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이 마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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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1군 투수코치.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다.
투수코치로서는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우승청부사'''라고 불리며 닛폰햄과 소프트뱅크의 투수력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메이저리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합 다음날 선수와의 면담을 통해 투구를 복기하며 디브리핑할 수 있게 한다.
프로 1년차(1984년)에는 1군 등판 없이 2군에서만 기나긴 훈련을 받았다. 1985년 9월 16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 피칭을 기록하며 데뷔. 같은해 9월 18일에는 선발 등판을 하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2이닝 8실점을 기록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86년 각각 2경기 등판에 그친다. 1987년 드디어 첫 승을 기록한다.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6.1이닝동안 3실점을 하면서 QS를 간신히 달성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프로 첫 승리투수의 감격을 맛본다. 10월 13일에는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투구를 하면서 프로 데뷔 첫 완투승을 기록한다.
1988년, 요시이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는데 이것이 대성공. 50경기 80.1이닝 ERA 2.69 10승 2패 24S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퍼시픽리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좋은 활약을 보인 구원투수에게 주는 상이던 파이어맨 상을 수상했다.[1] 1989년에는 평균자책점이 2.99로 올랐지만 여전히 47경기 84.1이닝 5승 20세이브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긴테쓰 버팔로즈의 리그 우승에도 기여한다.
하지만 1990년, 45경기 8승 9패 15세이브 방어율 3.39를 기록했으며 WHIP이 1.48에 달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91년 마무리 투수에서 중간 계투로 보직을 변경, 1992년에는 9경기만 등판하고 2군에서 머문다.
1993년 이후로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1993년 6월 17일 세이부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한다. 1993년 최종 성적은 5승 5패 방어율 2.67로 선발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1994년에는 7승 7패 방어율 5.47로 부진하였다. 이 시기 스즈키 케이시 감독과의 의견 갈등을 빚다 결국 1994 시즌 종료 후 니시무라 타츠지와의 트레이드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다.
야쿠르트로 이적 후, 요시이는 완전히 선발 투수로 정착하며 킨테츠에 있던 것보다 더 좋은 활약을 거두었다.[2] 규정이닝을 채우고 1995년 10승, 1996년 10승, 1997년 13승으로 3년 연속 선발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했으며 22완투 5완봉의 뛰어난 이닝 이팅 능력과 타자친화적인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뛰었음에도 3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는 안정감 역시 보여주었다. 이렇듯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야쿠르트의 90년대 전성기의 주요 일원으로 활약한다.[3]
1995년에는 야쿠르트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일본 시리즈 3차전, 오릭스는 선발 투수로 좌완 에이스 호시노 노부유키를 선발로 내 보내고 야쿠르트는 요시이를 보내지만, 5회 초 스즈키 이치로에게 우익수 희생플라이를 맞으면서 1실점. 동점 상황이 되었다. 5회초 까지 마운드에서 투구하고 내려온다. 결과는 5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보여줬지만, 5회말 이나바 아츠노리의 대타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다시 1점을 리드하여 승리투수 조건을 가까스로 채웠다. 하지만 좌완 중간계투 카토 히로토가 다구치 소에게 1실점,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온 미야모토 켄지가 다시 더그 제닝스[4] 에게 2실점을 하는 바람에 요시이의 일본 시리즈 첫 승리 투수는 무산되었다.
