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쇼 다케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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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전후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였던 한편 난카이 호크스 소속이던 벳쇼를 빼가기 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템퍼링을 시도하다가 일본 야구계를 뒤흔드는 큰 소동으로 이어졌고, 그렇지 않아도 당시 일본 야구계를 시끄럽게 하던 마이니치 오리온즈의 창단 문제로 인한 각 구단 간의 갈등이 이 사건을 통해 더욱 부채질 되면서 단일 리그이던 일본 프로야구가 둘로 쪼개지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키가와 중학교의 에이스였던 벳쇼는 1941년 제18회 전국 고교야구 선발대회에 출전하였고, 당시 타선에서 맹 활약한 '''아오타 노보루'''와 마운드의 벳쇼가 소속한 다키가와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러나 기후 상업중학교와 맞붙은 준준결승 9회초 공격에서 아오타 노보루가 친 땅볼을 상대 팀 3루수가 악송구한 틈을 타 1루 주자였던 벳쇼가 홈까지 파고들다 포수와 충돌하면서 왼쪽 팔꿈치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벳쇼는 다친 팔꿈치를 삼각건으로 고정한 채 글러브도 끼지 않고 포수가 굴려주는 공을 받으며 오른팔만으로 계속 던지면서 3과 3분의 1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텼지만, 연장 12회말 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바뀐 투수가 연장 14회말 기후에게 끝내기 결승점을 허용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학교는 졌지만 다음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고베 판 1면에 '''"울지마라 벳쇼, 선발 대회의 꽃이었다"''' 라는 기사를 올리며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중학교 졸업 후 벳쇼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지망했지만 공교롭게도 게이오대가 야구 특기생 제도를 없애는 바람에 니혼대학으로 진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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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가을, 벳쇼는 도쿄에서 알게 된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권유로 도쿄 교진군과 입단 계약을 맺었지만, 어머니와 형이 벳쇼를 고향인 고베와 멀리 떨어진 도쿄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여 오사카 연고의 난카이군과 계약하였다. 교진군 측은 연맹 측에 이중계약 이라며 제소했지만 연맹은 친권자의 계약을 우선한다는 터무니 없는 판결을 내리면서 벳쇼는 '''눈물을 머금고''' 난카이 유니폼을 입었다. 이는 후일 일본 프로야구계를 뒤흔들 이른바 '''벳쇼 빼내기 사건'''의 복선#s-2이 되었다...
입단 첫 해에는 2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2.08에 그쳤지만, 2년차인 1943년 5월 26일 대 '''야마토군'''[5]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5월 30일 야마토군과의 경기는 아쉽게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놓쳤지만 1피안타 완봉으로 틀어막으며 승리를 거두는 등 활약을 보이면서 그 해 '''45경기, 14승 23패, 128탈삼진, 평균자책 2.25'''를 거두며 난카이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휴식기를 거쳐 프로야구 리그가 재개된 1946년, 벳쇼는 '''그레이트링'''[6] 의 에이스로 19승에 평균자책 2.46을 기록하며 전후 최초의 리그 우승이자 난카이 구단 사상 첫 번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그 해 7월 15일 대 골드스타 경기에 등판한 벳쇼는 7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고 타석에서도 홈런과 3루타를 치는 맹타를 휘두르며 '''26대 0''' 이라는 최대 점수차 완봉승을 달성하였다.[7] 1947년 시즌 55경기에 등판하여 '''30승 19패, 191탈삼진, 평균자책 1.87'''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다승왕과 탈삼진 1위를 수상하고 '''한 시즌 47경기 완투'''라는 대기록도 수립했다.[8] 그리고 그 해 초대 사와무라상 수상자라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9]
1948년에도 26승 10패에 2점대 평균자책으로 호투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당시로서는 장신인 181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겸비한 미남 에이스로 팬들의 인기를 누렸지만, 그 해 시즌 종료 후 결국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벳쇼는 명실상부한 난카이의 에이스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정작 벳쇼에 대한 난카이의 처우는 다른 구단의 일류 선수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부족하여 당연히 벳쇼는 구단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했듯 벳쇼 본인은 중학교 시절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교진)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족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 부근의 난카이에 입단했다는 마음 속 앙금#s-1.3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야구 협약이나 통일 계약서 같은 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구단의 선수 보유권이 매우 애매하여 다른 구단들은 주력 선수들을 타 팀에 빼앗기지 않도록 풍족한 급여는 물론 집이나 승용차를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난카이는 벳쇼에게 그런 혜택은 커녕 '''"벳쇼는 아직 프로 경력이 짧다"'''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연봉마저 짜게 책정하고 있었다. 사실 구단의 모기업인 난카이 전기철도의 당시 자금사정이 그다지 원활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설령 구단 재정을 고려하려 해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대우가 이어지면서 벳쇼는 '내가 이 정도 대접을 받고 계속 여기서 뛰어야 하나?' 라는 고민과 난카이에 대한 염증#s-13만 날로 심해졌다.
