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모토 유타카

 


[image]
성명
후쿠모토 유타카 (福本 豊)
생년월일
1947년 11월 7일 (77세)
출생지
오사카 부 오사카 시 이쿠노 구
학력
다이테츠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
지도자 경력
오릭스 블루웨이브 타격,주루코치 (1989)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감독 (1990 ~ 1991)
한신 타이거스 타격코치 (1998)
한신 타이거스 외야수비, 주루코치 (1999)
'''1976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MVP)'''
1975년
야마구치 타카시
(한큐 브레이브스)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브레이브스)'''

1977년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color=#373a3c> '''1972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MVP)'''
1971년
나가이케 토쿠지
(한큐 브레이브스)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브레이브스''')

1973년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color=#373a3c> '''1970~1982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69년
사카모토 토시조
(한큐 브레이브스)
47도루

'''후쿠모토 유타카[1]
(한큐 브레이브스)'''

1983년
오오이시 다이지로
(킨테츠 버팔로즈)
60도루
'''연도별 최다 도루 기록'''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75도루
67도루
106도루[2]
95도루
94도루
63도루
62도루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color=#373a3c>
61도루
70도루
60도루
54도루
54도루
54도루

1. 소개
2. 프로 입문 전
3. 전설로 남은 프로 시절
3.1. 주요 활약들
3.2. 타 구단들의 공략 시도
3.3. 은퇴
4. 은퇴 이후
5. 이모저모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야구 해설가.
'''13년 연속 도루왕''',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 '''세계 최초의 1,000도루'''[3]를 기록하며 현역 시절 도루 관련 일본, 세계기록을 독식한 쇼와 시대의 대표적 1번타자이자 입단동기였던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의 상징. 이 둘은 최후마저 함께했다.
똑같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통산 기록을 돌파하고도 인정받지 못했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는 달리, 후쿠모토는 훗날 리키 핸더슨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인정하는 '세계의 도루왕'으로 남았다. 방망이의 재질, 구장 크기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 홈런과는 달리, 야구 경기장의 루상 거리는 세계 어디든지 27.432미터(90피트)니까.

2. 프로 입문 전


오사카 다이데쓰고등학교[4] 3학년 때 고시엔 본선에 참가했으나, 자신의 실책성 수비로 인해 아키타고와의 1회전에서 패한 흑역사가 있다.
고교 졸업 이 후 마쓰시타 사회인야구[5]에 입사, 입사 3년차인 1968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지역 라이벌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 야구부의 보강선수[6]로 출전해 후지제철 히로하타공장의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하고 본인도 대회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

3. 전설로 남은 프로 시절


196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7위[7]로 지명되어 프로에 입문한다. 이 때의 입단동기로 야마다 히사시(1위), 가토 히데지(2위)[8] 가 있는데, 후쿠모토를 포함한 세 명이 명구회에 가입할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3.1. 주요 활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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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모토의 타격 모습)
첫 해에는 대주자, 대타 등으로 주로 나오는데 만족했으나, 입단 2년차인 1970년에 타격에 눈을 뜨면서[9] 2할 7푼 4리의 타율에 '''75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도루왕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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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에 성공하는 모습. 그는 선수 시절 이런 모습을 1,000번도 넘게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도루 관련 각종 신기록을 세우고, 한큐를 일본시리즈 3연패로 이끌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 화려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 통산도루: 1,065개(NPB 역대 1위)
  • 시즌 최다 도루: 106도루(NPB 역대 1위)
  • 도루왕: 1970년~1982년(13년 연속, NPB 역대 1위)[10]
  • 통산 3루타: 115개(NPB 통산 1위)
  • 통산 1회 선두타자 홈런[11]: 43개(NPB 통산 1위)
  • 통산 2루타: 449개(NPB 통산 2위, 퍼시픽리그 통산 1위)
  • 통산 득점: 1656점(NPB 통산 2위, 퍼시픽리그 통산 1위)
  • 퍼시픽리그 MVP: 1972년[12]
  • 다이아몬드 글러브[13]: 1972~83년(12년 연속, NPB 통산 1위)
  • 규정타석(403타석[14]) 17년 연속 만족(1970년~1986년)
  • 외야수 풋아웃 : 5102개(NPB 통산 1위)
  • 외야수 수비 기회 : 5272개(NPB 통산 1위)
  • 일본시리즈 MVP: 1976년
  •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 1977, 1984년
  • 일본시리즈 타격상: 1976년
  • 일본시리즈 기능상: 1975년
  • 최다안타[15]: 1973, 1974, 1977, 1978년(통산 4회)
  • 퍼시픽리그 베스트나인[16]: 1972~1974년, 1976~1982년(통산 10회)
  • 올스타전 MVP: 1973년 제1차전, 1974년 제2차전, 1982년 제1차전(통산 3회)
  • 20-20 클럽 가입: 1980년(20홈런-54도루)
  • 야구전당 헌액 : 2002년
  • 명구회 가입: 1983년(통산 2000안타 달성)
한편으로 도루 관련 신기록도 계속 써나갔는데, 1977년 7월 6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개인통산 597번째 도루를 성공하면서 난카이 호크스히로세 요시노리의 종전 일본기록을 깼고[17],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즈 전에서는 939번째 도루를 성공하며 루 브록의 메이저리그 기록(938개)을 깼으며, 그후 계속해서 도루 수를 늘린 끝에 1984년 8월 7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마침내 세계 최초로 '''개인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다.''' 다만 현역 시절 많은 도루를 한 만큼 도루사도 '''299번'''으로 NPB 통산 1위다. 통산 도루성공률은 78%로 준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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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00도루 성공을 기념하는 모습)