일본에서의 커리어 하이였던 1997년에는 28경기 174.1이닝 13승 6패 방어율 2.99로 팀을 리그우승과 일본시리즈까지 올리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일본시리즈 3차전에 등판해서 4이닝 3실점. 야쿠르트는 마나카 미츠루와 도바시 카즈유키가 3점을 얻었지만 오오토모 스스무의 적시타, 다카키 다이세이의 희생플라이로 도합 3실점을 하게되어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동점 상황에서 강판되었다. 결국 일본시리즈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야쿠르트의 주축 선발로 두 번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1997년 시즌 종료후 요시이는 FA 자격을 취득했다. 여러 일본 구단의 오퍼가 있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메이저리그로 이적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5][6] 뉴욕 메츠와 1년 20만 달러 계약 + 성과금 지급으로 메이저리그로 이적했다. 이는 FA 제도를 통한 NPB → MLB로의 첫 이적 사례였다. 참고로 1960년대의 첫 일본인 메이저리거인 무라카미 마사노리는 원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가 야구 유학 격으로 마이너리그에 보낸 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메이저로 콜업시키며 메이저리그 데뷔를 하였고, 노모 히데오는 일본프로야구 은퇴 선언 뒤 LA 다저스와 계약하는 일종의 제도상의 헛점을 통해 메이저로 진출한 경우이다. 같은 오프시즌에 요시이와 같은 에이전트를 둔 이라부 히데키 이적[7] 등 일본 선수의 메이저 진출을 둘러싸고 여러 마찰이 일어났고 이는 포스팅 시스템의 제정과 국제 FA 제도 정비의 계기가 된다.
일본통을 자처하던 바비 발렌타인이 감독을 맡던 메츠에 입성한 요시이는 1998년 4월 5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메이저 데뷔전을 치루었다. 피츠버그 타선을 상대로 7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메이저리그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었다. 한편, 5월 21일에는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전반기에는 16경기 4승 4패 평균자책점 3.42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13경기 선발 등판, 2승 4패 평균자책점은 5.02로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29경기 171.1이닝 ERA 3.93 6승 8패를 기록하며 선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11월 12일에는 2년 간 500만 달러로 뉴욕 메츠와 재계약을 맺었다.
1999년, 요시이는 오른쪽 무릎 부상에 시달려 전반기에는 6승 7패, 평균자책점은 5.02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1999년 8월에만 2승, 평균자책점은 2.51를 기록하여 월간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 9월 5일에는 10승을 달성하였고, 31경기(29선발) 174이닝 12승 8패 평균자책점 4.40을 기록한다. 한편 팀은 포스트시즌에 진출 하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투수 빅 유닛 랜디 존슨을 만났다. 팀은 5회까지 4득점을 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요시이도 5.1이닝 동안 4실점으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첫 승리투수는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팀은 3:1로 디비전 시리즈에서 승리하면서 메츠는 챔피언십 시리즈로 올라갔다.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다. 당시 1차전 선발은 그렉 매덕스가 등판했는데, 요시이는 1차전 선발로 나서게 되는데, 4.2이닝 동안 2실점을 한다. 결국 패전투수가 되고 팀은 2승 4패로 패하면서 브레이브스에게 월드시리즈를 내줘야했다.
참고로 이 시절 메츠 산하 마이너리거였던 서재응과 인연이 생겼다. 스프링캠프나 시범경기 중 요시이에게 서재응이 포크볼을 배우기도 했다고.
2000년, 요시이는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된다. 2000년 4월 26일 피츠버그전에서는 메이저 첫 홈런을 기록했고 6월 24일에는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도루를 기록하기도. 7월 20일에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한-일 선발투수 맞대결이 있었는데, 상대는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박찬호'''[8] . 결과는 박찬호가 6이닝 3실점, 요시이가 6이닝 4실점을 하면서 요시이가 시즌 11패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5일 뒤의 쿠어스 필드 경기는 이 두 투수들간의 리턴매치[9] 가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7이닝 4실점(2자책)을 기록해 7이닝 2실점의 요시이에 비해 아쉬운 피칭을 보여줬지만 8회초 터진 팀 타선의 도움 속에 승리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전반기 성적을 보면 6월에 3연승 행진을 달려 기대감을 올렸지만. 난조를 보인 경기가 많아 전반기 17경기 4승 9패 평균자책점 5.55를 기록하였다. 오프시즌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수술을 받았다.
로키스 구단 측은 시즌 개막 전 요시이를 트레이드하려 시도했으나 풀리지 않았고, 결국 2001년 3월 스프링캠프 도중 로키스로부터 방출된다. 4월 13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1년 30만불 계약을 맺어 메이저 잔류에 성공했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스윙맨/롱 릴리프로 활동했으나 2002년 시즌 종료 후 논텐더로 풀리게 된다.
