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도타 히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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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야구 해설가.
쇼와 말기, 노무라 카츠야의 저주로 인해 끝없는 암흑기에 빠진 난카이 호크스를 홀로 책임진 슬러거이자 온갖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41세의 나이에''' '''타격 부문 3관왕'''[7] 을 달성한 자기 관리의 화신.
애칭은 '''불혹의 슬러거'''.
2. 프로 입단 전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친의 사업 때문에 나라현으로 이주해 그 곳에서 성장했다. 고교야구 명문고교였던 텐리 고등학교 3학년 때 4번타자 겸 중견수로 맹활약하며 고시엔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나가노 현 대표인 마루코 실업 고등학교에게 0-2로 패했다.
졸업 후 사회인야구팀 클라레 오카야마[8] 에 입단, 팀을 4년 연속 도시대항 야구대회 본선에 올리며 이름을 알린 뒤 196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한다.[9]
3. 프로 시절
170cm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장타력과 강견을 어필하며 신인 시절인 1970년부터 난카이의 3번 타자 겸 좌익수 자리를 꿰찼고, 1971년에는 타율 3할, 31홈런 , 120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고, 1973년에는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노무라 카츠야 선수 겸 감독과 함께 황금기 말엽의 난카이 타선을 이끌었고 우익수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라는 "홈런은 안타의 일종에 불과하다", "넌 무리하게 홈런을 노리지 말고 출루하기나 해"라고 하면서 그의 영웅스윙 기질을 대놓고 디스하며 애버리지 히터로 개조시키려고 했고, 이로 인해 노무라와 보이지 않는 불화를 빚었다.
1977년 노무라가 어른의 사정으로 감독직에서 해임되면서 노무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1979년 스프링캠프에서의 오른발 아킬레스건 파열로 인해 주루능력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홈런을 치면 다리에 부담이 없다. 이제부터는 전 타석 홈런을 노린다"면서 벌크업과 어퍼스윙 개조에 공을 들였고, 전업 지명타자로 출장하기 시작한다.[10] 그 결과 대부분 또래 선수들이 은퇴를 선택하는 30대 중반에 오히려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래는 30대 중반부터 그가 따낸 주요 타이틀 목록이다.
- 1981년: 개인 통산 첫 홈런왕(44개)
- 1983년: 홈런왕(41개), 올스타전 1차전 MVP
- 1987년: 출루율 1위, 명구회 가입(통산 2000안타, 사상 24번째)
- 1988년: 홈런, 타점, 출루율 3개 부문 수상,[11] 퍼시픽리그 MVP(역대 최고령), 쇼리키 마쓰타로상[12] 수상
1991년 친정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복귀했고 199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타율 .289/출루율 .379/장타율 .529, 2566안타 567홈런 1678타점. 홈런과 타점은 오 사다하루, 노무라 카츠야의 뒤를 잇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이며, 안타 역시 역대 4위의 기록.[14] 통산 567홈런은 사회인야구 출신 선수로썬 역대 최다 기록이다.
은퇴 때까지 홈런을 빼앗아 낸 투수의 수는 184명으로, 이것은 2003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갱신하기 전까지 역대 1위였다.
4. 은퇴 후
은퇴 후 다시 간사이로 돌아와 1993년부터 2005년까지 아사히 방송의 전속 해설가로 활약했고,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9년 간사이 독립리그의 오사카 호크스 드림의 총감독으로 취임했고, 이 시기 김실을 감독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2011년 6월 김실이 사기 혐의로 구속되면서 감독대행에 취임해 같은 해 9월까지 감독대행을 맡은 뒤 팀을 떠났다.
현재는 지병[15] 으로 인해 요양을 하면서 프리랜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5. 에피소드
- 난카이, 오릭스 시절 간사이 지역에서 열리는 경기는 대부분 나라현의 자택에서 구장까지 전철을 갈아타면서 통근했다고 한다. 2종 운전면허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운전을 하다보면 피곤해져서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전철 통근을 고집했다고 한다. 당시가 한신난바선이 개통되기 전이어서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까지 최소 2번은 환승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흠좀무.