한편 같은 시기 교진의 경우 후지모토 히데오, '''곤도 사다오''' 등 주력 투수들의 부상과 침체로 1946년 2위, 1947년 5위에 그치는 등 우승권과 거리가 있던 상황이라 전력을 강화할 대책이 필요했다. 마침 벳쇼가 난카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정보[10] 를 접한 교진은 1948년 시즌 도중 벳쇼와 은밀하게 접촉하여 '''"난카이보다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하겠다"'''며 교진 이적을 제안했고, 벳쇼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카이의 리그 우승으로 끝난 1948년 시즌 26승이란 호성적을 거둔 벳쇼는 연봉협상 자리에서 난카이 측에 '''연봉 인상 + 살림집 제공'''을 요구했다. 벳쇼는 "다른 팀은 주요 선수들에게 높은 연봉은 물론 집이나 승용차도 준다는데, 나도 집 정도는 마련해 달라"며 읍소했지만 난카이는 "집은 해주겠지만 연봉 인상은 No" 라며 거절하면서 협상은 어긋나버렸다. 이 협상 건으로 난카이 구단은 1월 17일, 벳쇼는 2월 9일에 일본 야구연맹에 서로를 제소하여 연맹 통제위원회가 조사를 실시했는데, 1948년 11월 27일 자로 교진이 벳쇼에게 10만엔을 빌려준 요미우리 신문 상무이사 '''무토 미츠노리''' 명의로 작성된 차용증을 발견했다. 이 증서에는 벳쇼가 교진에 입단한다는 전제 하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해석 가능한 내용과 벳쇼에게 도쿄 소재 살림집을 제공한다는 문구까지 기재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교진 측은 1948년 시즌 중에 벳쇼와 접촉한 사실을 실토했다.[11]
결국 연맹은 조사를 거쳐 엄연히 난카이 소속인 벳쇼에 대해 템퍼링을 저지른 교진에게 벌금 10만엔을 부과했지만 이미 마음이 천리는 달아나 버린 벳쇼는 난카이와의 계약을 계속 거부하였고, 연맹 통제위원회는 1949년 3월이 되어서야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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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으로 이적한 벳쇼는 2개월 출장 정지 후 그라운드로 복귀, 그 해 14승을 거두며 교진의 기대에 부응했고 1950~1952년, 1954~1956년 시즌 각각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빛나는 활약을 보였다. 1952년 6월 15일 쇼치쿠 로빈스와의 오사카 원정 경기에서 9회말 2사까지 쇼치쿠 타선을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책에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었지만 대타로 나온 '''칸자키 야스타카'''[13] 에게 빗맞은 내야 안타를 허용하는 바람에 아깝게 퍼펙트 게임을 놓치기도 했다.[14] 이후 오랫동안 교진의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1952년(33승), 1956년(27승) 다승왕을, 1955년(1.33) 평균자책 1위를 차지했고 교진의 1951~1953년, 1955년 일본시리즈 제패와 센트럴 리그 우승 8회에 큰 공을 세웠다.
1958년 교진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벳쇼는 9승에 그치며 13년간 지속되던 그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시즌이 중단되었고, 구단과의 계약 협상 시 '''1959년 시즌 35경기 등판 보장'''을 옵션에 넣도록 요청했지만 '''선수의 기용은 감독의 전권 사항''' 이라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생각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매스컴까지 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벳쇼의 등판 수는 26경기로 줄었고, 통산 '''294승'''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에서 앞으로 7승 남은 빅토르 스타루힌의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 기록인 '''301승'''[15] 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이듬해 등판 경기수를 확보해 두자는 요량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벳쇼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미즈하라에게 고개를 숙였고, 미즈하라도 가능한 벳쇼의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벳쇼의 옵션 파동은 일단락 되었다.