2003년 1월 오릭스 블루웨이브와[10] 계약하며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했고 2003년 개막전 선발을 맡았다. 이 때 상대는 친정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였는데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왼쪽 발목을 수술하는 등 부상 등으로 인해 6.51 ERA로 부진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는 요시이 외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또 한 명의 일본인 투수 스즈키 마코토[11] 도 함께 영입했는데, 이쪽은 아예 7점대 ERA로 더욱 폭주했으며[12] 오릭스는 당연히 꼴찌[13] 로 추락... 2004년에도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하며 방출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와의 합병 구단 오릭스 버팔로즈의 새 감독으로 취임한 오기 아키라 감독의 요청으로 입단 테스트를 다시 보게 되었고 팀에 잔류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3년간 더 오릭스에서 뛰게 된다.
2007년 시즌 도중 롯데의 외야수 히라시타 코지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지만 트레이드된 이후 4경기에서 1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괴멸적인 피칭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고를 받았고 독립리그 등에서 현역 속행을 희망했으나 결국 은퇴했다.
은퇴 후 2008년 닛폰햄의 투수코치를 맡아 2012년까지 투수를 키웠다. 이후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과 야구관 차이로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NHK와 폭스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쓰쿠바대학에서 스포츠건강시스템 매니지먼트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쓰쿠바대 석사과정 동기인 구도 기미야스의 요청으로 2015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불펜투수 코치를 맡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1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여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2019년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함께한 롯데에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투수코치 성향은 어지간하면 퀵후크와 연투, 이닝 쪼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2019년 롯데는 오프너 전술도 간간히 보여주었음에도 NPB 12개 구단들 가운데 가장 적은 연투(86회)와 3연투(6회)를 기록했다.기사 문제는 불펜 투수의 경우, 홀드, 세이브 요건에서는 역전당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내린다. 블론세이브도 아니고 역전이 기준이다!! 이렇다 보니 주자를 쌓은 투수들이 멘탈이 나가서 4-5타자 연속 안타를 처맞고 블론한 후에 역전까지 당해서 패배하는 일이 비일비재.
결국 이 지랄을 하는 바람에 시즌 최종전에서도 후타키가 1.2이닝 5실점을 하면서 개털리는 동안 5실점을 할 때까지 팔짱끼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올린다는게 세이부 상대로 3패를 떠안은 와쿠이 히데아키. 결국 와쿠이도 개털리면서 시즌을 이렇게 말아먹었다. 이구치랑 같이 팀에서 나가야 할 투수코치 1순위. 그런데 작년 투수코치가 너무 못해서 팬들이 요시이는 쉴드치는 경향이 좀 많다 보니 분명 철밥통 이구치랑 같이 재계약할것 같다.[14] 2020년에는 후쿠오카를 위협하면서 리그우승을 노리는 중이다.
1. 소개
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1군 투수코치.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다.
투수코치로서는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우승청부사'''라고 불리며 닛폰햄과 소프트뱅크의 투수력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메이저리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합 다음날 선수와의 면담을 통해 투구를 복기하며 디브리핑할 수 있게 한다.
2. 현역 시절
2.1. 긴테쓰 버팔로즈
프로 1년차(1984년)에는 1군 등판 없이 2군에서만 기나긴 훈련을 받았다. 1985년 9월 16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 피칭을 기록하며 데뷔. 같은해 9월 18일에는 선발 등판을 하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2이닝 8실점을 기록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86년 각각 2경기 등판에 그친다. 1987년 드디어 첫 승을 기록한다.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6.1이닝동안 3실점을 하면서 QS를 간신히 달성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프로 첫 승리투수의 감격을 맛본다. 10월 13일에는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투구를 하면서 프로 데뷔 첫 완투승을 기록한다.
1988년, 요시이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는데 이것이 대성공. 50경기 80.1이닝 ERA 2.69 10승 2패 24S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퍼시픽리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좋은 활약을 보인 구원투수에게 주는 상이던 파이어맨 상을 수상했다.[1] 1989년에는 평균자책점이 2.99로 올랐지만 여전히 47경기 84.1이닝 5승 20세이브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긴테쓰 버팔로즈의 리그 우승에도 기여한다.
