라 구장, 일본생명 구장을 썼는데 특히 일본생명 구장은 홈팀만 라커룸을 사용하고 있어 원정팀은 더러운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옷을 갈아입곤 했다. 그게 미안했다.
- 요네다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은 너무 좁았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 모두 절구 모양으로 생겨서 좁고 야유가 잘 들렸다.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은 반대로 넓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있어서 있는지 야유도 상냥했다.
- 요네다 : 벤치의 목소리보다 스탠드의 조롱이 더 컸다.
- 카도타 : 모두 전철회사 구단들이라 오너들끼리 경쟁은 대단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천황이라고 불렀다. 킨테츠 오너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중진이고 어디보다도 윗자리에 앉는다. 근데 팀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게 굴욕이었고 "올해야말로"를 연발하셨다. 노력해야겠다 생각했다.
- 요네다 : 전철회사 구단에서 뛰어서 좋은 건 사원증을 이용해 마음껏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것. 경기 때 늘 기차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신년회를 함께 해서 그것이 인연으로 3명의 선배가 단원들과 결혼했다. 한큐에서 자랑할 수 있는건 이정도?
- 스즈키 : 한큐가 매각됐을 때 사철회사가 구단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다. 옛 시대의 종언이었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 그라운드에 주택 전시장을 만들었을 때는 슬펐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5. 연도별 성적
붉은 색은 시즌 최고 기록, 파란 색은 리그 최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