벳쇼는 1959년 시즌 7승으로 스타루힌의 (당시)기록 '''301승'''과 타이를 이루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2번째로 통산 300승을 돌파'''했고, 1960년 4월 29일 통산 302번째 승리를 거두면서 스타루힌을 뛰어넘었다.[16] 1960년 9승을 보탠 벳쇼는 시즌 종료 후 선수 겸 1군 투수 코치로 계약했지만 1961년 시즌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고 같은 해 취임한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휘하에서 코치로만 활동하면서 교진 선수들에게 이른바 도깨비 군조(鬼軍曹)로 불릴 만큼 엄하게 투수들을 가르쳤고, 교진의 6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61년을 마지막으로 벳쇼는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가 거둔 통산 310승은 은퇴 당시만 해도 일본 최다승 기록이었지만 벳쇼가 은퇴한 지 불과 2년 뒤인 1963년, 고쿠데츠 스왈로즈 소속이던 카네다 마사이치가 벳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벳쇼가 교진 시절 거두어들인 221승은 현재까지도 구단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훌륭한 투수였지만 타격 실력도 만만치 않아서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 날은 야수로 경기에 나와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다. '''통산 500안타'''에 '''35홈런'''[17] 을 기록했고 생애 타율도 '''0.254''' 였으니 웬만한 수비형 야수보다 더 잘 치는 투수였던 셈이다...
벳쇼의 17시즌 간 현역 통산 기록은 투수로서 '''662경기 등판,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310승(역대 5위) 178패, 1934탈삼진, 평균자책 2.18'''에, 타자로서는 '''828경기 출장, 1972타수 500안타, 35홈런, 248타점, 182득점, 6도루, 타율 0.254''' 였다. 또한 정규시즌과 일본시리즈 MVP 각 2회, 사와무라상 2회,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6회를 수상하고 올스타전에 6회 출장하였다.
1962년부터 교진의 수석 겸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그 해 7월 나고야 원정 도중 투수 '''나카무라 미노루'''가 숙소에서 팀 동료인 '''호리우치 쇼''', '''이토 요시아키'''와 함께 당시 정규시즌 중에는 금지된 맥주를 마시다가 이를 발견한 벳쇼가 나카무라를 심하게 질책했는데 이것이 주간지 보도를 통해 벳쇼가 나카무라를 구타했다고 와전되며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구단 측에서는 이 사건으로 벳쇼에 대하여 근신 처분을 내렸으며,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은 벳쇼에게 2군 코치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카와카미는 이 일로 벳쇼를 팀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었고, 사건이 진정될 때 까지 당분간 1군에서 제외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정작 벳쇼는 카와카미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고 여겨 시즌 도중 코치직을 사임하고 교진을 나왔다.
1963년 TBS 해설가로 활동한 벳쇼는 교진 시절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권유를 받아 1964년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으나 3시즌 만인 1966년 시즌 종료 후 다이요에서 퇴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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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는 1967년 한 해 TBS에 해설가로 복귀했다가 1968년 산케이 아톰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3시즌 동안 팀 성적은 4-5-6위로 하위권에 머물렀고, 1970년 에는 11연패를 두 번이나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18] 감독으로서 전혀 수완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시즌 도중이던 그 해 8월 18일 해임당했다. 감독 재임 중 외국인 선수 루 잭슨이 1969년 5월 췌장염으로 사망하는 액운을 겪기도 했다.
그의 감독 성적은 '''342경기, 143승 190패 3무승부, 승률 0.429'''로 상당히 부진하다...
당시 아톰즈 소속이던 토요다 야스미츠가 뒷날 감독으로서의 벳쇼에 대해 말하길 "의욕만큼은 강한 편이었지만, 선수를 어떻게 가르치고 다루는 지는 잘 몰랐던 것 같고 그의 기분을 읽기도 힘들었다. 언젠가 고시엔에서 열린 한신과의 원정 경기 때 우리 팀 타선이 죽을 쑤는 통에 진 적이 있는데, 벳쇼 감독은 코치인 나에게[19] '''"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까지 뛰어가라고 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졌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감독이 시킨대로 하기는 했다. 그리고 타자들과 같이 숙소로 돌아와 보니 '''감독은 코치들과 마작을 하고 있었다(...)'''. 이런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같은 아톰즈의 투수로 활약한 '''마츠오카 히로무'''[20] 는 "무조건 '''달려라''' 만 외쳤다. 지금처럼 과학적인 트레이닝 체계가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쓰러질 때 까지 달렸다. 그래도 한편으로 '''부상 없이 1년을 던지기 위한 기초 체력을 3년 동안 만들었다''' 라는 생각은 들었다. 이런 식의 트레이닝으로 습관이나 능력이 아닌 체력 하나만큼은 확실히 다지기는 했으니까..." 라고 말하는 한편으로 "벳쇼 감독은 항상 '''교진을 이겨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신론만 내세우고 체력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이었다" 라는 인물평을 남겼다.