하지만 1990년, 45경기 8승 9패 15세이브 방어율 3.39를 기록했으며 WHIP이 1.48에 달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91년 마무리 투수에서 중간 계투로 보직을 변경, 1992년에는 9경기만 등판하고 2군에서 머문다.
1993년 이후로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1993년 6월 17일 세이부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한다. 1993년 최종 성적은 5승 5패 방어율 2.67로 선발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1994년에는 7승 7패 방어율 5.47로 부진하였다. 이 시기 스즈키 케이시 감독과의 의견 갈등을 빚다 결국 1994 시즌 종료 후 니시무라 타츠지와의 트레이드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다.
2.2. 야쿠르트 스왈로즈
야쿠르트로 이적 후, 요시이는 완전히 선발 투수로 정착하며 킨테츠에 있던 것보다 더 좋은 활약을 거두었다.[2] 규정이닝을 채우고 1995년 10승, 1996년 10승, 1997년 13승으로 3년 연속 선발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했으며 22완투 5완봉의 뛰어난 이닝 이팅 능력과 타자친화적인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뛰었음에도 3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는 안정감 역시 보여주었다. 이렇듯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야쿠르트의 90년대 전성기의 주요 일원으로 활약한다.[3]
1995년에는 야쿠르트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일본 시리즈 3차전, 오릭스는 선발 투수로 좌완 에이스 호시노 노부유키를 선발로 내 보내고 야쿠르트는 요시이를 보내지만, 5회 초 스즈키 이치로에게 우익수 희생플라이를 맞으면서 1실점. 동점 상황이 되었다. 5회초 까지 마운드에서 투구하고 내려온다. 결과는 5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보여줬지만, 5회말 이나바 아츠노리의 대타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다시 1점을 리드하여 승리투수 조건을 가까스로 채웠다. 하지만 좌완 중간계투 카토 히로토가 다구치 소에게 1실점,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온 미야모토 켄지가 다시 더그 제닝스[4] 에게 2실점을 하는 바람에 요시이의 일본 시리즈 첫 승리 투수는 무산되었다.
일본에서의 커리어 하이였던 1997년에는 28경기 174.1이닝 13승 6패 방어율 2.99로 팀을 리그우승과 일본시리즈까지 올리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일본시리즈 3차전에 등판해서 4이닝 3실점. 야쿠르트는 마나카 미츠루와 도바시 카즈유키가 3점을 얻었지만 오오토모 스스무의 적시타, 다카키 다이세이의 희생플라이로 도합 3실점을 하게되어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동점 상황에서 강판되었다. 결국 일본시리즈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야쿠르트의 주축 선발로 두 번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2.3. FA, 그리고 메이저리그로
1997년 시즌 종료후 요시이는 FA 자격을 취득했다. 여러 일본 구단의 오퍼가 있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메이저리그로 이적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다.[5][6] 뉴욕 메츠와 1년 20만 달러 계약 + 성과금 지급으로 메이저리그로 이적했다. 이는 FA 제도를 통한 NPB → MLB로의 첫 이적 사례였다. 참고로 1960년대의 첫 일본인 메이저리거인 무라카미 마사노리는 원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가 야구 유학 격으로 마이너리그에 보낸 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메이저로 콜업시키며 메이저리그 데뷔를 하였고, 노모 히데오는 일본프로야구 은퇴 선언 뒤 LA 다저스와 계약하는 일종의 제도상의 헛점을 통해 메이저로 진출한 경우이다. 같은 오프시즌에 요시이와 같은 에이전트를 둔 이라부 히데키 이적[7] 등 일본 선수의 메이저 진출을 둘러싸고 여러 마찰이 일어났고 이는 포스팅 시스템의 제정과 국제 FA 제도 정비의 계기가 된다.