3.2. 타 구단들의 공략 시도


당대 최고의 도루왕이었기 때문에, 각 구단마다 그의 도루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음은 다른 팀에서 연구한 후쿠모토의 도루 저지 방법들이다.
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 후쿠모토의 도루는 난카이에게 매우 현실적인 골칫거리였다. 당시 난카이의 감독 겸 주전 포수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후쿠모토의 도루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현대 야구에서 널리 투수에 사용되는 슬라이드 스텝[18] 을 고안하여 야구를 한 단계 진화시켰다. 그 이전에도 노무라는 후쿠모토를 다음 이닝의 선두 타자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9번타자에 주로기용되는 투수에게 볼넷을 내준 다음 1번타자를 주로 맡은 후쿠모토와 승부했다.[19]
후쿠모토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홈에서 2루에 송구를 일부러 원바운드로 던져 다리에 부딪히게 하는 것도 생각했다. 최초 시도는 성공했지만, 2번째 시도에서는 목적이 발각되어,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인 니시모토 유키오가 투수에게 도루를 지시했다. 다리에 일부러 공을 던져 부상을 입히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공이 후쿠모토의 허리를 때리는 바람에 난감해졌다.
센트럴리그였고, 당시에는 리그간 교류전도 없어서 정규 시즌에는 한큐와 직접 상대할 일이 없었다. 때문에 위에 나온 난카이에 비해서는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대신 일본시리즈에서 한큐와 대결하는 것을 상정하고, 투수가 1루 견제 시 일부러 악송구를 던지고 1루 쪽 펜스에 맞고 나오는 볼을 2루에 던져 후쿠모토를 아웃시키는 걸 연습했으나 실전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주전 포수 모리 마사히코는 1971년 일본시리즈 직전 2루 베이스에 도루 저지 송구를 던져 맞히는 연습을 반복했다. 모리 자신이 투수에서 받은 공을 2루 베이스로 겨냥해 송구하고 2루수가 2루 베이스에서 포구 한 곳에 후쿠모토의 다리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형태로 보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전략은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성공했다. 후쿠모토는 일본시리즈에서 도루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은 당시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호리우치 츠네오의 존재가 컸다고 회고 하고 있다.

한큐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팀으로서,난카이 못지 않게 후쿠모토의 도루가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주전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는 2루 송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후쿠모토가 출루하면 오른 발을 반 보 내려두고 있었다고 한다. 한큐와 긴테쓰의 게임 전에 후쿠모토와 나시다 어느 쪽이 이기는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후쿠모토는 알려진 습관이 없는 투수에게도 습관을 알아채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강한 어깨를 가진 나시다에게도 후쿠모토가 이긴 적이 많았다. 후쿠모토는 "도루를 허용하는 것은 투수의 책임이 70%, 포수가 30%"라고 말하고 있다.