말하자면 벳쇼는, '''전형적인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 에 해당되는 야구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장에서 물러난 벳쇼는 후지 테레비, 분카 방송의 해설가와 '''닛칸스포츠''' 평론가로 일했고 1979년 '''야구 전당'''에 입성하였다. 1992년 부터는 카와카미 테츠하루의 뒤를 이어 교진 OB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9년 6월 24일, 자택에서 급성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1. 인물 개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전후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였던 한편 난카이 호크스 소속이던 벳쇼를 빼가기 위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템퍼링을 시도하다가 일본 야구계를 뒤흔드는 큰 소동으로 이어졌고, 그렇지 않아도 당시 일본 야구계를 시끄럽게 하던 마이니치 오리온즈의 창단 문제로 인한 각 구단 간의 갈등이 이 사건을 통해 더욱 부채질 되면서 단일 리그이던 일본 프로야구가 둘로 쪼개지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2. 학창 시절
다키가와 중학교의 에이스였던 벳쇼는 1941년 제18회 전국 고교야구 선발대회에 출전하였고, 당시 타선에서 맹 활약한 '''아오타 노보루'''와 마운드의 벳쇼가 소속한 다키가와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러나 기후 상업중학교와 맞붙은 준준결승 9회초 공격에서 아오타 노보루가 친 땅볼을 상대 팀 3루수가 악송구한 틈을 타 1루 주자였던 벳쇼가 홈까지 파고들다 포수와 충돌하면서 왼쪽 팔꿈치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벳쇼는 다친 팔꿈치를 삼각건으로 고정한 채 글러브도 끼지 않고 포수가 굴려주는 공을 받으며 오른팔만으로 계속 던지면서 3과 3분의 1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텼지만, 연장 12회말 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바뀐 투수가 연장 14회말 기후에게 끝내기 결승점을 허용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학교는 졌지만 다음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고베 판 1면에 '''"울지마라 벳쇼, 선발 대회의 꽃이었다"''' 라는 기사를 올리며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중학교 졸업 후 벳쇼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지망했지만 공교롭게도 게이오대가 야구 특기생 제도를 없애는 바람에 니혼대학으로 진학하였다.
3. 프로 시절
3.1. 난카이 호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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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가을, 벳쇼는 도쿄에서 알게 된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권유로 도쿄 교진군과 입단 계약을 맺었지만, 어머니와 형이 벳쇼를 고향인 고베와 멀리 떨어진 도쿄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여 오사카 연고의 난카이군과 계약하였다. 교진군 측은 연맹 측에 이중계약 이라며 제소했지만 연맹은 친권자의 계약을 우선한다는 터무니 없는 판결을 내리면서 벳쇼는 '''눈물을 머금고''' 난카이 유니폼을 입었다. 이는 후일 일본 프로야구계를 뒤흔들 이른바 '''벳쇼 빼내기 사건'''의 복선#s-2이 되었다...
입단 첫 해에는 2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2.08에 그쳤지만, 2년차인 1943년 5월 26일 대 '''야마토군'''[5]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5월 30일 야마토군과의 경기는 아쉽게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을 놓쳤지만 1피안타 완봉으로 틀어막으며 승리를 거두는 등 활약을 보이면서 그 해 '''45경기, 14승 23패, 128탈삼진, 평균자책 2.25'''를 거두며 난카이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휴식기를 거쳐 프로야구 리그가 재개된 1946년, 벳쇼는 '''그레이트링'''[6] 의 에이스로 19승에 평균자책 2.46을 기록하며 전후 최초의 리그 우승이자 난카이 구단 사상 첫 번째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그 해 7월 15일 대 골드스타 경기에 등판한 벳쇼는 7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고 타석에서도 홈런과 3루타를 치는 맹타를 휘두르며 '''26대 0''' 이라는 최대 점수차 완봉승을 달성하였다.[7] 1947년 시즌 55경기에 등판하여 '''30승 19패, 191탈삼진, 평균자책 1.87'''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다승왕과 탈삼진 1위를 수상하고 '''한 시즌 47경기 완투'''라는 대기록도 수립했다.[8] 그리고 그 해 초대 사와무라상 수상자라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9]
1948년에도 26승 10패에 2점대 평균자책으로 호투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당시로서는 장신인 181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겸비한 미남 에이스로 팬들의 인기를 누렸지만, 그 해 시즌 종료 후 결국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3.2. 벳쇼 빼내기 사건
벳쇼는 명실상부한 난카이의 에이스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정작 벳쇼에 대한 난카이의 처우는 다른 구단의 일류 선수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부족하여 당연히 벳쇼는 구단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했듯 벳쇼 본인은 중학교 시절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교진)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족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 부근의 난카이에 입단했다는 마음 속 앙금#s-1.3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야구 협약이나 통일 계약서 같은 것은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구단의 선수 보유권이 매우 애매하여 다른 구단들은 주력 선수들을 타 팀에 빼앗기지 않도록 풍족한 급여는 물론 집이나 승용차를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난카이는 벳쇼에게 그런 혜택은 커녕 '''"벳쇼는 아직 프로 경력이 짧다"''' 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연봉마저 짜게 책정하고 있었다. 사실 구단의 모기업인 난카이 전기철도의 당시 자금사정이 그다지 원활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설령 구단 재정을 고려하려 해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대우가 이어지면서 벳쇼는 '내가 이 정도 대접을 받고 계속 여기서 뛰어야 하나?' 라는 고민과 난카이에 대한 염증#s-13만 날로 심해졌다.