2.4. 뉴욕 메츠
일본통을 자처하던 바비 발렌타인이 감독을 맡던 메츠에 입성한 요시이는 1998년 4월 5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하며 메이저 데뷔전을 치루었다. 피츠버그 타선을 상대로 7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메이저리그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었다. 한편, 5월 21일에는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전반기에는 16경기 4승 4패 평균자책점 3.42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13경기 선발 등판, 2승 4패 평균자책점은 5.02로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29경기 171.1이닝 ERA 3.93 6승 8패를 기록하며 선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11월 12일에는 2년 간 500만 달러로 뉴욕 메츠와 재계약을 맺었다.
1999년, 요시이는 오른쪽 무릎 부상에 시달려 전반기에는 6승 7패, 평균자책점은 5.02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1999년 8월에만 2승, 평균자책점은 2.51를 기록하여 월간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그 이후 9월 5일에는 10승을 달성하였고, 31경기(29선발) 174이닝 12승 8패 평균자책점 4.40을 기록한다. 한편 팀은 포스트시즌에 진출 하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투수 빅 유닛 랜디 존슨을 만났다. 팀은 5회까지 4득점을 하는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요시이도 5.1이닝 동안 4실점으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첫 승리투수는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팀은 3:1로 디비전 시리즈에서 승리하면서 메츠는 챔피언십 시리즈로 올라갔다.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다. 당시 1차전 선발은 그렉 매덕스가 등판했는데, 요시이는 1차전 선발로 나서게 되는데, 4.2이닝 동안 2실점을 한다. 결국 패전투수가 되고 팀은 2승 4패로 패하면서 브레이브스에게 월드시리즈를 내줘야했다.
참고로 이 시절 메츠 산하 마이너리거였던 서재응과 인연이 생겼다. 스프링캠프나 시범경기 중 요시이에게 서재응이 포크볼을 배우기도 했다고.
2.5. 콜로라도 로키스
2000년, 요시이는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된다. 2000년 4월 26일 피츠버그전에서는 메이저 첫 홈런을 기록했고 6월 24일에는 다이아몬드백스전에서 도루를 기록하기도. 7월 20일에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한-일 선발투수 맞대결이 있었는데, 상대는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박찬호'''[8] . 결과는 박찬호가 6이닝 3실점, 요시이가 6이닝 4실점을 하면서 요시이가 시즌 11패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5일 뒤의 쿠어스 필드 경기는 이 두 투수들간의 리턴매치[9] 가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7이닝 4실점(2자책)을 기록해 7이닝 2실점의 요시이에 비해 아쉬운 피칭을 보여줬지만 8회초 터진 팀 타선의 도움 속에 승리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전반기 성적을 보면 6월에 3연승 행진을 달려 기대감을 올렸지만. 난조를 보인 경기가 많아 전반기 17경기 4승 9패 평균자책점 5.55를 기록하였다. 오프시즌에 팔꿈치 뼈조각 제거수술을 받았다.
2.6. 몬트리올 엑스포스
로키스 구단 측은 시즌 개막 전 요시이를 트레이드하려 시도했으나 풀리지 않았고, 결국 2001년 3월 스프링캠프 도중 로키스로부터 방출된다. 4월 13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1년 30만불 계약을 맺어 메이저 잔류에 성공했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스윙맨/롱 릴리프로 활동했으나 2002년 시즌 종료 후 논텐더로 풀리게 된다.
2.7. 일본 프로야구로 복귀 & 오릭스 블루웨이브/오릭스 버팔로즈
2003년 1월 오릭스 블루웨이브와[10] 계약하며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했고 2003년 개막전 선발을 맡았다. 이 때 상대는 친정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였는데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왼쪽 발목을 수술하는 등 부상 등으로 인해 6.51 ERA로 부진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는 요시이 외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또 한 명의 일본인 투수 스즈키 마코토[11] 도 함께 영입했는데, 이쪽은 아예 7점대 ERA로 더욱 폭주했으며[12] 오릭스는 당연히 꼴찌[13] 로 추락... 2004년에도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하며 방출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와의 합병 구단 오릭스 버팔로즈의 새 감독으로 취임한 오기 아키라 감독의 요청으로 입단 테스트를 다시 보게 되었고 팀에 잔류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3년간 더 오릭스에서 뛰게 된다.