3.3. 은퇴


그러나 이 기록의 사나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만으로 40세가 된 1987년에 불과 6도루에 그치더니,[20] 이듬해인 1988년에는 데뷔 이래 가장 적은 3도루에 그쳤다. 이렇게 입지가 좁아지던 도중 구단이 한큐에서 오릭스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말실수가 그를 은퇴로 내몰았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홈경기이자 해단식이 있는 1988년 10월 23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시합에서, 경기를 마치고서 우에다 감독이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야마다(히사시), 그리고 남아있을 후쿠모토"라고 말해야 되는 것을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잘못 말했고, 이 발언이 선수단, 팬들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퍼져나가며 엄청난 논란이 되어버리면서 결국 후쿠모토는 '''"감독님(우에다)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은퇴하겠다."'''고 말하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접는다.
다만 은퇴 후 후쿠모토가 인터뷰에서 본인의 은퇴에 대해 말한 걸 보면 우에다의 말실수만으로 은퇴를 정한 건 아닌데, 말년에 기량 저하로 인해 주루실력이 감퇴하면서 출루하더라도 벤치에서 "도루하지 말고 기다려라" 라고 지시하면서 도루수가 급감한 것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게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결정적으로 우에다의 말실수 이전에 지인들에게 "올해(1988년)를 끝으로 은퇴하겠다" 말했다는 증언도 나온 걸 보면 이미 본인이 은퇴를 확실하게 결정했던 것 같다.[21] 우에다의 말실수는 후쿠모토의 결심에 쐐기를 박은 셈이고..[22]
아무튼 그렇게 은퇴선언을 한 뒤, 한큐에서 오릭스로 구단이 바뀐 이듬해인 1989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오랫동안 한큐에서 함께 뛰어온 동료 야마다 히사시와 합동 은퇴식을 치르며 영광의 선수생활의 막을 내렸다.[23][24]
은퇴할 때까지 그가 기록한 도루는 총 1,065개였다. 이 기록은 그가 은퇴한 4년 후인 1992년 6월 16일, 리키 헨더슨에 의해 깨졌으며 후쿠모토는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넘어선 경기에 등장해 시구식을 하였다. 그날 헨더슨이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자 후쿠모토는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이에 헨더슨은 보답으로 그에게 기록경신 때 훔친 2루 베이스를 주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상단 각주에 적힌 것처럼 오릭스의 1군 타격코치 겸 주루코치로 임명되어 오릭스를 1989시즌 팀 타율 1위로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후 1990~1991년엔 2군 감독을 맡았으며 이후 오릭스를 떠난다.
이 후 야구해설가로 일하다가 1998년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로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이후 이듬해인 1999년엔 외야수비, 주루 코치로 보직을 옮겼으나 '''"안타를 못 치면 주전이 될 수 없고, 주전이 될 수 없으면 출루도 할 수 없고, 출루를 할 수 없으면 도루도 할 수 없다."'''라는 지론에 따라 선수들의 타격에 간섭하는 바람에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분노를 사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근데 저 지론은 지극히 상식적이긴 하다.
현재는 아사히 방송의 야구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에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해설자로서는 헤드 슬라이딩과, 견제구 때 손부터 귀루하는 것 등에 대해 "부상의 위험성이 크다" 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플레이로 유명했던 아카호시 노리히로에 대해 '''"잘하는 수비수는 점프 안하고 낙하지점에서 그냥 잡는다"''', '''"부상 위험성이 높아진다"''' 등으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25] 근데 정말, 후쿠모토의 말대로 아카호시는 다이빙 캐치 중 당한 치명적인 목, 척추 부상으로 엄청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고 만다..
그 외에도 나가시마 시게오 마냥 기상천외한 의성어를 말하는 것이나 우스갯소리를 자주 하는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아예 일본 위키백과의 후쿠모토 항목엔 "후쿠모토 어록" 이 따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