한편 같은 시기 교진의 경우 후지모토 히데오, '''곤도 사다오''' 등 주력 투수들의 부상과 침체로 1946년 2위, 1947년 5위에 그치는 등 우승권과 거리가 있던 상황이라 전력을 강화할 대책이 필요했다. 마침 벳쇼가 난카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정보[10] 를 접한 교진은 1948년 시즌 도중 벳쇼와 은밀하게 접촉하여 '''"난카이보다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하겠다"'''며 교진 이적을 제안했고, 벳쇼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카이의 리그 우승으로 끝난 1948년 시즌 26승이란 호성적을 거둔 벳쇼는 연봉협상 자리에서 난카이 측에 '''연봉 인상 + 살림집 제공'''을 요구했다. 벳쇼는 "다른 팀은 주요 선수들에게 높은 연봉은 물론 집이나 승용차도 준다는데, 나도 집 정도는 마련해 달라"며 읍소했지만 난카이는 "집은 해주겠지만 연봉 인상은 No" 라며 거절하면서 협상은 어긋나버렸다. 이 협상 건으로 난카이 구단은 1월 17일, 벳쇼는 2월 9일에 일본 야구연맹에 서로를 제소하여 연맹 통제위원회가 조사를 실시했는데, 1948년 11월 27일 자로 교진이 벳쇼에게 10만엔을 빌려준 요미우리 신문 상무이사 '''무토 미츠노리''' 명의로 작성된 차용증을 발견했다. 이 증서에는 벳쇼가 교진에 입단한다는 전제 하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해석 가능한 내용과 벳쇼에게 도쿄 소재 살림집을 제공한다는 문구까지 기재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교진 측은 1948년 시즌 중에 벳쇼와 접촉한 사실을 실토했다.[11]
결국 연맹은 조사를 거쳐 엄연히 난카이 소속인 벳쇼에 대해 템퍼링을 저지른 교진에게 벌금 10만엔을 부과했지만 이미 마음이 천리는 달아나 버린 벳쇼는 난카이와의 계약을 계속 거부하였고, 연맹 통제위원회는 1949년 3월이 되어서야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 * 난카이 : 벳쇼와의 우선 협상권을 10일 간 보장
> * 벳쇼 : 난카이와의 우선 협상기간 경과 후 어느 구단과도 자유계약 협상은 가능하지만, 타 구단으로 이적할 경우 1949년 시즌 개막부터 2개월 간 공식전 출전 금지
벳쇼는 끝내 난카이를 퇴단하여 교진 유니폼을 입었고, 이 때 이름을 아키라(昭) 에서 '''다케히코(毅彦)'''로 개명하며 새 출발을 다짐했다.[12]> * 벳쇼 : 난카이와의 우선 협상기간 경과 후 어느 구단과도 자유계약 협상은 가능하지만, 타 구단으로 이적할 경우 1949년 시즌 개막부터 2개월 간 공식전 출전 금지
3.3. 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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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으로 이적한 벳쇼는 2개월 출장 정지 후 그라운드로 복귀, 그 해 14승을 거두며 교진의 기대에 부응했고 1950~1952년, 1954~1956년 시즌 각각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빛나는 활약을 보였다. 1952년 6월 15일 쇼치쿠 로빈스와의 오사카 원정 경기에서 9회말 2사까지 쇼치쿠 타선을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책에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었지만 대타로 나온 '''칸자키 야스타카'''[13] 에게 빗맞은 내야 안타를 허용하는 바람에 아깝게 퍼펙트 게임을 놓치기도 했다.[14] 이후 오랫동안 교진의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1952년(33승), 1956년(27승) 다승왕을, 1955년(1.33) 평균자책 1위를 차지했고 교진의 1951~1953년, 1955년 일본시리즈 제패와 센트럴 리그 우승 8회에 큰 공을 세웠다.
1958년 교진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벳쇼는 9승에 그치며 13년간 지속되던 그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시즌이 중단되었고, 구단과의 계약 협상 시 '''1959년 시즌 35경기 등판 보장'''을 옵션에 넣도록 요청했지만 '''선수의 기용은 감독의 전권 사항''' 이라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생각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매스컴까지 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벳쇼의 등판 수는 26경기로 줄었고, 통산 '''294승'''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에서 앞으로 7승 남은 빅토르 스타루힌의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 기록인 '''301승'''[15] 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이듬해 등판 경기수를 확보해 두자는 요량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벳쇼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미즈하라에게 고개를 숙였고, 미즈하라도 가능한 벳쇼의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벳쇼의 옵션 파동은 일단락 되었다.