2.8. 치바 롯데 마린즈
2007년 시즌 도중 롯데의 외야수 히라시타 코지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지만 트레이드된 이후 4경기에서 1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괴멸적인 피칭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고를 받았고 독립리그 등에서 현역 속행을 희망했으나 결국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2008년 닛폰햄의 투수코치를 맡아 2012년까지 투수를 키웠다. 이후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과 야구관 차이로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NHK와 폭스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쓰쿠바대학에서 스포츠건강시스템 매니지먼트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쓰쿠바대 석사과정 동기인 구도 기미야스의 요청으로 2015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불펜투수 코치를 맡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1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여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2019년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함께한 롯데에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투수코치 성향은 어지간하면 퀵후크와 연투, 이닝 쪼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2019년 롯데는 오프너 전술도 간간히 보여주었음에도 NPB 12개 구단들 가운데 가장 적은 연투(86회)와 3연투(6회)를 기록했다.기사 문제는 불펜 투수의 경우, 홀드, 세이브 요건에서는 역전당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내린다. 블론세이브도 아니고 역전이 기준이다!! 이렇다 보니 주자를 쌓은 투수들이 멘탈이 나가서 4-5타자 연속 안타를 처맞고 블론한 후에 역전까지 당해서 패배하는 일이 비일비재.
결국 이 지랄을 하는 바람에 시즌 최종전에서도 후타키가 1.2이닝 5실점을 하면서 개털리는 동안 5실점을 할 때까지 팔짱끼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올린다는게 세이부 상대로 3패를 떠안은 와쿠이 히데아키. 결국 와쿠이도 개털리면서 시즌을 이렇게 말아먹었다. 이구치랑 같이 팀에서 나가야 할 투수코치 1순위. 그런데 작년 투수코치가 너무 못해서 팬들이 요시이는 쉴드치는 경향이 좀 많다 보니 분명 철밥통 이구치랑 같이 재계약할것 같다.[14] 2020년에는 후쿠오카를 위협하면서 리그우승을 노리는 중이다.
4. 여담
- 통산 251승을 자랑하는 히가시오 오사무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 때문에 요시이는 히가시오의 현역 시절 등번호인 21번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말년에 잠시 거쳐간 롯데를 빼면 소속된 적이 있는 모든 일본프로야구 구단(긴테쓰, 야쿠르트, 오릭스)에서 21번을 달았다.
- 코치로서의 롤 모델은 긴테쓰 시절의 은사 곤도 히로시라고 한다. 오기 아키라 감독 아래에서 요시이는 마무리 투수로 처음 두각을 나타냈지만 1988년의 10.19 더블헤더나 다음 해의 리그 우승이 달린 중요한 경기[15] 등 중요한 장면에서 오기 감독은 요시이가 아닌 좌완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16] 를 등판시키는 등 요시이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고, 이에 단단히 삐진 요시이는 1989년 리그 우승 행가레의 와중에도 참가하지 않고 실내 연습장에 있었다고. 이미 투수 기용 등의 문제로 오기 감독과 의견대립이 있던 곤도 히로시 코치가 이 때 요시이를 달래 주었는데 시즌 종료 뒤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곤도는 코치직을 사임한다. 요시이는 이를 통해 선수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자세인지를 배웠다고 한다. 오기 감독과 요시이는 2005년[17]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다시 재회한다.