5. 이모저모


  • 야구만화 원아웃에 등장하는 데니스 존슨의 모델이다.[26] 실제로 작중에서 토쿠치 토아가 존슨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은 후쿠모토 유타카를 막아내기 위해 실제로 쓴 방법들로 당시 파리그 포수들은 후쿠모토의 도루를 막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가동했다고.
  •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용되는 쿠세(버릇)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선수이다. 입단당시만 해도 워낙 주루센스가 형편 없었기에 이대로는 곧 은퇴하겠지라는 생각에 추억을 남기기 위해 비디오를 녹화해 달라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그 비디오를 유심히 보다 우연히 견제와 공을 던질때의 동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후로 투수들이 견제를 하는 동작과 던지는 동작의 버릇찾기에 몰두. 이후 투수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후쿠모토가 전설적인 도루왕이 되면서 너도나도 후쿠모토의 방법을 따라하게 되었고 쿠세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역으로 후쿠모토를 잡아내기 위해 비슷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 노무라 카츠야였고, 결국 이러한 연구들은 노무라 특유의 'ID 야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 쿠세와 관련하여 스즈키 케이시와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코치였던 칸베 토시오의 쿠세만큼은 찾아내기가 힘들어서 비디오를 수없이 반복하여 본 결과 칸베 토시오는 축을 2mm정도 움직이면 투구, 스즈키 케이시는 눈이 타자쪽으로 가면 견제 주자 쪽으로 가면 투구라는(...) 비범한 쿠세를 찾아내었으나 호리우치 츠네오만큼은 결국 쿠세를 찾아내지 못 해 일본시리즈에서 발이 꽁꽁 묶일 수 밖에 없었다.
  • 사회인 시절부터 팔꿈치 부상이 있었기에 입단 초창기에는 수비가 엉성해서 만세를 한 채 머리위에 날아가는 공을 놓치는 경우도 잦았다. 하지만 매일 200개 가까운 노크로 훈련을 거듭한 결과, 은퇴 할 당시에는 개인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는데, 아내는 야구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후쿠모토를 야구 좋아하는 회사원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게 된 것을 "나 마츠시타에서 한큐로 옮긴다"고 간단히 얘기했는데, 아내는 한동안 후쿠모토가 한큐 역무원으로 취업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아내는 나중에 한큐의 각 역마다 남편을 찾으러 다녔다가(!) 역무원에게 자신의 남편이 '한큐에서 일하는 후쿠모토'라고 이야기했더니, 그 역무원이 "당신이 찾는 사람이 설마 그 도루왕 후쿠모토 아닌가요?"라고 되물은 뒤에야 자신의 남편이 프로야구 선수인 걸 알게 되었다고.
  • 그의 아버지는 다른 구단 계열의 식당 직원이었는데, 후쿠모토의 한큐 입단 후 입단에 대한 은혜를 느껴서 퇴직했다고 한다.
  • 도루왕 3연패와 단일시즌 100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1972년, 양다리에 1억엔의 상해보험을 들었다. 이 보험은 후쿠모토가 은퇴할 때까지 계약이 갱신되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탁월한 주루센스로 부상없이 선수생활을 계속한 터라 후쿠모토가 보험금을 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별명 중엔 "1억엔의 다리"란 별명이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27]
  • 당시 관중동원에 어려움을 겪던 퍼시픽 리그의 사정과 그를 타개하고자 했던 구단 측의 기묘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일화로, 1983년에 있었던 후쿠모토 대 의 달리기 시합 이벤트가 있었다. 기사 소개 영상. 9분 10초부터. 후쿠모토와 경주마 외에 메이저리그 통산 196도루를 기록한 한큐의 외국인 선수 범프 윌스가 참가했는데, 결과는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의 인조잔디 그라운드의 감촉에 당황한 경주마가 기수의 말을 듣지 않고 우왕좌왕하며 일찌감치 탈락한 끝에 윌스가 승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벤트당시 어느 프런트 직원이 미노다 고지를 설사유망주(...)라고 조롱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미노다는 불참했고 결국 87시즌 직후 미노다 고지가 원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당시 최신형 신칸센 300계 차량 기준으로도 고베에서도 3시간 넘게 걸리는 도쿄에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내쫓아버렸다. 미노다는 대신 도쿄돔 개장경기인 한신전 시범경기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홈런을 날렸다. 이후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의 우승에 일조한 후 은퇴한다.