벳쇼는 1959년 시즌 7승으로 스타루힌의 (당시)기록 '''301승'''과 타이를 이루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2번째로 통산 300승을 돌파'''했고, 1960년 4월 29일 통산 302번째 승리를 거두면서 스타루힌을 뛰어넘었다.[16] 1960년 9승을 보탠 벳쇼는 시즌 종료 후 선수 겸 1군 투수 코치로 계약했지만 1961년 시즌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고 같은 해 취임한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휘하에서 코치로만 활동하면서 교진 선수들에게 이른바 도깨비 군조(鬼軍曹)로 불릴 만큼 엄하게 투수들을 가르쳤고, 교진의 6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61년을 마지막으로 벳쇼는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가 거둔 통산 310승은 은퇴 당시만 해도 일본 최다승 기록이었지만 벳쇼가 은퇴한 지 불과 2년 뒤인 1963년, 고쿠데츠 스왈로즈 소속이던 카네다 마사이치가 벳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벳쇼가 교진 시절 거두어들인 221승은 현재까지도 구단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훌륭한 투수였지만 타격 실력도 만만치 않아서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 날은 야수로 경기에 나와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다. '''통산 500안타'''에 '''35홈런'''[17] 을 기록했고 생애 타율도 '''0.254''' 였으니 웬만한 수비형 야수보다 더 잘 치는 투수였던 셈이다...
벳쇼의 17시즌 간 현역 통산 기록은 투수로서 '''662경기 등판,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310승(역대 5위) 178패, 1934탈삼진, 평균자책 2.18'''에, 타자로서는 '''828경기 출장, 1972타수 500안타, 35홈런, 248타점, 182득점, 6도루, 타율 0.254''' 였다. 또한 정규시즌과 일본시리즈 MVP 각 2회, 사와무라상 2회,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6회를 수상하고 올스타전에 6회 출장하였다.
4. 지도자 시절
4.1. 코치 시절
1962년부터 교진의 수석 겸 투수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그 해 7월 나고야 원정 도중 투수 '''나카무라 미노루'''가 숙소에서 팀 동료인 '''호리우치 쇼''', '''이토 요시아키'''와 함께 당시 정규시즌 중에는 금지된 맥주를 마시다가 이를 발견한 벳쇼가 나카무라를 심하게 질책했는데 이것이 주간지 보도를 통해 벳쇼가 나카무라를 구타했다고 와전되며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구단 측에서는 이 사건으로 벳쇼에 대하여 근신 처분을 내렸으며,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은 벳쇼에게 2군 코치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카와카미는 이 일로 벳쇼를 팀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었고, 사건이 진정될 때 까지 당분간 1군에서 제외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정작 벳쇼는 카와카미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고 여겨 시즌 도중 코치직을 사임하고 교진을 나왔다.
1963년 TBS 해설가로 활동한 벳쇼는 교진 시절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권유를 받아 1964년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으나 3시즌 만인 1966년 시즌 종료 후 다이요에서 퇴단했다.
4.2.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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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는 1967년 한 해 TBS에 해설가로 복귀했다가 1968년 산케이 아톰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3시즌 동안 팀 성적은 4-5-6위로 하위권에 머물렀고, 1970년 에는 11연패를 두 번이나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18] 감독으로서 전혀 수완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시즌 도중이던 그 해 8월 18일 해임당했다. 감독 재임 중 외국인 선수 루 잭슨이 1969년 5월 췌장염으로 사망하는 액운을 겪기도 했다.
그의 감독 성적은 '''342경기, 143승 190패 3무승부, 승률 0.429'''로 상당히 부진하다...
당시 아톰즈 소속이던 토요다 야스미츠가 뒷날 감독으로서의 벳쇼에 대해 말하길 "의욕만큼은 강한 편이었지만, 선수를 어떻게 가르치고 다루는 지는 잘 몰랐던 것 같고 그의 기분을 읽기도 힘들었다. 언젠가 고시엔에서 열린 한신과의 원정 경기 때 우리 팀 타선이 죽을 쑤는 통에 진 적이 있는데, 벳쇼 감독은 코치인 나에게[19] '''"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까지 뛰어가라고 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졌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감독이 시킨대로 하기는 했다. 그리고 타자들과 같이 숙소로 돌아와 보니 '''감독은 코치들과 마작을 하고 있었다(...)'''. 이런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라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같은 아톰즈의 투수로 활약한 '''마츠오카 히로무'''[20] 는 "무조건 '''달려라''' 만 외쳤다. 지금처럼 과학적인 트레이닝 체계가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쓰러질 때 까지 달렸다. 그래도 한편으로 '''부상 없이 1년을 던지기 위한 기초 체력을 3년 동안 만들었다''' 라는 생각은 들었다. 이런 식의 트레이닝으로 습관이나 능력이 아닌 체력 하나만큼은 확실히 다지기는 했으니까..." 라고 말하는 한편으로 "벳쇼 감독은 항상 '''교진을 이겨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신론만 내세우고 체력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이었다" 라는 인물평을 남겼다.