[1] 야스다 생명보험이 협찬했고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상을 수여했다. 포인트 산출방법은 (구원승리 + 세이브 수)*2 - 구원 패전 수[2] 노무라 카츠야 감독 시절 다른 팀에서 잉여 자원으로 판정된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노무라 재생공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3] 하지만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순위를 나열하면 5-3-1-1-4-1-4-1-4-4-4-1인데 압도적 강팀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애매하다. 팀 뎁스가 얇아서 후루타 아츠야나 카와사키 켄지로 등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당하면 4위로 꼴아박는 시즌이 많았기 때문. 물론 1위를 찍은 시즌의 포스는 김성근 감독 시절 SK 와이번스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4] NPB 등록명은 D・J였다.[5] 재미있게도 이 때 요시이의 에이전트는 노모 히데오의 메이저 진출을 주도한 돈 노무라(노무라 단)로, 당시 요시이의 소속팀이던 야쿠르트의 감독 노무라 카츠야의 아들이다. 친아들은 아니고 후처인 노무라 사치요가 전 남편인 미국인 사업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결과적으로 아들이 아버지 팀의 전력 약화에 일조한 셈. 덤으로로 이 때 야쿠르트에는 노무라의 친아들인 노무라 카츠노리가 백업포수로 뛰고 있기도 했다. 자세한 가족사에 대해서는 노무라 카츠야 항목 참조.[6] 돈 노무라와 함께 메이저 이적을 경험한 긴테쓰 시절의 동료이던 노모 히데오의 조언이 미국 진출 결심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7] 이쪽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트레이드 형태였지만, 이라부 본인의 땡깡과 이라부에게 베팅하고자 한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반발에 힘입어 많은 마찰이 있었고 결국 파드레스가 뉴욕 양키스에 이라부를 트레이드하는 형태로 이라부는 양키스에서 뛰게 되었다.[8] 같은 해 4월 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에서 이라부 히데키와 박찬호가 맞붙은 것에 이은 메이저리그 사상 두 번째 한-일 선발투수 대결이다.[9] 이자 세 번째 투수 한일전.[10] 구대성이 뛰던 시기이다.[11] 미국 시절에 줄여부르던 이름인 '맥 스즈키'로 더 잘 알려진 선수. 고교야구 시절 폭력사건 등에 연루되어 야구부에서 뛸 수 없게 되자 일본을 떠나 마이너리거로 프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선수로, 앞서 언급된 에이전트 돈 노무라가 처음으로 대리인을 맡은 선수이기도 하다. 상술했듯 미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기에 G.G.사토처럼 오릭스에 신인 드래프트로 입단했다. 메이저에선 6년간 뛰면서 고정 선발도 맡은 시즌이 있을 정도로 나름 버텼으나(6시즌 통산 117경기 67선발 16승 31패 ERA 5.72.) 일본에서는 3년 만에 방출했다. 이후 중남미 윈터 리그, 멕시칸 리그, 독립 리그 등을 떠돌아다니면서 거기서는 준수하게 던지면서 2년간 대만에서 뛰기도 했고(첫 해는 대체용병으로 들어와 불펜으로 나름 잘 했으나 2년차에는 ERA 11점대로 광속퇴출) 2007년에는 라쿠텐의 입단테스트도 받았으나 불합격. 2011년 독립 리그를 끝으로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마쳤다.[12] 이 해 오릭스는 당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상대로만 '''20점 이상을 내주고 패배한 경기만 4번'''이라는 치욕적인 성적을 남겼으며, 이 중 요시이(7월 27일, '''26-7''' 패배)와 스즈키(8월 1일, '''29-1''' 패배)가 선발로 나선 경기가 한 경기씩 있다.[13] 그냥 꼴지가 아니라 '''팀 실점, 자책점, 피안타, 평균자책점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기록을 찍은 역대급 약팀이었다.[14] 다만 이구치 타다히토 감독의 힘이 롯데 1군 내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는 말이 있어서 저 이상한 투교도 전부 이구치의 지시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15] 10월 12일 더블헤더에서 랄프 브라이언트가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수 홈런을 때리며 세이부의 에이스 궈타이위엔,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박살내고 세이부를 따돌리는데 성공했고, 그 다음 최종전 바로 직전 시합인 10월 14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5 - 2로 승리하며 2위(오릭스), 3위(세이부) 팀과 불과 1, 2리 차로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다.[16] 그러나 오기 감독의 다소 무리한 혹사 기용으로 아와노도 이후에 부상에 시달리며 선수생명이 꼬여 버렸다. 아와노는 이후 곤도가 감독을 맡고 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하며 1998년의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일조하나, 이미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로서의 실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17] 오기는 폐암으로 시즌 종료 후인 그해 12월 사망하며 이 해가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