  •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기록을 깼을 때 국민영예상 수상이 검토되었으나 "노상방뇨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비범한 이유로 거부한 적이 있다.기사 보다 정확히는 후쿠모토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성격에 사적으로도 마작이나 술담배를 좋아하거나 했던지라, 행실에서도 타의 모범이 되었던 오 사다하루마냥 전국민적인 동경을 살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1] 무려 13년 동안이나 도루왕을 지켰다. 이는 수상 횟수, 연속 수상이라는 의미에서 둘 다 세계기록이다.[2]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다 시즌 도루 기록이자 유일한 시즌 100도루 기록[3] 전 세계의 프로야구리그를 통틀어서 1,0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후쿠모토 유타카와 리키 헨더슨 2명 뿐이다. 심지어 둘은 루 브록의 기존 세계 1위 도루 기록을 경신할 때도 똑같이 3루 베이스를 훔쳤다![4] 현재 한난대학고등학교(阪南大学高等学校). 강타자 도이 마사히로가 그의 고교 선배다.[5] 현재는 파나소닉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 이름은 마쓰시타였다.[6]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진출팀이 지역예선 탈락팀의 에이스 3명을 본선기간 동안 임대선수로 쓰는 제도. 올림픽의 와일드 카드제 생각하면 이해가 갈듯 싶다.[7] 요즘이라면 최종순위 지명도 될 수 있을만한 순위이지만 이 해 한큐는 무려 15순위까지 선수를 지명했고 그 중 9명이 입단을 거부했다. 입단을 거부한 선수들 중 12순위로 지명된 카도타 히로미츠가 있었는데, 카도타는 다음 해 2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지명되어 프로 선수가 된다.[8] 1948년생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의 1루를 오래 지켰다. 1969~1987년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타율 0.297, 347홈런, 2,055안타, 1,268타점을 기록하였다. 재직한 팀들은 한큐(1969~1982), 히로시마(1983), 킨테츠(1984~1985), 거인(1986), 그리고 난카이(1987)였다. 1975년에는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혔다.[9] 입단 당시만 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주루센스가 워낙 형편 없었기에 땅볼을 치고 내야안타를 만들겠다는 타격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당대의 타격 이론가이자 철권통치의 대명사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매를 벌었으나, 1970년 스프링캠프에서 동료로부터 빌린 일명 '타이 콥 배트'로 프리배팅을 하다가 라인드라이브성 장타를 치고서는 타격폼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20클럽에도 가입을 한적이 있고, 통산홈런갯수가 200개가 넘는다. 슬래시라인도 .291/.379/.440 OPS .819로 리드오프로서는 아주 더할나위 없는 타자였다.[10] 13년 연속수상 또한 역대 1위 기록이며, 이 기록은 1983년 긴테츠 버팔로즈오이시 다이지로가 60개의 도루를 기록해 도루왕을 차지하며 멈췄다. 그리고 후쿠모토는 이후 다시는 도루왕을 수상하지 못했다.[11] 1회(초/말 공통)에 1번 타자, 즉 팀에서 맨 먼저 타석에 서는 선두타자로 나와서 친 홈런을 말한다.[12] 위에 나오듯 이 해 세운 NPB 최초의 한 시즌 세자릿수 도루인 106도루의 기록은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이 요원한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13] 골든글러브란 명칭은 1986년부터 사용[14] 후쿠모토의 현역생활 당시엔 130시합 제도였으니 규정타석은 130시합 × 3.1 = 403타석이 된다.[15] 당시엔 연맹표창이 없었다. 1994년부터 표창.[16] 수비를 평가하는 골든글러브와 달리 이쪽은 타격 성적을 주로 평가한다.[17] '''심지어 히로세는 이때까지 멀쩡히 현역으로 뛰던 상황이었다!''' 히로세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한 후 영 좋지 않은 사정으로 해임된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난카이 감독에 부임한다. [18] 퀵모션은 콩글리시이다.[19] 당시 퍼시픽리그는 아직 지명 타자 제도 도입 전이었다.[20] 이 해 386타석만 기록하며 1970년부터 17년이나 이어지던 '''규정타석 연속 만족'''도 끝나게 되고 말았다.[21]한큐 구단이 오릭스에게 매각된다는 소식이 보도된 후, 최종전 전날 구단 프런트에게 코치 전임을 제안받았는데, 본인은 자유계약으로 방출시켜 주거나 플레잉 코치로 뛰게 해주길 바랬지만 거절당하고 임의탈퇴 처리될 상황까지 되자, 어차피 한큐 구단도 없어지고 지인의 조언도 있어서 그냥 은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22] 덤으로 본인은 '''"체력적으론 3년 정도는 더 뛸만 했지만, 은퇴번복을 하기 귀찮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밑에 아내와의 일화를 보면 귀차니즘이 강한 듯..[23] 이 때 둘이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은퇴 퍼포먼스를 한 뒤, 오릭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코치를 보는 독특한(?) 상황을 만들었다. 야마다 히사시의 마지막 삼진 허용타자는 같은팀 동료였던 미노다 고지였다. 미노다는 같은 해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대역전 우승의 주역이 되면서 이듬해에 은퇴했다.[24] 이날 요미우리의 선발투수 고다 이사오는 오릭스의 용병 거포 부머 웰즈에게 난타당했지만, 그해 일본시리즈에서는 혼자 2승을 차지해 팀의 대역전 우승에 기여하였다.[25] 물론 아카호시가 싫어서 그랬던건 전혀 아니다. 한신코치시절 엄청나게 총애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돌직구를 거침없이 날릴수 있었다.[26] 작중에서 데니스 존슨은 육상선수 출신으로 수비에 능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입단 초기의 후쿠모토 유타카의 수비가 이랬다고 한다. [27] 그리고 후쿠모토의 1억엔 보험 가입 소식을 접한 최동원의 부친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최동원에게 어깨 상해보험을 들게 했다. 최동원의 부친은 당시 일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던 부산의 사정도 있고 해서 일본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호리우치 츠네오의 드롭커브를 모티브로 최동원의 커브를 단련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