말하자면 벳쇼는, '''전형적인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 에 해당되는 야구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이후
현장에서 물러난 벳쇼는 후지 테레비, 분카 방송의 해설가와 '''닛칸스포츠''' 평론가로 일했고 1979년 '''야구 전당'''에 입성하였다. 1992년 부터는 카와카미 테츠하루의 뒤를 이어 교진 OB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9년 6월 24일, 자택에서 급성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6. 여담
- 자신의 등판 간격은 3일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으며, 현역 시절 3일 이상 등판 간격이 늘어지면 감독에게 출전시켜 달라며 대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 만큼 벳쇼는 학창 시절에 위에서 언급한 선발대회 경기 중 홈 충돌 시에 입은 팔꿈치 부상(그것도 공을 안 던지는 왼쪽) 외에는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던 튼튼하고 유연한 어깨와 팔꿈치의 소유자였다.
- 벳쇼는 학생 시절에 잠깐이지만 교진군 에이스이자 당대의 슈퍼스타이던 사와무라 에이지와 인연이 있었다. 당시 벳쇼는 사와무라에게 과감히 다가가서 "어떻게 하면 사와무라 씨 처럼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죠?"라고 질문하자 사와무라가 내놓은 답은 "뛰어라" 였다. 이 말에 벳쇼는 러닝 훈련에 집중하여 하체를 단련했고, 달리는 동안 양 팔을 자연스럽게 앞뒤로 흔들면서 팔이 유연해지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 평소 벳쇼가 즐겨먹던 자신만의 스키야키 요리법이 있었다. 1954년 한 여성잡지의 부록인 가정요리 만드는 법에 실린 그 내용에 따르면,
>1. 쇠고기 등심과 양배추를 큼직하게 썬다.
>2. 1을 버터에 볶아서 설탕 만으로 간을 한다.
>3. 무즙과 달걀 노른자, 폰즈#s-2를 섞은 양념을 찍어먹는다.
벳쇼 曰,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버터의 짭짤한 맛과 폰즈의 간장 맛으로 먹는 철판구이에 가까운 요리이다. 나는 이것으로 고기를 100돈에서 150돈[21]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다. 폰즈는 식초 양을 많이 하고 취향에 따라 시치미#s-2를 뿌려 먹어도 좋다. 이 벳쇼 가문의 독특한 요리가 시합에서 소모된 나의 스태미너를 회복시키는 특별 메뉴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2. 1을 버터에 볶아서 설탕 만으로 간을 한다.
>3. 무즙과 달걀 노른자, 폰즈#s-2를 섞은 양념을 찍어먹는다.
벳쇼 曰,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버터의 짭짤한 맛과 폰즈의 간장 맛으로 먹는 철판구이에 가까운 요리이다. 나는 이것으로 고기를 100돈에서 150돈[21]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다. 폰즈는 식초 양을 많이 하고 취향에 따라 시치미#s-2를 뿌려 먹어도 좋다. 이 벳쇼 가문의 독특한 요리가 시합에서 소모된 나의 스태미너를 회복시키는 특별 메뉴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1] 본명은 벳쇼 아키라(別所 昭) 였지만 194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 다케히코로 개명했다.[2] 1961년 시즌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으나 등판 기록은 없다.[3] 1970년 8월 18일 성적 부진으로 중도 해임.[4] 감독 권한대행. 이듬해 후임 감독으로 미하라 오사무가 취임했다.[5] 大和軍. 1937년 '''고라쿠엔 이글스'''로 창단하여 이글스, 구로와시군(黒鷲軍)을 거쳐 1942년 9월 '''야마토 공작소'''에 구단이 매각되면서 야마토군으로 팀명을 변경하였으나 194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산했다. 이 팀의 역사를 승계하는 지금의 일본 프로야구 구단은 없다.[6] 1947년 6월부터 팀명이 난카이 호크스로 변경되었다.[7] 참고로 59년 후인 2005년 3월 27일, 치바 롯데 마린스가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를 26대 0 완봉승으로 박살냈다(...).[8] 벳쇼는 평소 이 기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후일 아카시야 산마가 진행하는 토크쇼 '''산마노만마'''에 출연하여 가장 먼저 이 기록을 자랑한 바 있다.