- 일본프로야구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큰 자리수의 등번호에서 시작해 주전을 차지하면서 작은 수의 등번호를 다는 반면, 카도타의 경우 커리어 내내 등번호 자릿수가 커진 일본프로야구에서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입단 초기 9년간 등번호 27을 달았고, 잠시 44번을 달았다가 난카이의 마지막해인 88년까지 60번[16] 을 달았다. 난카이를 떠난 뒤 오릭스에서는 78번을 달았었고, 커리어의 종착역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는 53번을 달았다.
- 현역 시절 팀 동료였던 외국인 타자 부머 웰즈가 자신의 홈런을 축하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는데 부머가 2m, 110kg가 넘는 거구에 괴력의 소유자라 하이파이브 하다가 무지막지한 부머의 힘때문에 한쪽 어깨가 탈구되는 황당부상을 겪었다.(...) 결국 3년뒤에 후쿠오카에서 헤이와다이 구장 고별경기겸 은퇴시합을 치루고 부머와 같은해 은퇴했다. 여담으로 부머의 사위가 한국인이다.
- 요네다 : 한큐는 자금 지출에 소극적이었으며 계약 갱신 시 전례가 없다, 전례를 깰 것이냐라며 선수들과 항상 싸웠다.
- 스즈키 : 간사이 3개 구단 중 월급은 난카이가 제일 좋았음. 오사카 구장에 가보면 노무라 카츠야를 비롯한 주력들은 모두 외제차를 보유했으나. 킨테츠는 겨우 토요타 코로나를 탔다.
- 카도타 : 그렇지 않다.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을 때 고치 캠프에 들 것이 없어서 문짝(!)에 실려 옮겨졌다. 그런 환경에서 야구를 하던 팀이었으니 구단이 돈이 많다고는 생각이 안 된다.
- 카도타 : 센트럴리그와 격차는 분명히 있다. TV 중계도 없고, 신문 기사에 실리는 것은 경기 결과 뿐.
- 요네다 : 퍼시픽리그는 화제 만들기에 필사적이었다. 후쿠모토 유타카와 말을 경주하는 이벤트까지 할 정도 였다.
- 카도타 : 퍼시픽리그의 구장들은 더러웠다. 난카이 2군 구장은 특히 프로가 사용할 구장이 아니었다. 2군으로 강등되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경우 후지이데라 구장, 일본생명 구장을 썼는데 특히 일본생명 구장은 홈팀만 라커룸을 사용하고 있어 원정팀은 더러운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옷을 갈아입곤 했다. 그게 미안했다.
- 요네다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은 너무 좁았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 모두 절구 모양으로 생겨서 좁고 야유가 잘 들렸다.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은 반대로 넓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있어서 있는지 야유도 상냥했다.
- 요네다 : 벤치의 목소리보다 스탠드의 조롱이 더 컸다.
- 카도타 : 모두 전철회사 구단들이라 오너들끼리 경쟁은 대단했다.
- 스즈키 : 킨테츠의 천황이라고 불렀다. 킨테츠 오너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중진이고 어디보다도 윗자리에 앉는다. 근데 팀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게 굴욕이었고 "올해야말로"를 연발하셨다. 노력해야겠다 생각했다.
- 요네다 : 전철회사 구단에서 뛰어서 좋은 건 사원증을 이용해 마음껏 전철을 탈 수 있다는 것. 경기 때 늘 기차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신년회를 함께 해서 그것이 인연으로 3명의 선배가 단원들과 결혼했다. 한큐에서 자랑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 스즈키 : 한큐가 매각됐을 때 사철회사가 구단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다. 옛 시대의 종언이었다.
- 카도타 : 오사카 구장 그라운드에 주택 전시장을 만들었을 때는 슬펐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