[9]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사와무라상은 1988년 까지 센트럴 리그 소속 투수들만 대상으로 주었고, 1989년 부터 퍼시픽 리그까지 포함하여 시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벳쇼가 사와무라상을 탈 당시는 단일 리그였기 때문에 딱히 해당사항은 없지만... 이후 벳쇼는 1955년에도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10] 당시 요미우리 신문의 상무이사 '''무토 미츠노리'''가 벳쇼의 처가가 있는 긴자의 요정#s-2 '''코마츠'''를 출입하다 입수하게 된 정보라고 한다.[11] 한편으로 벳쇼는 후일 저서에서 교진과의 협상은 시즌 도중이 아닌 시즌 후였으며, 시즌 도중에 접촉에 관해서는 에이스가 유출된 난카이 구단 대표가 막말한 것이 아닌가 라고 적은 바 있다.[12] 그러나 1949년 시즌 초반 교진과 난카이의 경기는 벳쇼 빼내기 사건의 여파로 인해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4월 14일 개최된 교진 vs 난카이 전 9회초 무사 1루 상황에서 난카이의 '''오카무라 토시아키'''가 1루 땅볼을 쳤고, 교진의 1루수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2루에 송구하여 1루 주자 '''츠츠이 케이조'''를 포스아웃 시킨 뒤 유격수 '''시라이시 카츠미'''가 1루로 다시 던지려 했지만 츠츠이가 거칠게 슬라이딩 하는 바람에 시라이시는 던지지 못하며 병살은 무산되었다. 시라이시와 츠츠이는 2루에서 말싸움을 벌였고, 교진 감독 미하라 오사무가 그라운드로 뛰어가 심판에게 수비 방해 아니냐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려다 시라이시와 계속 실랑이를 벌이던 츠츠이를 보고 순간 욱 하여 그의 뒤통수에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이른바 '''미하라 구타 사건'''으로 인해 미하라는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교진 구단이 연맹 측에 통 사정하여 100일 출장정지로 경감되었고, 현역 선수이던 '''나카지마 하루야스'''가 감독 대행을 겸하면서 미하라의 지도 공백을 채운 교진은 그 해 전후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반면 난카이는 4위에 머무르며 스타일을 구겼다(...). [13] 神崎安隆(1932~1985). 히로시마 출신 포수로 1951년 쇼치쿠에 입단했지만 주로 불펜 포수로 뛰며 4시즌 통산 21경기 출장에 9타수 1안타, 타율 0.111의 초라한 성적만 남겼고, 1954년 고향 팀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하여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프로에서 유일하게 때린 1안타가 바로 벳쇼의 퍼펙트 게임을 저지한 그 안타였다(...).[14] 그 이전인 1950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타미야 겐지로가 9회 2사까지 잘 막아놓고 내야 안타를 맞는 바람에 퍼펙트 게임이 무산된 적이 있다.[15] 현재 스타루힌의 공식 통산 승수는 '''303승''' 이지만, 1939년에 거둔 42승 중 2승은 기록원의 실수가 있었다며 40승으로 줄었기 때문에 당시의 통산 승수는 '''301승''' 이었다. 1961년 이나오 가즈히사가 시즌 42승을 거두자 스타루힌의 1939년 기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그 당시 기록원의 판단을 존중하자는 커미셔너 결정에 따라 42승으로 원상복귀 되면서 통산 승수도 다시 2승이 추가되었다.[16] 상기 언급대로 스타루힌의 공식 통산 승수는 303승이기 때문에 현재 기준으로 벳쇼가 스타루힌의 기록을 경신한 승리는 같은 해 7월 9일에 마크한 304번째 승리이다.[17] 투수로 등판하여 친 홈런은 '''31개'''로 카네다 마사이치(38개), 요네다 테츠야(33개)의 뒤를 잇는 3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8] 그 해 두 번째 11연패 후 벳쇼는 감독직에서 잘렸고, 감독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오가와 요시하루'''가 5연패를 추가하며 최종적으로는 16연패 였다(...).[19] 당시 토요다는 아톰즈 선수로 뛰면서 타격 코치도 겸하고 있었다.[20] 松岡 弘(1947~ ). 1968년부터 1985년까지 18시즌 동안 산케이-야쿠르트에서 뛰며 통산 191승을 기록한 야쿠르트의 프랜차이즈 선수이다. 은퇴 후 야쿠르트의 투수 코치를 역임하고 여러 사회인야구팀과 학교 야구부 감독, 코치를 지냈으며 해설가로도 활동했다.[21] 1돈이 3.75g 이니 약 375~560g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